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25)
하늘 산맥.
햇볕 쨍쨍한 날에도 산중턱부터 색색 무리의 안개가 끼는 곳.
“후우우.”
로라스의 주변에서 산맥의 안개와는 다른 이질적인 안개가 순식간에 콧속으로 빨려 들었다.
“하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뜨는 로라스.
개천지보 구보. 아지아我知我.
원활한 진기의 소통.
육체가 완벽하게 적응한 것을 확인했으니 다음 단계.
개천지보 십보 아지니我知你.
너를 안다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해하는 경지.
이쯤 되면 자신의 의념을 실체화시킬 수 있다. 무기를 쓰지 않고 의지만으로도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얼마나 통할라나? 항마력으로 저항할 수 있으려나.’
의념을 포스로 봐야 할지, 마나로 봐야 할지, 아니면 제3의 뭔가로 봐야 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았다.
난폭했던 유역후는 다음 단계를 향해 노력했고, 천왕성을 떠난 후에는 십보는 단지 지나가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우화등선…… 아니, 반노환동하여 이 세계로 와 버렸으니.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되는 건 있었다.
눈앞의 사물을 이해해 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 탓에 저쪽 세계 마지막에 자신을 보면서 용오름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스스로 우화등선을 했다는 착각을 했고 말이다.
‘개천지보란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던 거지.’
로라스는 개천지보에 더 이상 집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내공보다는 마음공부가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거 배울 것도 수두룩하고.’
마법 공부도 좋지 않겠는가. 아니면.
“샤이한.”
로라스는 어슬렁 다가오는 샤이한을 부르며 생각했다.
‘이들의 그 군가軍歌 같은 신비로운 힘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샤이한은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몇 년은 된 것 같아.”
“실제로 몇 년 되었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마을 하나를 확장했으니까. 인간의 기술은 좋아. 편하고 빠르다.”
“다행이군. 혹시나 소홀한 게 있을까 걱정했는데. 천년나무 부족이 없었다면 원정대 규모부터 축소해야 하니까. 늘 든든하게 후방을 지켜 줘서 고맙다.”
“서로 도움을 받는 거니까. 그 때문에 올라온 건가?”
“부탁할 게 있어서.”
“무슨?”
“수비 영역을 넓혀 줄 수 있겠어?”
샤이한은 거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나?”
“특별한 일은 아니고. 방비 차원에서.”
“어려울 거 없지. 우리 종족도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사냥감도 도처에 있거든. 대신 마을 하나는 더 지어 줘야 해. 우리보다는 너희들이 만드는 게 더 낫거든.”
“좋아.”
“그리고 하나 더.”
샤이한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인간들을 보내 줘. 기술자들.”
“너희들이 쓸 물품들은 충분히 공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부족한가?”
“부족하지는 않아. 하지만 우리 종족 중에서 너희들의 기술에 관심 있는 애들이 있어.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해.”
“으음. 그건 쉽지는 않을 거야. 다들 산 아래서 살고 싶어 하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나? 충분한 대가는 지불할 것이다.”
로라스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일단 모집은 하지. 하지만 안전은 최우선으로 보장되어야 해. 그리고 강압적이어서도 안 되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도 우리 윗대 전사들을 존경하고 대우한다. 기술자들도 그렇게 대우할 것이다.”
“좋아. 최선을 다할게. 두 종족의 기술 교류도 나쁘지 않아. 그런 의미로 너희 전사들 중 일부를 우리 락에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샤이한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락의 인간들은 훌륭한 전사다. 우리 전사가 필요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전사들이 부르는 그 노래. 우리 쪽에도 전수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희도 마법사가 있잖아? 투지의 노래[鬪志之歌]는 전승 개념. 이해하는 거지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걸 이해시켜 줘. 시간은 얼마가 걸리든 좋으니까.”
샤이한은 코끝을 잠시 긁적이다 말했다.
“장로들께 건의하지.”
“힘쓰라고.”
로라스는 그렇게 씩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고, 샤이한 역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주먹을 갖다 대었다.
그렇게 유익한 두 종족 간의 대화가 끝났다.
로라스는 내려가는 대신 그들의 부족에 머무르며 투지의 노래라는 것을 먼저 익히기 시작했다.
자유로우면서도 오크들만의 규칙에 적응하는 날.
산 아래서 전령이 올라왔다.
“소영주님, 급히 귀환하시라는 영주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부친에게 몇 달 머무를 거라 미리 알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전령에 로라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급히 모셔 오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전령의 대답에 로라스는 뭔가 사달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로라스는 급히 샤이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산맥을 내려갔다.
* * *
“미친 게 아니고서야!”
벌써 같은 내용을 십여 일 동안 수십 번 넘게 읽고 있었다.
자신이 뭔가 뜻을 잘못 파악하고 있지 않나, 충분히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단문 형식으로 사실만 전해 온 보고서 같은 내용. 잘못 파악할 만한 내용이 없다.
“아버님. 로라스입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로라스가 들어오면서 인사를 하려는 것을 에듀는 편지부터 내미는 것으로 생략시켰다.
“이건…….”
에듀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로라스에게 말했다.
“어찌 생각하느냐?”
“큰아버지께서 너무 나가셨군요.”
“지켜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에듀의 나직한 목소리에 로라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용들로 봐서는 와카디아도 휘말리게 된다. 디존슨이 이 정도로 난장을 준비하고 있다면, 정말 그가 권력을 잡는 순간,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못 막는 경우가 생길 것 같았다.
“확실한 내용이겠지요?”
“의견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을 정확히 적은 것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로라스는 말을 하다 말고 에듀를 보았다.
부친의 경지는 깊어지고 있지만 노령화는 피할 수가 없다. 주름살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았다.
‘나는 무시하더라도 아버님은 그러실 수 없을 터.’
로라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못된 길이라면 되돌리면 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묘안이라도 있는 것이냐?”
“저도 할아버지가 정하신 후계자 중 하나 아닙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겁니다.”
“뚜렷한 방법이 없다면 내가 가는 것이 낫겠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라스는 반대했다.
“안 됩니다. 아버님은 이곳에 계셔야지요. 많이 안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결정권자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 아닙니까?”
“으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전의 와카디아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이 결재해야 하는 일들만 하루에 수십 건에 이른다.
하지만 이내 에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있지 않느냐. 내가 가고 네가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좋겠다.”
“아버지! 와카디아의 영주는 아버지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더더욱 제가 가야지요.”
에듀도 로라스도 알고 있었다.
에렌으로 가면 필연적으로 디존슨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만으로는 당신이 무조건 가실 터.’
로라스는 말로는 에듀를 설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느냐?”
“손을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에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로라스의 손을 잡았다.
로라스는 두 손으로 에듀의 손을 꽉 잡으며 운기를 시작했다.
“……!”
에듀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로라스를 쳐다봤다.
“아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로라스는 그런 에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조심하면서 아버님이 걱정하실 일 같은 건 없게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에듀의 입술이 일자로 꽉 다물어졌다.
* * *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거대하다고. 믿어도 된다고.”
“크크크크. 그래서 믿어?”
“당연하지. 내가 실력은 좀 달리더라도 거대한 건 최고 아니냐?”
“미친놈!”
옆에서 음담패설을 나누는 사내들을 보며 번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일과 시간 아닌가……’
사내들끼리 저런 대화는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대낮. 한창 훈련을 할 시간.
하지만 번천은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번천 경. 왜 그러십니까?”
저들의 지휘관은 자신이 아닌 눈앞의 엔케이였으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하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엔케이는 번천이 슬쩍 자신의 수하들을 살피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했다.
“혹시 훈련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게…… 오늘 찾아뵌 것도 부대 운영 때문이라. 오랫동안 독립부대를 운영해 오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널브러져 있는 게 보기 흉하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런 게 아니라…….”
번천이 차마 대놓고 뭐라 하지 못하자, 엔케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뭘 그리 어렵게 이야기하십니까? 틀린 말도 아닌 것을.”
그러고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것들아! 낮에는 좀 조심이라도 해라. 눈에 보이질 말든가!”
수하들은 엔케이의 말에도 너부러졌다는 그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거, 좀 봐주쇼.”
“삭신이 쑤시다니까. 빡세게 일했으면 며칠 쉬게 해 줘야지.”
오히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엔케이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너희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내 눈에서는 좀 비켜라. 시커먼 사내새끼들 보는 내 눈도 생각해 줘야지.”
엔케이와 그 수하들의 대화를 보면서, 번천은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부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광경.
‘내가 너무 과한 건가…….’
지금도 이 뙤약볕에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미안해지려고 했다.
그때 엔케이가 말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번천 경. 작전에 들어가면 잠시라도 긴장감을 놓아서는 안 되는 놈들이라. 이럴 때 저리 풀어야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긴장은…….”
“작전에 들어가면 다 하는 거지요. 하지만 제 부대의 작전은 전장이 아닌 곳이 대부분인지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우겠다! 이런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엔케이 부대는 전장보다 도시와 마을. 사람보다는 마물, 그리고 영지 외보다 내에서 싸움이 많은 부대.
엔케이는 어디론가 움직이는 부대원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전투의 성질이 다르기도 하지요. 가끔 미안해요. 전장에 나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얻는 명예와 재물.”
그러고는 번천을 보며 말했다.
“아! 물론 금전적으로는 저희도 상당히 짭짤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일은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아닙니다. 그냥 부대 특성이라는 게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주군께서는…… 저를 지휘관 타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병력을 맡기시고 계속 시험하시니 열심히 하고 싶어서. 무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번천의 계속된 사과에 엔케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로라스 백작님이 잘못 판단하신 거죠. 지휘관의 자질이 없다면 번천 경께서 지금 여기 계실 필요도 없겠지요. 부대를 더 잘 키우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전 지휘관은 책임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으음…….”
“그렇게 번천 님의 특색이 부대원들에게 전염되듯이 퍼지기 시작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열심히 헤매세요. 하하하.”
번천은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길을 제시하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한 결 줄어든 느낌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벼운 잡담을 나눌 때였다.
“엔케이 경!”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번천 경도 여기 계셨군요. 소영주님께서 두 분을 급히 찾으십니다.”
엔케이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가?”
“에렌에서 누군가 왔습니다. 내용은 모르겠고, 소영주님께서 기사들의 총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번천과 엔케이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주 관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