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7)
디존슨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반역의…… 주동자라는…… 것입니까?”
얼마 만의 흥분인지 말이 떨린다.
그게 오히려 겁을 먹었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일까?
디존슨은 더 깊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리고 내가 증명할 수 없는 길은 없으니, 깔끔하게 결투 재판으로 마무리를 짓고 말입니다?”
“너를 살리고자 하는 나의 마음. 이것 빼고는 네가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
그것마저 가증스럽게 자신의 아량으로 포장하는 디존슨.
“하하하하.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아요.”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모든 죄인들의 죄를 내게 지어 주시지요.”
“응?”
“제가 주동자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 처형이 될 모든 죄인들을 제가 변호하지요.”
흠칫하는 디존슨과 그 일당들.
“어차피 이들을 그냥 처형시킬 수 있으시겠습니까? 엄연히 법이 있는데.”
“그러니까 네가 모든 걸 대표하겠다?”
“주동자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
“깔끔한 정리 방법 아닙니까? 저도 저와 관련되어 있다는 모든 이들의 결백을 깔끔하게 증명할 수 있게 되고 말입니다.”
나를 미쳤다 생각할까? 아니면 뭔가 있다 생각하고는 두려워할까?
예측할 수 있는 문제다.
그는 멍청한 디존슨. 당연히 전자이지 않겠는가. 애초에 내가 원하는 판을 깔아 주었으니 말이다.
“하하하하! 그거 아주 명료하구나. 네가 결백을 증명하면 아주 많은 이들에게 칭송받겠어. 이건 네게 아주 훌륭한 거래구나.”
“그렇지요. 아주 훌륭한 거래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네 거래를 인정할까? 항변의 모든 기회를 네게 맡기는 건데, 억울해하지 않을까?”
고개를 돌렸다.
믿는 사람. 당황해하는 사람. 그리고 두려워하는 사람들. 저들 중 영향력이 있는 자들은 뇌옥에서 이미 나와 손을 잡기로 한 사람들.
하지만 저들은 이 결투 재판에 대해 알지 못한다.
―더 좋은 것 같은데?
다른 이들에게, 페컴에게까지 숨기라고 했던 린델은 그리 말했었다.
―같은 편이라고 마냥 좋은 건 아니니까. 믿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 기회에 확인하라는 것. 누가 내 사람에 더 가까운지를 말이다.
어찌 됐거나 디존슨은 벌써부터 일이 다 풀린 것처럼, 엄청난 아량을 베푸는 절대자의 흉내를 냈다.
디존슨은 나와 함께 끌려온 이들을 보며 물었다.
“내 조카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닌 자들은 따로 한편에 서라. 내 충분히 변명의 기회를 줄 것이다.”
몇 명이나 나올 것인가?
디존슨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떠올랐다.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나의 체면은 떨어질 것이고, 자신의 위엄은 올라갈 거라 생각할 테니까.
“…….”
“나와라. 내 충분한 기회를 주고 살려 줄 것이다.”
“…….”
하지만 나서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이건 솔직히 의외다. 몇 명 정도는 나설 줄 알았는데 말이다.
모두가 침묵하자 디존슨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하긴. 죄다 머리들은 있는 자들이니.’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당연한 거다. 여기 끌려온 죄인, 아니 누명을 쓴 이들은 에렌의 핵심 인력들. 디존슨이 어떤 자인지 아는데 그의 편에 서겠는가?
“좋다! 용서의 기회를 줬음에도 죽겠다는데, 더 이상의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겠지!”
디존슨은 애써 분노한 표정을 숨기며 외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적 로라스를 심판할 자. 누가 나서겠는가?”
“제게 역적을 죽일 영광을 주십시오.”
“제가 이 일의 적임자.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고는 다시 외치는 소리에 뒤에서 시립해 있던 기사들, 그리고 앞 열 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디존슨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위엄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계속하여 나서는 이들을 지켜만 보았다.
“흐음!”
헛기침을 하며 슬쩍 나를 보는 디존슨.
“수많은 죄인들이 있는데, 한 번의 재판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너무 잔인한 일. 몇 번의 승부를 볼 기회를 주마.”
“기회라…….”
“토너먼트지. 각자 세 명의 대리인을 내세우고, 이긴 자가 계속 결투를 진행할 수 있는 토너먼트.”
“…….”
“그리 자신 있어 하는 것 같으니, 네가 세 명을 다 이겨도 되는 거지. 그래야 네가 더 살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느냐?”
확고하게 죽일 기회겠지.
어떻게든 나는 제거하겠다는 뜻.
그간의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번번이 내게 골탕 먹었던 것을. 그래서 세 번을 내세운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나저나 멘토라스가 중간에 또 수를 부렸군.’
원래 세 번의 결투 재판은 예상에 없던 일.
‘얕은 수야.’
그의 입장에서는 결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일 터.
‘그래. 마음껏 해 보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이미 마음을 먹었는데.
“어떠냐? 내 제안이.”
“그것도 아주 좋습니다. 직접 나서시렵니까?”
“내가 조카인 너와 검을 마주하는 건 법도가 아니지. 내 에렌을 대표하여 세 명의 대리인을 뽑겠다.”
그러고는 나선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마치 왕에게 간택받길 기다리는 후궁들처럼, 얼굴을 내밀고 몸을 쭉 펴는 인간들.
‘이것 봐라?’
그제야 봤다.
나선 놈들 중 제법 눈에 들어오는 놈들이 있다는 것을.
‘세 명인가?’
그리고 훑어보기 무섭게 디존슨이 대리 결투자를 호칭했다.
“리처드, 샘슨, 벤.”
정확히 눈에 들어온 놈들이 앞으로 나왔다.
참으로 흔하디흔한 이름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실력들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가명인가?’
저만한 실력자면 그래도 이름은 알려졌을 터인데.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
“다 골랐다. 그런데 널 위해 나설 사람이 있느냐?”
디존슨의 물음에 좌중을 둘러보았다.
* * *
‘괜찮을까?’
번천, 테라 등은 일어나는 일을 보며 점점 불안해졌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투 재판이라니.
스스로 에렌으로 들어가 뇌옥에 갇힌 것도 사실 이해는 안 됐다. 그래도 강력하게 말릴 수 없던 이유는 최소한의 믿음 때문이었다.
여차할 경우 로라스는 몸을 빼낼 수 있으리라는 그런 믿음.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일을 벌이면, 빼내고 싶어도 빼낼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도망이라도 치면 평판은 바닥에 떨어질 터.
차라리 와카디아의 병력을 이용하여 에렌과 한판 승부를 벌리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라스는 어떠한 움직임도 허락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하게 지켜보는 사이, 디존슨이 세 사람의 결투 대리인을 내세웠을 때.
“……!”
번천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놈!’
샘슨이라고 불려 나온 사람.
두터운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은 정확히 그놈이 누군지 알았다.
카벨로. 용병 마법사로 불리는 켄트라미우스단의 용병단장. 자신의 원수. 바로 그놈이었다.
아는 얼굴은 또 있었다.
리처드라 불린 놈.
그는 리처드가 아니다.
해피랜드의 교주 츠어질.
저놈이 왜 여기에서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저놈도 반드시 원한을 갚아 줘야 할 놈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두근두근.
번천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불러 주시겠지?’
디존슨이 세 명을 한 팀으로 하는 토너먼트를 제안했으니, 이쪽도 세 명.
번천은 슬쩍 에르자일과 테라를 쳐다봤다.
주군이 직접 나설 것이고 또 에르자일도 분명 호명할 것 같았다. 그럼 남은 자리는 하나.
‘아직은 내가 위다.’
그때 테라의 시선이 번천에게 향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가야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그렇게 불태우고 있을 때, 로라스의 입이 열렸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 했으니, 제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면 될 뿐!”
로라스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
번천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언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습니까?”
“…….”
“그냥 백부의 대리인 셋을 함께 상대하도록 하지요. 아주 깔끔하게 말입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 * *
웅성이는 사람들을 로라스는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고는 디존슨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 결정됐으니 이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풀어 주시지요.”
너무 자신감 있게 나서서였을까?
디존슨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꿍꿍이지?’
디존슨은 당장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철저하게 파괴하려고 했는데 저리 나오니 의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셋이 힘을 합치면 아버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실력자들이다.’
디존슨은 세 명의 대리인을 보다가, 다시 로라스를 보며 생각했다.
‘저놈이 발악을 하는 것인가? 죽기 전에 강렬한 인상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둘 다 상식에 맞지 않는 추측.
하지만 그 외에 또 무슨 추측을 할 수 있을지 디존슨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럴 리가요. 백부께서는 아무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들었으니, 나중에 딴소리는 하지 않겠지.”
“제 말이 그겁니다. 제 말뿐만이 아닌 백부의 말도 들었으니. 모든 의문을 이번 결투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겠다는 그 말 말입니다.”
“오냐. 걱정하지 말거라. 에렌의 영주인 나다. 한 번 뱉은 말은 지킬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모욕을 주려 한다고 생각한 디존슨이 노해 소리쳤다.
“재판을 시작하라!”
* * *
위엄이란 건 말이다.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그것이 축적되어, 원래 타고난 것처럼 그냥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격이란 것.
난 변덕 맞다.
나서지 않으려고 해도 기분에 따라 나섰고, 평범하게 살고자 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꿨다.
어쩌겠는가?
난 인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먹고살고자 곡식과 가축을 키울 때, 난 내 눈이 즐겁고자 화초를 키우고, 내가 편하고자 사람을 키우는 사람.
굳이 특별하게 말하지도, 움직이지 않아도, 의지만으로도 그렇게 되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래. 내가 너무 설렁설렁 살았다.
그냥 남들처럼 크게 눈에 띄지 않았고, 그게 평범한 건 줄 알았으니까.
난 평범하지 않으며 또한 평범한 적이 없었고, 평범해 보지도 않아서 일어난 착각.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렀다.
효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범한 건 어렵지만!
할아버지의 고민을 덜어 드리고, 외부의 움직임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버지의 걱정도 덜어 드리는 건 참으로 쉽다.
에렌을 먹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다시 한 번 지배자가 되기로, 절대자가 되기로 했다면, 그만한 격은 보여 줘야지.’
수족에 채워졌던 것들이 풀렸다.
사실 이것도 스스로 풀까 했지만, 그냥 둔 이유는 하나다.
그렇게 해서 디존슨이 괜히 겁이라도 먹으면 어쩔 것인가?
결투 재판이고 뭐고, 도망이라도 치면?
기껏 깔아 둔 판이 엉망이 되면, 또 이것저것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세 놈이 못마땅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가?’
감히 내 앞에서?
잡스러운 것들이 감히 말이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모두에게 알려 줄 것이다.
혈육 사랑이 지나쳐 서른도 안 된 애송이를 후계 후보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얼마나 개소리였던 것인지.
그리고 이후 에렌의 지배자가 될!
무릎을 꿇고 충성을 바쳐야 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똑바로! 알려 줄 것이다.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