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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36화 (23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6)

‘기를 누르겠다는 건가?’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죽 늘어선 병사들을 보며 로라스는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도 말이지?’

손은 허리 뒤로 돌려 마나 수갑을 채우고 전신은 굵은 쇠사슬로 칭칭 감았다. 거기에 발목에도 철구가 달린…….

‘이건 족갑이라 해야 하는 건가?’

여하간 기가 차긴 했다.

‘이래서 당신은 안 된다는 거야. 대범함이 전혀 없잖아.’

디존슨은 분명 크게 모자람 없는 범인凡人.

그것만으로도 모자람은 없을 것이나, 에렌의 책임자는 그런 평범한 자가 감당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

디존슨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 이후 북부 대영주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 그릇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름 절차를 지키는 폼을 잡기는 하지만, 안 하니만 못하지.’

막가기로 결정했으면 그렇게 해야 했다.

여기까지 일을 벌려 놓고, 나름 명분을 챙기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더 귀찮았다.

차라리 뇌옥에서 암살자 따위를 보냈으면 그냥 속 시원한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디존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린델의 작품이긴 하지만…….’

주도권을 가지고 오기 위한 계획.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은 그 때문이다.

린델 각본에, 멘토라스 연출 그리고 주연은 나.

완벽하게 연기를 펼쳐 줄 생각이다.

“조카님 오셨는가.”

마침내 디존슨을 눈앞에 두었다. 주변으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거만한 표정의 그를 말이다.

실망이다.

정말 실망이다.

저잣거리 파락호들도 적의 숨통을 끊는 순간은 나름 예우를 갖추는데, 그래도 귀족이란 놈이, 대리긴 하지만 현재 에렌의 최고봉에 있다는 놈이, 이런 잡스러운 광경을 연출하다니 말이다.

게다가 앞에 놓인 술상은 무엇인가?

붉은빛이 감도는 와인 잔.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 요리들.

디존슨은 여기로 날 끌고 오기 전까지 사흘 동안 뇌옥의 배식을 끊었다.

마치 이런 장면을 위한 것처럼.

‘격 떨어지게!’

제 딴에는 이런 걸로 위엄을 세우려는 것 같은데, 이건 위엄이 아닌 소인배라 광고를 하는 거다.

‘위엄이란 건 말이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디존슨에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큰아버님.”

“나는 안녕하지만, 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구나.”

“그런 것 같지요? 이래서 사자가 강아지와 어울리지 못하고, 독수리가 참새와 부리를 맞대지 않는 법인데 말입니다.”

“뭐라?”

“한 끼 먹잇감에 불과한 것들을 같은 격으로 취급하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디존슨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보고 싶을 뿐이다.

자신이 조연인지도 모르는 디존슨의 연기를.

‘뭐 예상이야 된다만.’

여하간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을 것 같았던 그는 용케 속내를 숨기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랬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네가 아무리 내 조카이고 아버님의 손자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는 건 알았지만, 반역은 아니지.”

디존슨에게 되물었다.

“반역요?”

“그래! 어떻게 이런 흉측한 생각을 했는지! 나도 그리고 아버님도 너를 그리 귀애하였거늘! 어찌 그런 생각을 한 것이냐!”

“저도 알지 못하는 반역이라. 제가 오히려 궁금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여봐라!”

디존슨은 주변을 보며 소리쳤다.

“죄인들을 끌고 오라.”

디존슨의 명령에 몇 명의 사내들이 줄줄이 쇠사슬에 엮인 채 나왔다.

“……!”

그중에는 로라스가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포플러?’

순간 헷갈렸다.

번천 못지않게 육중하면서도 잘 단련돼 있던 포플러의 몸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쩍 마른 것이, 술 중독자가 딱 저럴 듯싶었다.

이건 좀 예상 밖이다.

거짓 증거, 증언을 만들기 위해, 누가 될지 모르는 연기자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 연기자가 포플러일 줄은 말이다.

‘대체 얼마나 시달렸기에…….’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연기자. 그리고 그 뒤로 또 아는 이가 나왔다.

나이트 나젤이었다.

미딩에서 열린 대회를 호위했던, 기사대장이었던 자.

그 역시 형태가 마찬가지였다. 몇 날 며칠을 한숨 자지도 못해 보이는 것이, 눈두덩이 마치 숟가락으로 듬뿍 파인 듯했다.

“……!”

그 순간 포플러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리고 그 표정은 마치…….

“하아!”

한숨이 아닌 안타까움이다.

죽을 듯한, 미안해 정말 어쩔 줄 모르는 저 표정.

“죄를 소상히 고하렷다!”

그때 디존슨이 끌려온 이들에게 소리쳤고, 내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독을 구했었다는 둥 어쌔신을 고용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둥.

특히 나젤의 발언은 주변 사람들을 웅성이게 할 정도로 여파가 있었다.

“로라스 백작은 일군단의 불온한 무리와 손을 잡고, 군단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일원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사실이고, 진위 여부를 파악해야 할 증언. 하지만 억지로 만든 각본에 그 여부를 알아볼 리는 없지 않겠는가?

역적이 되는 건 이리도 쉬운 일.

‘이 정도로 억지 명분을 만들 거면 차라리 살생부를 만드는 게 깔끔했을 터인데. 멍청하게 남의 무대에서 뛰어 놀다니.’

하여간 이 엉터리 재판을 어찌 진행시킬지 궁금하다.

“죄를 고하라!”

그리고 순서가 포플러에게까지 왔다.

“고하라 했다!”

포플러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디존슨이 다시 소리쳤다.

“전…… 전…….”

그럼에도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탓에 디존슨은 술잔을 포플러에게 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인이 죄를 실토할 때까지 쳐라!”

주변에 시립해 있던 병사들이 다가갔다. 언제 잡았는지 모를 몽둥이를 들고 다가갔다.

퍼어어억! 퍼어어억!

그리고 구타를 시작했다.

이러면 디존슨이 어떤 못난 짓을 벌일지 기다릴 수가 없는데 말이다.

포플러가 배신하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배신?

오히려 저런 모습이 될 정도로 버텼다는 게 더 기특했다.

명예를 지키지 못한 거 아니냐고?

그래. 그런 것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포플러는 아니다.

그는 잔정이 많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순수한 놈이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게 어디 고문만일까?

아마도 제가 끔찍이 여기는 가문에 대한 위협을 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미안했다.

난 포플러를 그렇게까지 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모난 구석이 없는, 그냥 재미있는 녀석일 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어찌해야 할까?

난 디존슨이 어떻게 나올지 더 지켜보고 싶은데.

그렇게 그의 끝없는 밑바닥을 확인할수록 내 의지가 확고해지지 않겠는가?

적들을 집어삼키고 이 에렌을 손아귀에 움켜쥐는 그 귀찮은 의지가 말이다.

―그냥 쉬어.

“커헉!”

포플러는 그대로 혼절했다.

눈치챈 놈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놈이 있어, 내가 손을 썼는지 알아보겠는가?

“치워라!”

포플러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하는 디존슨을 쳐다봤다.

‘자, 충분히 기다렸으니, 클라이맥스로 넘어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알아들었나?’

* * *

“쿨럭!”

베스타인 공작이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토해 냈다.

“주군!”

섀도가 급히 다가왔지만, 공작은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주군…….”

“피 색이 검지 않느냐. 내상이 예상보다는 심하지 않은 것 같다. 기력의 문제야.”

베스타인 공작의 나이 이제 여든에 가깝다.

누구보다 많이 먹고, 누구보다 단련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포스 역시 충만했으나 천수天壽는 그와 연관성이 없는 듯했다.

베스타인 공작은 단 며칠 사이 만에 잔뜩 늙어 버린 얼굴로 섀도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고생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근래 대륙적으로 생겨난 게이트. 아무래도 인위적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섀도는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스타인 공작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특히 내가 상대했던 그놈. 소멸시키지 못한 게 너무 마음에 걸리는구나.”

“…….”

“심한 타격을 받았으니 시간이 걸릴 터이지만, 불가사의한 회복력을 지녔던 놈이다.”

“다시 나타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미 한 번 나타났던 놈이니 그럴 것이다.”

공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잡았어야 했는데. 더 확실히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구나.”

“주군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런 놈을 정리했겠습니까?”

“그래서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이번에 그리 도망쳤으니, 다음에 나타날 때는 이번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춘 후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최소한 나를 이길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겠지.”

그제야 섀도는 쉽게 볼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고, 그때 공작이 다시 말했다.

“내가 전력으로 붙어야 할 것 같구나. 이번 사태, 그리고 그놈의 정체. 알 수 있는 건 모두 알아야겠다.”

“수하들을 시켜.”

“아니. 네가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가 아니면 조사 자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전 주군의 곁을…….”

“섀도.”

“네, 주군.”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전에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두고 싶다.”

“주군! 어찌 그런 말씀을…….”

베스타인 공작은 착잡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항상 곁에 있었던 너이니만큼 날 제일 잘 알 터.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없어도 네가 나서라. 부탁이다.”

섀도는 급히 부복하며 외쳤다.

“주군…… 어찌…… 그런 단어를…….”

“네게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고약하게 남아서야 되나.”

섀도는 더 말했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해 줄 수 있겠지?”

“목숨을 바쳐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섀도가 그리 사라진 후 베스타인 공작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늙는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는데, 이리 자각하니 시간이 덧없는 것 같았다.

‘좀 빨리 나타났었다면.’

해야 할 일이 생김에 정말 기뻤을 텐데 말이다.

베스타인 공작은 눈을 감았다.

* * *

하하하하하하.

정말 그렇게 입 바깥으로 웃음을 낼 뻔했다.

“받아들이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곱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냐?”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디존슨을 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부족한 명분을 채우기 위해, 나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결투 재판.

물론 이미 알고는 있었다.

린델이 상황의 주도권을 가지고 오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별로 눈치 보는 것도 없이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멘토라스가 정말 노력을 많이 했군.’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멘토라스를 움직였다.

결투 재판은 멘토라스 입장에서도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제안이었을 터.

디존슨에게 충성을 바치는 무인을 제거할 수 있는 그런 기회였으니까.

‘제법 현명한 줄 알았더니 양쪽 모두 덥석 미끼를 물었다는 거지?’

“하하하하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군대는 목소리. 비웃는 표정. 그 와중에 안쓰럽게 보는 얼굴들까지.

“미쳤구나, 네가.”

자신이 압도적인 상황이라 생각했는지, 화를 내기는커녕 여유롭게 미소까지 보이는 디존슨.

싱거울 정도로 우리가, 아니 내가 원하는 판이 깔린 게 허탈하긴 했지만.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그들의 재롱은 다 보았으니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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