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0)
“그년도 같이 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동행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카벨로의 물음에 츠어질은 상 위에 놓여 있는 와인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남아 있는 신도에게 소식을 들었는데,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더군요.”
“분명 함께 올 거라 생각했는데.”
카벨로가 아쉬운 표정으로 하는 말에, 츠어질은 잔을 잡으며 말했다.
“애초에 타깃을 잘못 잡은 건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이십니까?”
“생각해 보면 말입니다. 켄트라미우스좌도 그리고 저도 목적은 그 애송이 소영주 아니었습니까?”
“…….”
“그러다 그년하고 얽혔고요.”
카벨로가 생각해 보니 츠어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로라스를 상대하다가 아델리나와 얽혔다.
“둘이 생각 이상으로 가까운 것일까요?”
“저는 그리 확신합니다. 그러니 로라스 그놈만 잡으면.”
“수월하게 그년을 요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뭔가를 결심한 듯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피랜드의 츠어질. 백작님을 뵙습니다.”
“켄트라미우스의 카벨로.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중년인에게 예를 표했다.
“유명하신 두 분을 이리 뵙게 되어 이 사람이 영광입니다.”
중년인, 그는 디존슨이었다.
* * *
“그런 이유 때문에 모조리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고스트의 두 수장, 요르크와 발란스가 무릎을 꿇고 하는 말에, 로라스는 그 두 사람을 일으켰다.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것이다. 이리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로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선택한 거지. 무너지고 있는데 버티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 그리고 이리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 한 손 보태면 될 터. 그게 최상이다.”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요르크가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가?”
“저희들이 빠져나오기까지 세력을 정리한 보고서들입니다.”
“그래?”
로라스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상상 이상인데? 개개인에 대한 것도 잘 정리되었고.”
“시간만 더 있었으면 더 완벽하게 보고할 수 있었는데. 그게 아쉽습니다.”
“이 정도의 흐름만 알아도 충분해. 히든아이가 도왔나?”
“네. 일이 년만 더 있었더라도 자체적으로 정보 조직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안일하게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십 년을 잡고 진행하라고 했던 건 내가 했던 말이다. 시간을 잘못 잡은 건 너희들이 아니라 내 실수지.”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다시 서류를 보며 말했다.
“이걸로도 충분해. 디존슨의 세력이 완벽하게 장악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많지 않군.”
“베스타인 공작께서 살아 계시니까요. 사실 의아할 정도입니다. 디존슨 백작이 이 정도로 대담한 짓을 벌일 줄은 말입니다.”
“나도 그걸 예상치 못했지.”
로라스도 의아했었다.
에렌을 비웠다지만 할아버지가 건재하신데 이렇게 무력까지 동원하여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발란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일이 더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공작님이 살아 계시니 오히려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으니까요.”
“할아버지의 장자이시니…… 그럴 만도 했지.”
디존슨이 아무리 강력한 후계 후보이고 지지하는 세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의 직계 세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소위 후계자 싸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세력들.
아이언센터나 영광 찬란한 마탑. 그리고 몇 개의 기사단들. 하지만 그들은 디존슨의 독단을 견제하지 못했다.
디존슨이 적당히 움직였다면 모를까?
대놓고 이를 드러낸 그를 견제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다. 공작이 죽었다면 모를까, 살아 있는 이상 그의 장자를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건 할아버지도 예측하지 못하셨을 터.’
디존슨이 감히 아이언센터와 마탑까지 폐쇄시킬 줄 누가 예측했을까?
이 반란 아닌 반란에 대응할 세력은 몇 되지 않는다. 전쟁 후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세력.
그건 같은 후계 후보자들.
“멘토라스 숙부는 나서지 않았던가.”
로라스가 또 다른 강력한 후보 중 하나인 멘토라스를 거론하자, 요르크가 대답했다.
“전혀요. 그는 삼공자가 살아 있을 때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야망이 큰 걸로 아는데. 전혀?”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일단 밖으로 나오질 않습니다.”
요르크의 말에 발란스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디존슨과 여러 번 접촉은 있었습니다.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혹시 그 둘이 이미 손을 잡지 않았을까요?”
“둘이?”
로라스는 반문하면서 생각했다.
‘그럴 성격들이 아닐 텐데. 만약 둘이 손을 잡았다면…….’
생각해 보니 그럴 확률도 컸다.
카르이샤 스스로의 인품도 그렇고, 자신이 밀어준 뒤로 그의 세력은 꾸준히 확장 중이었다. 이인자인 멘토라스를 위협할 정도로 말이다.
‘속 시커먼 놈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고, 또 이번 일도 합작이라 생각하면 능히 이런 일도 벌일 수 있을 터.’
로라스는 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인사들은 전부 감금된 건가?”
요르크가 대답했다.
“대부분 그런 거로 확인됩니다. 암살당한 자도 있을 터지만, 직접적으로 죽이는 건 자제하는 것 같았습니다.”
“카르이샤 백작을 제거하는 게 최대 목적이었을 거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다음 목적은…….”
발란스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로라스는 그 뒷말이 뭔지 알았다.
‘그다음은 나겠지. 후보만 제거하겠다는 목적이라면.’
에렌 성이 코앞이었다.
‘할아버지의 심중을 알면 간단한 문제인데.’
로라스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직접 한번 만나 보시지요.”
후드의 말에 디존슨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야 별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되겠지만. 지금은 부딪치며 상당히 거슬리는 세력입니다.”
“으음.”
디존슨은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멘토라스.
다른 놈들과는 달리, 같은 어미를 가진 친형제. 그럼에도 절대 믿을 수 없었던 놈.
그런 놈이 먼저 접촉을 해 왔다.
정확히는 여러 번 운을 떼긴 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놈이기에 같이 뭔가를 도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상 마냥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잘만 되면 아버지의 분노를 나눠 질 수도 있을 것이고.’
디존슨이 그리 생각할 때 후드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서 원하면 시간이 필요할 뿐, 제거가 가능합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니.”
디존슨이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와카디아 쪽에서 병력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심복 중 하나가 들어오면서 급하게 외쳤다.
“얼마나?”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수백가량이라 판단됩니다.”
“겨우 그걸로 뭘 하려고?”
디존슨이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심복이 대답했다.
“접근하는 인원은 그 정도이지만, 와카디아 외곽으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합니다. 거의 팔천가량의 대군입니다.”
“에듀 그 건방진 놈이 미쳤군.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고작 그 숫자로?”
“쉽게 볼 숫자는 아닙니다. 와카디아의 병력은 많은 실전으로 정예라 소문이 나 있습니다.”
“우리 군단은 대륙 최강이지.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나저나 접근한 수백은 뭐야?”
디존슨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며 손짓으로 심복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후드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상황을 백 프로 아는 게 아닐 테니, 일단 대공자님의 심중을 알아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드의 반문에 디존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의외로 눈치 없는 놈이지. 에듀 그놈이.”
“직접 왔겠습니까? 대리인을 내세웠겠지요.”
“아! 건방진 조카 놈이 왔을지도 모르겠군. 여하간 어찌하는 게 좋겠나?”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에듀 백작이 오든, 로라스 백작이 오든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지지 않았습니까?”
디존슨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그렇지.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할 거리가 못 되지. 그럼 어찌할까나. 아량을 베풀어 대세를 인정하게 만들어 줄까? 아니면…….”
디존슨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낚시꾼 같았다.
* * *
어찌 매듭을 풀 것인가?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떠한 선택이든 거기에 따른 장단점이 있다.
‘내가 너무 자신만만한 건가?’
에렌의 온전한 전력이 아닌 디존슨의 전력이라 하더라도, 락의 전력을 훨씬 능가한다.
‘하지만 이런 걸로 위기감을 느끼는 게 더 웃긴 게지.’
전쟁도 자신 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많은 피를 흘린다.
각지에서 게이트 출현 그리고 마물로 인해 사방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리는데 인간끼리의 싸움이라니. 거기에 제국은 전쟁 중.
디존슨과 전쟁은 곧 제국의 내전.
그 틈을 노려 타국들이 더 공세를 펼칠 것은 뻔할 터다.
‘그건 할아버지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고.’
그분의 노년은 이래서는 안 됐다.
로라스로서 훌륭한 할아버지고, 유역후라는 무인으로서도 그는 존경받아야 하는 무인.
이런 생각이 더 깊이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하아!”
절로 깊은 숨이 토해져 나왔다.
나쁘지 않다.
뭔가에 이리 고민할 수 있다는 것도 더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
“주군.”
고민하는 사이 번천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게…… 사람이 하나 찾아왔는데 말입니다.”
“사람? 누구?”
“무조건 주군을 뵙게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야 용건을 말할 수 있다고.”
“어디 있나?”
“혹시 몰라 감금시켰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그게…… 밤에 접근했다고 합니다. 저도 방금 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데려와.”
“네.”
번천이 나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이곳에 내게 이 정도로 은밀히 접근해야 할 사람이 있던가?’
없다.
우호적인 세력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에렌을 탈출했거나, 감금 상태라고 이미 고스트로부터 보고받았으니까.
잠시 후 번천이 한 사내를 데려왔다.
나이는 서른이 갓 넘었을까? 무인이라기보다는 서생에 가까운 인상을 주는 말쑥한 사내.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와카디아 대영주이며, 락의 지배자인 에듀 백작님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북부의 영도자이며 에렌의…….”
“그만.”
심하면 3대 위의 족보까지 외는 거추장스러운 인사법을 생략시키며 물었다.
“날 만나고 싶어 했다고?”
“네, 로라스 백작님. 그런데…….”
사내가 은밀한 눈빛으로 번천을 쳐다봤다.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될 이야기면, 네가 아닌 네 주인이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상황이 여의치 못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지. 말하지 못하겠다 하면 돌아가라. 밤에 접근해 온 건 이해해 주지.”
사내는 잠시 궁리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미천한 제가 감히, 현명하시고 제국의 새로운 돌풍이시자…….”
“그만! 용건!”
사내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떤 자인지 대충은 파악될 것 같다. 아니, 그것마저 노리고 이런 자를 보낸 것인가?
여하간 사내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일단 이것을 읽어 봐 주십시오.”
사내는 자신의 허리띠를 풀며 내밀었다. 받아 보니 허리띠를 종이 삼아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것 봐라?’
마치 이제야 왜 자신이 그리 유난을 떨었는지 알겠냐는 듯이 날 보는 사내에게 말했다.
“재미있군. 언제?”
“언제든 환영하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두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전해라. 찾아뵙는다고.”
“제가 직접 모실 영광을…….”
“길 안내는 별 필요가 없다.”
“에렌이 닫혔으니 곤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하간 잘 알았으니 조심히 돌아가도록. 번천.”
“네! 주군.”
“잘 안내해 주도록.”
“네.”
막사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무슨 의미로 손을 내민 거지.’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다.
허리띠를 보낸 건 바로 둘째 큰아버지인 멘토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