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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22화 (22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22)

흙투성이의 옷차림, 시커먼 피부, 커다란 땀구멍, 굵은 손마디를 가진 중년 사내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주는 사정이 어려워서. 제 농지에 몬스터가 드나들면서 복구를 해야 했습니다.”

“허허! 그런 사정이 있습니까?”

“건축 헌금을 내기로 약속했는데…… 죄송합니다, 사제 님.”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하는 중년 사내의 말에, 두꺼운 몸집에 하얀 피부, 하얀 사제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말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헌금은 마음입니다. 그저 마음의 짐을 덜면 되는 거지요. 그냥 가능한 금액만 내시면 됩니다.”

“그게…… 다음 달에나…….”

“허허, 형제님. 정성이 부족한 거라 봅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니 조금이라도 내시면 된다니까요.”

“…….”

“이거……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이번에 형제님의 농지에 축사까지 하려고 했었는데.”

자신보다 스무 살은 더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혀까지 차며 하는 말에, 중년 사내의 고개는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그러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 빌리시면 어떻습니까? 많이는 말고 아주 적게 말입니다. 모두가 몬스터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빚까지 지어 가며 돈을 내는 건…….”

“허허! 돈이라니요. 헌금은 돈이 아닌 성금誠金입니다.”

“그래도…….”

“허허!”

청년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형제님.”

누군가 먼저 중년 사내를 불렀고, 사내는 물론이고 사제 역시 무릎을 꿇었다.

“교황님!”

사제는 급히 외쳤고.

“교황님을…… 이리 가까이서…… 평생의 영광입니다.”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는 감격에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는 순간이었다.

“어?”

사내는 자신의 손을 잡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피해 복구는 좀 되셨습니까? 내일이라도 사제들을 보내 축사는 물론이고 복구 지원에 나서겠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내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 혼자도 충분합니다.”

“교단이 왜 있겠습니까? 기쁨은 나누고, 어려움은 함께 이겨 내기 위한 곳. 그리고 당분간 헌금은 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그건…… 제가 다음 달에는 꼭.”

“하지 마세요. 여유가 있으면 주변의 어려운 이를 도와주세요. 에펠리온님께서는 모두 보고 계십니다.”

“교황님……. 제가 힘들 때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어떻게…….”

급기야는 눈물까지 흘리는 사내를 아델리나는 다독이며 말했다.

“예배당은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힘들 때만 찾아오시는 게 당연한 겁니다. 힘들지 않으면 그분을 찾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겁니다.”

미소까지 보이며 사내를 달래는 아델리나.

그렇게 중년 사내를 달래 보낸 아델리나는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사제를 쳐다보았다.

“교황님…… 전…….”

“입 다무세요!”

“…….”

“신도들에게 한 번만 더 허허, 혀를 차면 그 혀를 잘라 주겠습니다.”

아델리나는 기겁을 하는 사제를 더 압박하려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못 볼 꼴을 보였군요, 백작님.”

“제가 시간을 잘못 맞춘 거지요. 집안일인데.”

“면목이 없습니다.”

아델리나는 다시 사제를 보며 말했다.

“따로 이야기할 때까지 모든 예배를 금합니다. 근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사라지자 아델리나는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약속 시간이 맞습니다.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단호하십니다. 헌금을 강요하는 사제가 한둘은 아니던데 말입니다. 저 정도면 양호한 편 아닙니까?”

“어중간한 자들이 가장 큰 문제지요. 차라리 대놓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면 피하기라도 하겠지만. 저리 사람의 마음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이 있지요. 제가 있는 한은 허락되지 않을 겁니다.”

“생각되는 바가 많은 말씀입니다.”

아델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이치들이, 당연하지 못하게 된 세상이라 그럴 뿐입니다.”

“성녀님. 아니, 교황님을 와카디아에 모신 것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로라스의 대답에 그녀는 미소를 짙게 하며 물었다.

“테라 경에게 무슨 이유에서 오신 건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한창 바쁘실 텐데,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급하지는 않으나 미리 정리는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정리를 말입니까?”

“해피랜드. 다 흡수하실 생각이십니까? 테라에게 츠어질이 탈주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예상보다 가진 힘이 컸습니다.”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간사한 여우 한 마리일 뿐입니다. 별거 아닌 거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츠어질이 들었다면 분통이 터질 평가였으나, 말한 로라스도, 듣고 있는 아델리나도 박하다 생각하질 않았다. 오히려 그 이름을 기억했다는 것 자체가 나름 훌륭하게 평가한 것이다.

“다만!”

로라스는 말을 이었다.

“기존의 신도들은 그냥 두셨으면 합니다.”

“그 말씀은?”

“교리가 나쁘지는 않지 않습니까? 에펠리온 교단과 일맥상통한 부분도 있고. 적절히 제어는 하시되, 깊게 관여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머님이 좋아하십니다. 해피랜드를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상당히 시간을 들이고 계시지요. 그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진 않습니다.”

타 교단에서 당당히 말할 건 아닌 문제. 하지만 로라스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말했고, 아델리나는 즉각 이해했다.

‘가족이 우선이지. 그게 무엇이 됐든.’

어차피 츠어질과 고위 사제들은 깡그리 정리된 상황이다. 오히려 작게나마 남겨 두어 공존하는 게 교단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

무엇보다 로라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듀 백작 부인께서는 조금의 곤란함도 없으실 겁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이건 사적인 부탁인데.”

“말씀하세요. 할 수 있는 거라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증인이라면?”

아델리나의 물음에 로라스는 대답 대신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백작님.”

아델리나가 부르자 그제야 로라스의 입이 열렸다.

“곧 에르자일과 결혼을 할 생각입니다. 교황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순간 아델리나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네? 결혼요?”

“네. 올가을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아직 약혼도…….”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지나친 사치인 듯하여.”

로라스의 말에 아델리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교황님?”

로라스가 다시 묻는 말에 아델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두 분 결혼의 증인이라면 영광이지요.”

“감사합니다, 교황님.”

미소를 짓는 로라스를 보며 아델리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축사를 부탁하지 않은 게 어딘가. 그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더 안 좋을 수도 있는 건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선을 그어 버리시니.’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너무 물렁했다. 떨어져 있지 말았어야 했다.

교단 따위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더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우선순위를 잘못 정했다.

독해져야 한다.

마음먹어서 원한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있던가?

그쪽에서든, 이쪽에서든 말이다.

그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포기했지만, 이쪽은 아니다.

아델리나는 그렇게 평정심을 찾고는, 이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와카디아에 큰 경사로군요.”

“교황께서 이곳에 계신 게 더 큰 경사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교단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영지의 지원 그리고 교단이 영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회의를 끝내고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뵙길 고대하겠습니다.”

“저야말로.”

로라스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교황님.”

“네.”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는 것이겠지요?”

아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칫 대답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글쎄요……. 새로운 삶을 얻어도 지난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

“지난 삶에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그렇지 않을까요?”

아델리나의 말에 로라스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눈을 뜨며 말했다.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

“너무 늦게 알아봐서 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해해 주겠지요?”

순간 아델리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로라스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뒤에서 담담한, 그래서 더 슬프게 들리는 아델리나의 음성. 하지만 로라스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 * *

‘알았어야 했는데.’

정말 알았어야 했다.

사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도 스스로를 몰랐는데 거기에 관련된 타인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자신의 일에 적극적이었는지, 그리고 호의적이었는지 진즉 고민해 봐야 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첫 만남 때부터 강력한 끌림은 있었다.

‘떠올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분명 떠올렸다.

곽아의 어린 모습을.

‘빌어먹을. 그때는 반 미친놈이었으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건 유역후가 당시에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역후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을 터인데, 하물며 지금이야.

의문은 들었다.

곽아가 자신이 유역후라는 걸 어찌 알았는지. 그리고 자신은 게이트를 통해 전생前生을 자각했는데, 그녀는 어떻게 자각을 했는지 말이다.

의문투성이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

몰랐다면 모를까, 곽아가 상처 받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서 말했다.

결혼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아니길 바랐는데, 굳은 곽아…… 아니 아델리나의 표정이 순간 굳는 걸 보니 생각했던 게 맞은 듯했다.

‘대체 왜?’

물론 그때는 아델리나뿐만 아니라 시커먼 놈들도 껌딱지처럼 달라붙긴 했다. 그래서 그때 홀로 천왕성을 빠져나온 것이기도 했고.

다행히 금방 안색을 되찾고, 그냥 교황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는데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곽아는 쉽게 포기하는 아이가 아니다. 제 사형제들을 살뜰히 살피면서도, 그들보다 위에 있으려고 했던 아이.

쐐기를 박아야 했기에, 나도 이제는 알고 있다는 걸 알렸다.

다시 한 번 미안함을 느꼈지만 굳건해지기로 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리움에 감정이 과해진 것일 테니까.

“글쎄요……. 새로운 삶을 얻어도, 지난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그녀가 하는 말처럼 그리움 탓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끊었고, 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단호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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