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3)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불안하잖아요.”
벌써 열흘째다.
고스트가 철수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정보원들이, 로라스가 삼엄한 감시 속에 에렌 내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가 말이다.
“절대 움직이지 말고 연락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에르자일은 불안해했고, 번천은 그런 그녀의 불안을 달랬다.
“내성에는 방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디존슨이 철저하게 차단했다고 했으니…….”
“그럼 어쩌지요?”
“이미 예측한 일이었습니다. 주군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요.”
“뇌옥은 그 건물 자체가 마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에요. 그것들이 로라스를 그대로 처형이라도 하면…….”
“주군이십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문을 닫고 먹을 것만 주지 않아도 사람은 못 움직일 터. 그건 로라스가 아니라, 베스타인 공작님이라도 마찬가지예요.”
그 말에 번천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배고픔.
사람은 먹어야 산다.
실제로 닷새만 곡기가 끊어지면 혼자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된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뭐라도 주겠지만, 그야말로 숨만 쉴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을 준다면.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에르자일을 말릴 수 없을 뻔했지만…….
“주군은 충분히 감당하실 겁니다. 그것도 예상하셨을 테니까요.”
맹목적인 믿음은 끝까지 로라스의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냥 몰래 침입해서 개구리로 만들면 간단할 텐데.”
“별의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을 겁니다. 에르자일 님의 심정은 알지만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번천의 확고한 말에 에르자일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불안하지만, 로라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그녀도 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성내에 대기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탑의 식구들이라도 찾아 놓는 게…….’
에르자일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페컴은 대답이 없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할아버지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디존슨이 이 정도의 패악질까지 저지를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겠지만, 그 전의 마음을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우십니까?”
“신하 된 입장으로서, 그분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 온 입장으로서 쉬운 대답은 아니다.”
역시 조금 힘든 길로 가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때 페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트아이 님께서 내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다.”
“…….”
“그때는 몰랐지. 그냥 우려 섞인, 죽는 순간에 걱정되는 근심거리를 내게 털어놓는 거라 생각했지만.”
페컴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깜빡했구나. 트아이 님은 진실을 보는 자라는 것. 그리고 대륙 최고의 예언자라는 것을.”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십니까?”
페컴은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너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요?”
“네가 주군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하셨다.”
“…….”
“이해하겠느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요.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왜 그분은 제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페컴 님에게 남기셨을까요? 진작 말씀하셨다면 이리 어렵게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피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자신의 예언이지만 어떻게라도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셨겠지.”
“핏줄이란 이리 무서운 법인데. 디존슨은 그 믿음을 저버렸군요.”
등골이 찌릿해져 왔다.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닌, 명쾌한 해답을 찾아서 오는 쾌감에 더 가까운 감각.
난 왜 이리 복잡하게 생각했을까?
트아이가 남긴 유언처럼 현명한 답을 두고 말이다.
고통스러운 선택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 답의 의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 드리면 그만인 것을!’
새삼 유역후는 복 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애에서 제자 녀석들이 서로 성주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품었다면 난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고, 그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모두가 뛰어난 인재들 아닌가.
‘그때 한 녀석이 확고하게 지배를 해 줬다면 선택은 더 쉬웠을 것이고.’
목표가 섰다.
‘난 더 나아가서 할아버지에게도 선택권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효(孝) 아니겠는가?’
그 목표는 에렌을 지배하는 것.
물론 그리되면 할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와카디아만 해도 정신없는데, 에렌까지?
‘꿈꿨던 생활은 물 건너가겠지만.’
혈육. 할아버지 아닌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천왕성도 내가 운영했었던가. 제자 녀석들이 다 운영했지.’
이번에도 사람을 키우면 된다.
이미 그간 뿌려 뒀던 씨앗이 열매가 되어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고.’
페컴에게 말했다.
“너무 잘 알아들었습니다. 정말 이곳부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내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온 것이냐? 함정에 빠진 것이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곳부터 오길 잘했다고요. 제 의지가 이곳으로 향했는데, 놈들이 알아서 데리고 오더군요.”
대답하고 바로 물었다.
“이곳에 갇힌 이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할 차례였다.
* * *
쿠니발 남작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어떻게?’
평상시와 같은 날이었다.
자신은 에렌의 핵심 귀족이 아니었다.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가문을 이어받았기에, 귀족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저 그런 귀족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 일찍부터 디존슨 백작 라인에 줄을 대었다. 그 후 거의 잡부처럼 같은 라인 귀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리했어도 두각을 드러내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뇌옥의 관리라는 직책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디존슨 라인의 핵심 귀족들의 개처럼 굴어 얻어 낸 아무것도 아닌 직책.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뇌옥은 베스타인가의 사적 감옥 같은 곳.
죄수 없는 뇌옥이기에 하는 것도 없이 돈을 버는, 나름 꿀 같은 직책이기도 했으니까.
변화가 일어난 건 근래였다.
뇌옥에 죄수들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귀찮아졌냐고?
아니다. 더 좋았다. ‘매일이 오늘 같아라!’ 하는 심정이었다.
뇌옥에 갇힌 이들은 모두 한가락 하는 귀족 아니면 에렌에서 영향력 높은 인물들이다.
그들이 뇌옥에 갇힌 이후 청탁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좋은 빵 한 조각, 따뜻한 음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뒤로 들어오는 돈이 많았다.
물론 자신도 생각이라는 게 있기에 직접적으로 만나게 해 달라는 그런 부탁은 거절했고, 특히 지하 4층 아래부터의 수감자들에게는 음식 전달도 거절했다.
전부 카르이샤 쪽의 핵심 귀족들이거나, 아니면 베스타인 공작의 추종자들.
그들은 위에서도 신경 쓰는 귀족들이었기에 절대 눈 밖에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날벼락을 맞았다.
“일이 잘못되면 자네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거야.”
같이 몰락한 가문이라 친하게 지내는 브리오스 남작.
“자네가 맡은 곳이 요새 가장 관심을 받는 지역 아닌가.”
“그는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이건 분명 협박이었다.”
“난 조심했네.”
“그걸 위에서 받아들이겠는가? 신경이라도 쓰겠느냔 말이야!”
문제는 그 협박의 내용이 너무나도 먹힐 거라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왜 갑자기…….”
“자네만 엮인 게 아니야. 나도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과 관리들도 같이 엮였어.”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들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브리오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어려운 게 아니야. 사람들만 만나게 해 주면 그 증거를 없애기로 했네.”
“그걸 어찌 믿고.”
“나도 바보가 아니야. 마탑의 언약서를 들이밀더군. 약속을 지키겠다는.”
“정말 괜찮을까?”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면 하는 게 낫겠지. 최소한 변수를 우리가 알게 되니까.”
브리오스는 단둘밖에 없는 방임에도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뭔가 있어.”
“뭐가?”
“이건 내 추측인데, 상대 쪽에도 구심점이 생긴 게지.”
“공작님이 돌아오시기라도 한다는 소문인 건가?”
“그게 아니라…….”
브리오스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걸 보며, 쿠니발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속 시원히 말해 보게.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탄 거 아니었어? 같이 끌어 주고, 밀어 주자고 한 건 자네였어.”
“와카디아!”
“응?”
“와카디아 락 몰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네 번째 후계자 말이야!”
“로라스 백작?”
“그래. 그 로라스 백작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다고. 멘토라스 백작이 숨죽이는 가운데, 현재 감금된 자들의 세력들이 누구를 찾겠나?”
“로라스 백작…….”
“그래. 그밖에 없잖아. 우리가 저지른 비리 증거들을 가지고 말이지.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한둘이 아니야. 아마 윗선에서도 똥줄 타는 귀족이 있을걸.”
들으면 들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던 쿠니발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처럼 쥐뿔도 없는 사람들은 줄을 잘 서야 한단 말이지.”
“대공자를 배신하자고.”
“무슨 큰일 날 소리.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위에 맡기자는 거지. 그냥 모른 척하고 어디에든 눈 밖에 나지 말자고.”
“…….”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믿을 만한 놈이 있을 때 뇌옥에 사람만 들여보내면 돼.”
“문제없겠지?”
쿠니발이 조심스레 묻는 말에, 브리오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제가 있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완전히 코가 꿰였으니까. 이 비리 증거들이 윗선에 들어가면 뭘 하기도 전에 우린 죽는다.”
“젠장!”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그리고 또 아나? 판세가 뒤집혀서 우리 같은 놈들에게도 기회가 올지 말이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잘되면 잊지 않겠다는 말도 하더군.”
“정말 젠장이군.”
쿠니발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뇌옥의 책임자를 채찍과 당근으로 회유한 후, 계획은 빠르게 진행됐다.
대놓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나, 안에 갇혀 있는 귀족들이 바깥에 자신의 세력과 소통이 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대책이라는 것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세력을 집결시켜야 하지 않겠나?”
로란시아 백작.
뇌옥에 갇힌 인물 중 가장 영향력이 높은 노백작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무슨 계획을 세우더라도 칼 앞에서는 무용지물. 최소한의 무력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네.”
“맞는 말씀이시지만 그런 무력은 그리 집결시키다가 디존슨이 알아챌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계획은 무의미해진다네. 와카디아의 병력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지 않았는가. 에듀 백작은 군을 더 접근시켜야 해.”
로라스는 로란시아를, 그리고 모인 사람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계획한 것 중에 내전은 없습니다. 에렌과 와카디아의 군이 충돌하는 순간 정말 많은 피가 흐를 테니까요.”
“그럼 어쩔 생각인 건가?”
“최소한의 무력은 이미 잠입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든 탈출이 가능하게. 사실 우리는 꼭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길 필요가 없다는 말에 모두가 의문을 표하고, 로라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해답을 주었다.
“할아버님. 에렌의 진정한 지배자가 돌아오면, 디존슨의 모든 역모는 봄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런 게 되지 않겠습니까?”
“……!”
모두가 생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상황을 겪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당연한 걸 생각지 못했었던 듯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로라스가 말했다.
“그 전까지 살아남는다.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요. 그게 일단 기본적인 전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