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27)
엔케이와 번천의 부대 오백 그리고 에르자일과 함께 움직이겠다는 말에, 에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숫자로 되겠느냐?”
“지금도 아슬아슬합니다. 큰아버지께 명분을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에듀가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로라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큰 문제야 있겠습니까?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분이 에렌을 비웠지 않느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구나.”
“결국 한때입니다. 할아버님이 돌아오시면 제자리를 찾을 일.”
에듀는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버님.”
그리고 로라스가 다시 그를 부를 때 입이 열렸다.
“위험이 있음에도 운에 맡길 생각 없다. 넌 에렌의 후계 후보이기 전에, 우리 와카디아의 후계자.”
에듀는 고개를 돌려 시그탑을 보며 말했다.
“시그탑 경, 그대도 동행하게.”
“아버님,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기사단까지 움직이면 큰아버님은 반드시 꼬투리를 잡을 것입니다.”
“꼬투리 잡으면 들어가기 전에 돌아오면 될 일.”
에듀는 두 눈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옛날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너의 목숨이 걸린 일에 말이다.”
평상시답지 않게 여지를 주지 않는 대답에 로라스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에듀는 다시 브렌드를 불렀다.
“브렌드 경.”
“명령을 기다립니다.”
“치안을 위한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은 남부로 이동시킨다.”
“토니 경의 부대도 포함합니까?”
“동북부는 여전히 약탈의 위험이 있으니. 그래도 가능한의 병력을 이동시킨다.”
“네, 알겠습니다.”
에듀는 다시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너도 네 스스로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지만, 무조건 네 몸을 신경 써야 한다.”
에듀의 걱정과는 달리 로라스는 편안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약속드립니다.”
그렇게 로라스는 출정, 아니, 에렌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젠장!”
어깨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요르크는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괜찮아?”
“뉘미. 괜찮겠냐?”
발란스가 걱정스러운 물음에 요르크는 다시 욕설로 답했다. 하지만 어느새 일그러진 표정을 펴며 물었다.
“애들은?”
“다 대피시켰다.”
“돈 좀 들었지?”
“돈으로 해결이 가능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담담한 발란스의 대답에 요르크는 피식하며 말했다.
“너도 간덩이가 참 커진 것 같다. 시장에 가서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니고.”
“최악은 아니니까.”
“…….”
“희망이 있잖아. 이것보다 더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었잖아, 우리.”
함께 전장을 떠돌며 서로의 목숨을 구하고, 구함을 받던 두 사람. 이보다 더한 상황이 최소 두 번은 있었다.
발란스가 자신의 어깨의 붕대를 조여 매는 것을 보며 요르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줄 잘 선 거 맞지?”
“몰라. 그런 계산은 네가 더 잘했잖아.”
“이번 줄은 네가 먼저 잡았잖냐.”
“…….”
“줄 잘 선 거 맞지?”
같은 질문에 발란스는 붕대 끝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그분은 여기에 없다. 하지만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되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젠장. 이런 것도 예상했으면 얼마나 좋아.”
“우리도 상상조차 못 했잖아. 카르이샤 백작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병신 같은 놈. 차라리 병사라도 했으면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히 대처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긴 한데…….”
요르크는 수긍하면서도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
에렌의 흑사회를 주름 잡던 고스트였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공권력의 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작 조직을 쪼개서 대피시키는 것이 최선.
“그래. 생각하지 말고 일단 생존에만 신경 쓰자. 그 양반만 나타나면 마법처럼 수습될 것 같은 환상을 꿈꾸면서 말이지.”
“아무나 그런 환상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준비할 수 있는 거나 준비해 보자.”
“뭐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대공자의 개들이 저리 들 쑤시고 다니는데.”
“장부.”
“장부? 그걸 지금 써먹을 수나 있어?”
“우리는 못 써먹지.”
발란스의 대답에 요르크는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 뭔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써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조사는 할 수 있지. 그게 도움이 될 거야.”
“그것도 일단 에렌에 들어와야……. 들여보내겠어?”
“들여보낼걸. 그분은 디존슨에게도 눈엣가시. 공작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빼내려 할 테니까.”
“젠장. 다시 저 삼엄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할 차례야. 성공하면 우리도 양지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야.”
요르크는 씩 웃으며 답했다.
“너나 가. 양지에서 뱀 꼬리 될 바에는, 음지에서 용 머리 할란다.”
* * *
에렌 성.
전체적으로 원래 조용한 곳이긴 하나, 지금은 적막에 가깝다 할 정도였다.
수많은 병사들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러다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 퍼질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 디존슨은 그의 심복들과 다음 계획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멘토라스는?”
디존슨의 물음에 심복 하나가 답했다.
“멘토라스 백작님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직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병영에서 조금도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놈의 병력이 얼마나 되지?”
“오천입니다.”
“아버님은 왜 그놈에게 병권을.”
디존슨은 짜증을 내는 표정으로 심복에게 말했다.
“감시 철저히 해. 그놈만큼 음흉한 새끼는 내 본 적이 없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멘토라스 백작님은 뭘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그때 다른 심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군, 공작님께서 베카와 영지로 귀환하셨다고 합니다.”
디존슨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그럴 리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던전을 벌써 소탕했다고?”
“원정대의 재편성을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디존슨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하는 말에, 심복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귀환을 하신다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아버님을 십수 년을 모셨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그런 걸 절대 놔두실 리 없는 분이야. 옛날부터 자식들보다 없는 것들을 더 신경 쓰시는 분이셨으니.”
“만에 하나 예상보다 더 빨리 소탕이 된다면…….”
“걱정하지 마. 그랬다면 시작도 안 했어. 그리고 지금 속도로 봐서는 훨씬 일이 빨리 끝날 테니까.”
디존슨은 모인 사람들과 하나씩 시선을 마주친 후 말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야. 게임에 참가한 사람은 빠질 수 없는. 마음들 단단히 먹어. 어중간하면 죽는 건 너희들이 될 테니까.”
사람들이 각기 다른 표정, 하지만 공통되게 뭔가 결정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디존슨의 배후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두터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얼핏 보이는 윤곽은 매우 젊은 사내라 추측할 수 있었다.
디존슨이 고개를 돌려 후드를 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무엇이 겁이 나십니까?”
“괜히 불안해져서 말이야.”
“불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 상황, 시기. 모두가 대공자께 유리합니다.”
“아버님이…….”
“그건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정대까지 재편성을 시작했다는 보고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디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하지만…….”
“돌아오셔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를 모조리 제거하면 그뿐. 설마 공작님께서 대공자를 죽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그러다 디존슨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후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안하시면 속도를 올리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게다가 조력자가 또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자들. 정말 믿을 만한 자들인가?”
“믿을 만한 놈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용 가치는 훌륭한 놈들입니다. 손쓰기 불편한 자들은 그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으음.”
디존슨은 나직이 신음을 내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다. 이유가 없어.’
모두 뜻한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큰일을 앞두고 계집처럼 쪼그라들다니.’
디존슨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대업이 눈앞이군. 다 자네 덕분이야.”
후드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대공자님, 아니, 곧 에렌의 영주가 되실 분을 보좌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소인일 뿐.”
“하하하. 이래서 자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최소한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자들은 이용 가치가 훌륭하니 잘 써먹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지.”
후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디존슨에게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렇지. 권력을 위해서는 패륜까지 저지르는 것들이 널렸지.’
디존슨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표정의 변화를 다 지켜봤다.
‘차라리.’라고 말했던 그 순간의 표정.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차라리 던전에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게 디존슨의 본심 아니겠는가?
‘좋아. 아주 좋아.’
능력이 안 되는데 욕심만 많은 놈들은 이용하기가 좋았다.
‘에렌을 더 견고하게, 최강의 세력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가 꿀꺽 먹으면 되는 거지.’
후드는 미소를 짓다가 이내 새로운 조력자들이라고 나타난 자들을 생각했다.
‘둘이 결국 손을 잡았군.’
후드는 그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해피랜드의 교주 츠어질. 그리고 켄트라미우스의 수장 카벨로.
‘아주 훌륭한 거름들 아닌가!’
그렇게 후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 * *
멍하다.
알면서도 계속 멍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음에도 멍했다.
“주군?”
그러다 깨달았다.
만사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주군?”
주변이 사라졌다.
“주군!”
……!
“아!”
로라스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놀란 눈을 한 번천을 보며 물었다.
“왜?”
“주군…… 뭐 하신 거였습니까?”
“내가 뭘 했나?”
“그게…….”
번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분명 뭔가를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하면 왜 자신이 로라스를 불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초점이 없었나?”
“그런 게 아니라…… 옆에 계시는데도 없으신 것 같아서.”
번천은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대답했지만, 의외로 로라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역시인가?”
“네?”
“아니야. 잘 알려 줬다.”
“네, 네…….”
번천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로라스는 뭔가에 또 빠져 있었다.
‘관조가 이리 자주 일어나게 되는 거였나?’
옆에 있음에도 없는 줄 알았다.
참 이상한 답변이었지만, 로라스는 그 이상함이 이상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약간 피곤하겠는데?’
큰 문제는 아니다. 귀찮은 게 문제는 되지 않으니 말이다.
‘집중할 게 필요해.’
그거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리고 곧 생길 것이고.’
에렌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