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5)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린 채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두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 있고, 실제로 그들과 견줄 자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자들.
천외천.
하지만 그런 그들은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자신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고, 저 밝은 태양 아래서 자신의 빛을 뽐내는 반딧불이었다.
보라!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노년의 무인을 말이다.
슈아아아아앙!
가공할 파공음이 천둥치듯 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빛이 없는 공간에서 섬광을 만들어 내는 베스타인 공작.
캬캬캬캬캬캬캬.
그리고 그런 공작을 상대하는 검은 실루엣.
그 형체는 동굴 한편을 메울 정도로 거대하였으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그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실질적인 물物을 갖추고, 또 때로는 기氣처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과 각도로 검은 촉수가 공작을 향했다.
하지만 공작은 그것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의 눈도 다른 사람처럼 두 개였고 사지는 네 개였기에, 물리적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별다른 움직임도 아니었다.
그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실루엣을 양단할 것같이 길게 검을 세로로 베는 것뿐.
하지만 그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실루엣의 촉수는 감히 공작을 찌르지 못했다. 아니, 그 근처로 가는 것만으로도 소멸할 뿐이었다.
치이이이이이.
그리고 그럴 때마다 뭔가에 타오르듯 기화하며, 그 형체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마침내 검은 실루엣이 그 형태가 작아져 사람의 두 배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때, 마침내 주변을 감싸던 검은 연기는 사라지고, 본체本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관자놀이에 자라난 거대한 뿔. 검붉은 피부 그리고 뱀의 그것과 같은 송곳니. 엉덩이에는 돼지처럼 꼬불거리는 기다란 꼬리까지.
그 모습은 마치 종교 서적에서나 이야기 속에서 봐 왔던 마왕, 마귀, 마족, 수많은 단어로 표현되는 그것과 같았다.
본체를 드러낸 마족은 더없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 건방진 시선을 베스타인 공작에게 향했다.
“인간이 제법.”
사람 같지 않은 형태에서 인간의 말이 튀어나왔을 때.
“몬스터 따위가 제법.”
공작에게서 자신의 말투를 고스란히 돌려받는 마족.
“재미있구나. 내가 인간 따위가 두려워 싸움을 피한 것인 줄 아느냐?”
“웃기는구나. 겁을 먹고도 겁먹지 않은 척하는 이유도 알겠고…… 또 하나도 알고 있지. 능력 없는 것들이 말들이 많다는 것. 고금의 진리지.”
“제법 괜찮은 것 같아 내 사역의 영광을 내리려…….”
마족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 종족에서도 본능이란 인간의 단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몸을 옆으로 젖힐 뿐이었다.
투욱!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검붉은 팔 하나.
캬아아아아아아!
뒤로 주춤하며 비명을 지르는 마족을 보며 베스타인 공작은 아까 그가 취했던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말이 많아.”
그리고 지체 없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터어어어엉!
기다랗게 말린 꼬리가 검을 막았으나.
투욱!
다시 떨어지는 꼬리.
“변하면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여유롭게 말까지 하며 그대로 다시 검을 떨구는 공작.
쏴아아아아!
갈라지는 마족.
분명 그리 반을 잘랐지만, 마족은 죽지 않았다.
떨어진 두 본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기화하여 다시 검은 연기로 변했을 뿐.
다만 그 크기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작아졌다.
“어디를!”
공작은 그대로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내뻗었고, 그 손이 닿기도 전에 검은 연기는 뻗어 나갈 수 있는 공간 전부로 퍼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이!
공작의 손으로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가며 또다시 타는 소리가 났지만 전부를 태우지 못했다.
‘여기서 처리해야 하는데!’
공작은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사방으로 도망치는 검은 연기 중 작은 뱀 정도의 크기를 놓치고 말았다.
쌔애애애앵!
그리고 빛과 같은 속도로 나왔던 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런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 보는 몬스터에 그 능력마저도 막강했기에, 일정부분의 힘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리 도망칠 줄 알았다면 모든 힘을 써서라도 소멸시켰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반드시 원래의 힘을 회복할 터.’
분명 사달이 날 것이다.
자신이 아닌 이상 그 누가 저것을 제어할 것인가!
‘내가 좀 더 살았으면 좋겠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후사만 준비해도 빠듯할 것이다.
“쿨럭!”
긴장이 풀렸는지 헛기침이 나왔고, 같이 올라온 응혈을 삼켰다.
모두가 힘든 원정을 해 왔는데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자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그들이 한없이 우러러볼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내가 정한 마지막.’
초월자 베스타인은 그리 마음먹었다.
남들이 봤을 때는 검은 실루엣을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하나, 사실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강력했기에 진력眞力으로 상대해야 했고, 그만큼 빈틈을 줄 수 없기에 압도해야 했다.
인간이 아닌 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격을 받아도 죽지 않았으니까.
강한 상대. 그런 상대가 목숨을 최소 열 개 이상 가지고 있지만, 자신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상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초월자의 의지는 그것을 넘었다. 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로 마음먹으니, 육체는 따라왔다.
분명 좋지 않은 방법이다. 후유증이 클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그 누구보다 강력한 모습을 보여 온 삶.
“베카와로 돌아간다.”
베스타인 공작은 짧게 한마디 하며, 돌아가는 길에도 선두에 섰다.
“주군…….”
베스타인 공작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그래도 눈치챈 이가 있었다.
헤르메스와 섀도가 공작의 뒤로 나란히 섰다. 하지만 감히 공작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따를 뿐.
그렇게 베스타인 공작은 단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베카와로 귀환했다.
* * *
상황을 주도하라.
말은 참 쉽다.
말로 못 하는 게 뭐가 있는가?
실제로 그렇게 만드는 게 어려운 법이지.
중요한 건 그 말을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
린델은 전자다.
다 쓰러질 것 같은 놈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코끝을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생각 중인 것이다.
말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로 그렇게 말이다.
린델은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들어 로라스를 쳐다봤다.
문득 린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종잡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였던.
린델은 로라스를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로라스.”
“응?”
“포스 마스터 맞지?”
“그렇지.”
“매지스터도 맞지?”
“살짝 억지를 부리면?”
로라스가 씩 웃으며 하는 말에 린델은 물끄러미 로라스를 보며 물었다.
“언제?”
“응?”
“언제 그런 경지에 오른 거야?”
“…….”
“넌 옛날부터 설명이 안 됐어.”
“요점만.”
린델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물었다.
“지금 에렌에서 널 포스로든, 마법으로든 제압할 사람이 누가 있지?”
미소를 보여 줬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는가.
* * *
“으음.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이려나.”
멘토라스는 책상 위에 놓인 서찰을 보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카님의 자신감인가? 아니면 발악인가?’
자신이 좀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절로 굴러들어 온 호박을 발로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그날.
그러니까 로라스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
제법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던 로라스였다.
자신을 미끼로 던져 주고, 디존슨의 신뢰를 사라는 그 제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손해 볼 건 조금도 없는 제안이었다. 갖은 금제를 한 상황에서 던져 준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디존슨에게 나름 유의미한 신뢰를 샀다. 최소한 큰 폭풍이 지나칠 때까지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게 다 이걸 위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대가가 크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고작 이걸 위해?’
아니다. 뭔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예상했겠어? 디존슨이 사람들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을 그리 뇌옥에 처박아 둘지 말이야.’
아마 계획이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뇌옥에서 이렇게 자신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력자들이 있었을 터. 그들과 함께 뭔가 하려가다 갇히는 바람에 계획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계획은 너무…….’
말이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악에 가깝다.
‘하긴, 아버님이 올라오고 계시니 디존슨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할 터.’
그러다 깨달았다.
이번에도 자신이 손해 볼 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이득이라는 것을.
‘지금쯤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고 눈이 벌게진 상태.’
멘토라스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뭔가 한 수는 있으니 준비했을 터. 어찌 됐거나 양쪽 세력을 다 갉아먹을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는 곧바로 성을 향했다.
* * *
비는 오지 않는데 유독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젖은 바람만이 그리 부는 공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뭐라 실컷 떠드는 사람들. 깊은 주름을 잡으며 걱정에 물든 사람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들 중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떠는 이들도 있었다.
“에르자일 님, 주군께서 신호를 주실 때까지 참으셔야 합니다.”
“위급한 상황도 아닙니다. 결국 다 처리하실 겁니다.”
번천과 테라가 연신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하는 말에, 에르자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어렸을 적 마탑에서 자신을 돌봐 줬던 마법사들.
‘이 미친 새끼들이!’
마탑을 봉쇄했다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불이 나는데, 직접적으로 마법사들까지 죽이려 하는 상황이다.
로라스를 믿기에, 그리고 큰일을 앞두고 있으니 참고 있을 뿐. 그렇지 않았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모조리 불태웠을 것이다.
에르자일에게 말은 그리했지만 번천과 테라 두 사람도 불안했고, 다 제쳐 두고 로라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었다.
번천이 불안한 눈빛으로 테라를 보며 물었다.
“문제없겠지?”
“연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믿고 가는 수밖에.”
테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약속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온 것 같고.”
“배신자는…… 없겠지?”
“그랬다면 이리 모이지도 못했지. 다른 귀족 놈들은 몰라도, 아이언센터생들은 같이 죽고 같아 살아.”
그 누구보다 로라스를 믿는 두 사람이지만, 모여 있는 적의 규모를 보니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단단히 준비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특히 저 석궁병들.’
중앙 공터가 아닌 외곽 공터로 잡은 이유가 저 성벽 위의 석궁병을 배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었다.
“에르자일 님.”
번천이 슬쩍 성벽 위로 눈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에르자일은 이미 분노를 그쪽으로 쏟고 있는 중이었다.
“무력 충돌은 안 된다 하셨지만…….”
그리고 그 모습에 중얼거리듯 말하는 번천.
분명 로라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냥 지켜보라 명령했다.
일반 병사들이 뭔 죄가 있단 말인가. 그저 명령을 따르는 이들인데. 스스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귀족들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경비가 이리 삼엄하니 절로 살기가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로라스.”
그때 중얼거리듯이 입을 여는 에르자일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움직였다.
처형장으로 끌려 나오고 있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 로라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