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2)
철그렁철그렁.
움직일 때마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들렸다.
아기 팔뚝만 한 굵은 쇠사슬이 양 발목에 묶여 있고, 양손에는 은빛 번쩍이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얼마나 중범죄자일까?
끌려가는 사람의 얼굴에는 두터운 검은 천 보자기까지 쓰여 있었고, 호송하는 사람들도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들이었다.
스르릉. 스르릉.
어느새 철은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실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사들과 죄수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철컹.
듣는 것만으로도 이게 어떤 문인지 알 듯한 그런 소리와 함께 죄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쓰여 있던 천 보자기가 들리며, 빛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빛은 강하지 않았다.
좁디좁은 복도 벽에, 횃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런 빛으로 눈을 보호하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빛을 차단당했다는 증거.
“얌전히 있어라.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주는 배급도 없을 테니.”
간수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고, 철문이 닫혔다.
‘이런 느낌이었군.’
모두가 사라지자 죄수는 두 팔을 들고 크게 몸을 폈다.
‘다 좋은데 한 자세는 불편해.’
죄수는 그렇게 기지개를 켠 후, 마치 여행지의 여관에라도 온 듯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여섯 면의 공간 중 한 면만이 쇠창살이고 모두가 화강암 재질의 돌덩이들.
‘돈 많이 쓰셨네.’
돌과 진흙 등을 개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시각적으로 또 촉감적으로도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공간. 실제로 사방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별다른 고문을 하지 않아도 여기서 며칠 있다가는 골병들기 딱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리고 어느 순간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탑 중에서도 변절자가 있나 보군.’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은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마나를 쓰지 못하게 만든 마법 물건이다.
자신이 헤르메스의 제자이긴 하지만 보통 포스 유저로 알려졌지, 마법 실력이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수갑은 굉장히 고급 마법이 걸린 물건.
그건 누군가 자신의 정보를 디존슨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하긴 그 정도 준비는 해야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지.’
우드득. 우드득.
죄수가 몸을 기묘하게 뒤틀자 뼛소리가 울렸다.
“으으으!”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천하제일고수라도 아픈 건 아픈 거다.
‘남에게도 쓰지 않는 분근착골의 수를 내게 쓸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덕분에 수갑을 벗겨 내는 데 성공한 죄수는 계속 몸을 풀며 생각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가!’
사실 제대로 믿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멘토라스는 1인자인 디존슨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과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 아니었던가?
‘교묘한 새끼!’
일이 이리되었어도, 멘토라스 입장에서는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후 ‘몰랐다! 예상 밖이었다.’라고 발뺌을 할 수 있는 일이다.
‘혈육 따위의 정은 조금도 없다 이거겠지.’
예상은 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확인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도 자신은 같은 성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말이다.
‘노선이 확실해서 좋긴 한데.’
죄수는 오히려 잘되었다 생각했다. 거치적거리는 혈육, 정, 이런 걸 조금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연락이 빨리 닿아야 하는데.’
이제는 할아버지 딱 한 사람만 생각하면 되었다. 이 상황에서도 큰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는데, 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더 고민이 되시려나.’
죄수는 자신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약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하다는 증거.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어렵게 가더라도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
자신이 누구인가!
‘유역후 시절에는 황궁에 혼자 가서 황제도 협박했었다. 황궁에 비하면야.’
여기서 포스 유저라 말하는 이들이 지천에 널리고 마스터라고 불리는 고수들도 수십이 넘게 있는 곳이 저 세계의 황궁이었다.
죄수는 바로 로라스였다.
사실 멘토라스는 디존슨을 만나기 전에 로라스를 먼저 만났다.
그리고 협상했다.
디존슨을 잡기 전까지 협력하자는 뻔한 내용의 협상.
문제는 손에 묶인 마법 수갑은 시나리오에 없었고, 디존슨이 자신을 대놓고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 했었지만, 그런 조치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 음흉한 놈이란 거다.
일이 잘못돼서 자신이 죽어도 디존슨의 신임을 살 수 있으니까. 또 계획대로 가면 자신과 계속 손을 잡을 테니, 멘토라스 입장에서는 손해 볼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멘토라스는 모르는 게 있었다.
그건 자신이 놈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강자라는 것과 이미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이다.
‘여차하면 내 한 몸 빼내는 데는 문제없으니.’
에르자일이나 번천, 테라 등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강자.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여차할 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여하간 알아서 이리 데려왔으니 찾는 수고는 덜었네.’
무슨 말이냐고?
난 와야 할 장소에 무사히 왔다는 것이다.
디존슨만 죽이고 빠져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할아버지의 사람들을 만나야 할 테니까.’
고스트의 정보에 의하면, 디존슨이 경계해야 할 정도의 사람들을 모조리 옥에 가뒀다 했다. 그러니 그들을 만나야 했다.
에렌을 정상으로 돌리려면 그래야 했다.
* * *
대륙 유일의 초월자.
초월자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포스 유저는 흔해졌다지만 포스 마스터는 여전히 귀한 시대다.
그런 포스 마스터와 초월자의 간격은 포스 유저와 포스 마스터의 간격을 아득히 뛰어넘고도 남았다.
오죽하면 반제국 연합이 황제의 군대보다 베스타인 공작 한 명을 더 두려워했을까?
아니, 애초에 제국이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베스타인과 전대 황제 두 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공작이 단순하게 검을 뽑았을 때.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공간에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베스타인 공작은 자신의 모든 포스를 불러일으킨 후 일어난 현상.
‘영악한 놈!’
그래서 더 잡아야 했다.
몬스터라 하기에는 지나친 강력함. 거기에 차륜전으로 자신의 힘을 소모하려는 영악함까지 갖춘 놈.
‘나 아니면 누가 있어 이놈을 잡을 수 있을까?’
이번에 놓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이 아니면 포스 마스터, 매지스터가 열댓 명은 모여야 잡을 수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런 전력이 모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게 놈이 숫자를 믿고 완전히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
확실히 보여 줄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 이 몬스터를 제거하는지, 그래서 얼마의 진력을 소모하는지. 그래야 놈이 다시 덤빌 테니까.
파아아아아아아아앙!
검음이 길게 울리며 토끼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몬스터들 중앙으로 공작이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우웅!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죽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삭제.
파아아아아아아아앙!
대기를 압축시켰다 급격하게 팽창시키는 파공음이 다시 한 번 울리고.
공작의 주변에 모든 몬스터들이 그렇게 삭제당하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랏!”
그 모습에 레빙스턴이 소리쳤고.
“모든 것이 되돌아가나니.”
헤르메스는 정신없이 주변의 마나를 제거하기가 바빴다.
측근 중의 측근인 두 사람은 공작이 왜 초월자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
주군이 초월자로 현신하였으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뒷수습을 하는 것이 최선.
그사이 공작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리 빠르지도 않았다. 그냥 일반인이 발을 옮기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괴이한 게 있다면 마치 제 자리로 순간 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형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보였을까?
한쪽 공간을 빽빽이 채웠던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남은 몬스터들이라고는 천장 위로 자신의 몸을 숨겼던 작은 놈들뿐.
“오너라!”
베스타인이 나직이, 하지만 천둥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내었던 것도 그때였다.
공작의 검이 가장 거대한 입구를 가리켰고.
스스스스스스스스슷.
잠시 후 음성인지, 움직이면서 나올 때 나오는 소리인지 구분되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천천히 몰려나와 동굴 입구를 빙빙 돌았다.
“겁먹지 마라. 기다려 줄 것이니.”
기다려 주는 이유는 하나.
제 실력을 다 발휘하게 해 줘야 싸울 마음을 먹을 것 아닌가?
‘그리고 전력을 쓰게 해야 도망도 못 치지.’
베스타인은 느긋이 검은 실루엣이 형체화될 때까지 기다렸다.
* * *
깊은 지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공간에, 나가는 입구도 단 하나여서 그런지 뇌옥을 감시하는 간수는 없었다. 덕분에 옥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었다.
우드드득.
뼈와 근육을 재조합하는 유가공을 위해 복도로 나왔다.
‘잡기라서 이론만 알고 있었던 건데. 제대로 공부했다면 좀 덜 아팠을라나.’
시전할 때마다 은근히 아프니 별생각을 다 하는 것 같다.
‘근데 지랄맞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등 하나만 갖다 놨어도 좋았을 것을, 암흑이니 시야 확보가 잘되지 않았다.
빛 한 점 없는 곳에서는 천하고수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다. 희끗하게나마 앞이 보이는 건 명안륜이라는 무공 때문이다.
명안륜은 정확히는 보는 게 아니라 기운의 형태를 느끼는 무공.
‘만든 사람도 이런 환경이었나? 사실 이리 만드는 것도 아니니.’
정체성을 깨달은 후 제일 곤란했던 건 다름 아닌 폭우처럼 쏟아지는 옛 기억들.
제자 녀석들이 잘나서, 말년에 정말 심심했던 듯하다. 별 잡기를 다 익힌 걸, 아니 읽은 걸 보면 말이다.
여하간 그렇게 뇌옥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려온 높이를 생각하면 지하 팔 층 정도 되는 건가?’
공간이 넓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방의 숫자도 달랑 여섯 개.
자신이 방해가 될 확률이 높을수록 더 깊은 곳에 감금해 놨을 터.
‘만날 사람은 다 여기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너무 인기척이 없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나 홀로 이곳에 갇혔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로라스입니다.”
하지만 인기척을 만들어 내는 건 그 한마디면 됐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힘이 많이 빠진 미약한,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집사님까지 여기에 계신 겁니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바로 페컴이었다.
“어떻게…… 대공자가 너마저……. 아니, 그 전에 넌 락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
우드드드득.
로라스가 갇힌 뇌옥으로 들어갔고, 그의 손을 잡았다.
“으헛!”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페컴을 안심시켰다.
“접니다. 괜찮습니다.”
“어떻게? 여긴 마법도 통하지 않는데.”
“제가 이런저런 잡기를 많이 익혔지요. 오가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
얼굴에서 떨리는 손이 느껴졌다. 그리고 왜 페컴이 그러는지도 짐작이 갔다.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을 들어 기운을 모았고, 이내 그 끝에서 불티가 튀어 올랐다.
단순하게 얼굴을 확인시키려고 내력을 소비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그래도 페컴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의심을 가지면 다음 일이 곤란해지니까.
“여긴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페컴을 보며, 최대한 좋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포스로 가능한 기술이 있습니다. 무척 힘들지만요. 여하간 이리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말 그대로 무사일 뿐, 페컴의 몰골은 형편없긴 했다.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는 트아이가 죽은 후, 할아버지의 사적인 일을 돌봐 주는 유일한 심복.
‘그런 이를 이렇게 만들다니.’
디존슨이 단단히 준비했음이 새삼 느껴졌다.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할 기력도 없을 테니, 일단 해야 할 대화부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