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16)
말이 떨리고, 톡 건드리기만 하면 울 것 같다.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늘 미리 생각하고, 미리 행동하는 자. 그래서 후회라는 걸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오리시암이다.
그런 오리시암이 눈물을 글썽이니, 솔직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테라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이게 저리 눈물을 터트려야 할 일인가 고민해야 했다.
“…….”
그리고 그제야 봤다.
그의 다리에 칭칭 감겨 있는, 아니 기묘하게 감겨 있는 붕대를.
“다리, 치료가 안 되는 건가?”
“이 병신 같은 놈이 너무 깊이 찔러 넣었다고 하더군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
“제가 정말 다리병신이 되면…… 그래도 계속 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수하가 다쳤다고 버릴 사람으로 보이나?”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이 육체가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 그의 마음을 다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약속했다. 그리고 난 지킨다. 넌 내가 없을 때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백작님! 주군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나?”
“번천 경도 저도 같이 백작님 밑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백작님에게 같습니까?”
순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번천과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리시암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번천과 같은 신뢰를 주는 건 아니다.
“그래서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그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제 자신이 제일 중요하던 그가, 어머니를 그리고 락을 위하다 저렇게 되었으니.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주군.”
“작위도 줄 것이다.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늦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인정받았으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널 인정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부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활짝 웃는 그를 보며,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저리 좋나?’
솔직히 조금 의외다. 제 실력을 믿으니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몸 관리 잘해라. 마법사든 신관이든 사람을 보낼 테니, 무조건 다시 걷는다는 생각만 가지고.”
“감사합니다, 주군.”
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하는 걸 들으며, 그렇게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같이 따라왔던 테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조금 이상해서 말입니다.”
“뭐가?”
테라가 대답했다.
“그날, 응급처치를 도와준 건 저였습니다. 분명 깊은 상처였습니다. 출혈 과다로 인한 사망을 걱정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 치료는 교황님께서 직접 해 주셨습니다.”
“성녀를 말하는 거지?”
“네. 아델리나 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계속해.”
“여하간 성녀님께서 치료하신 후에 걷는 건 무리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 오리시암 경의 상태는…… 아무래도…….”
“…….”
“정말 못 걸을까요?”
테라의 조심스러운 물음.
“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주군…… 갑자기 왜?”
“아냐, 아냐. 잠시 속은 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게 웃겼고.”
“네? 그럼 혹시 오리시암 경이 지금 주군께 거짓을 고했다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테라. 하긴 오리시암의 겉만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말을 뜯어보면 거짓말을 한 건 없어. 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하하하하하.”
자신의 부상으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원하는 것을 취한다. 나중에 알아도 불쾌하지 않을 수준으로 말이다. 지극히 오리시암답지 않은가.
‘그런 건 타고난 거지.’
사실 사정을 듣고 오리시암이 그런 부상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않는 자니까.
“혹시 그가 정말 불순한 의도를 지녔다면 제가…….”
테라가 흥분하는 걸 말렸다.
“이야기했잖아.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기분 나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어찌 됐든 주군이 속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냥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일을 꾸민 건 사실이고, 결과적으로 그가 실패한 것도 사실. 하지만 그 마음은 높이 사 줄 만하지. 상을 내려야 할 사람이야. 그래서 가장 먼저 그를 만난 것이고.”
“…….”
“그에겐 쉽지 않았던 일을 했다. 보상은 해야 하지 않겠냐?”
“주군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사실 그간 한 일에 비하면 내가 홀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산적 출신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크게 썼을 테니까.”
편견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사실 그가 있어서 무법지대를 효과적으로 관리한 것 아닌가. 토니 경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있어서였기도 하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번천의 목숨을 살린 적도 있고.’
이만하면 내 울타리 안쪽으로 받아 줄 만하지 않은가?
테라에게 말했다.
“친하게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네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아니까. 하지만 적대는 하지 마라. 우리 식구다.”
“크게 부딪칠 일도 없습니다. 주모께 충성을 다하려 했던 것도 경험했고 말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혹시 싫어하며 어찌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성녀님과 약속은 언제 잡을까요? 다른 지역에 계시지만 약속만 잡히면 직접 오시겠다 했습니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베론 남작의 영지에 있습니다. 락 다음으로 해피랜드의 세력이 가장 컸던 곳입니다.”
“각 영지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도 해야 하니, 영지 회의가 끝나면 바로 움직이도록 하자.”
“네.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테라가 먼저 움직였고.
‘아델리나…….’
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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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회의.
“그나마 이쪽 북부 지역은 피해가 없는 편입니다. 이민족들도 그렇고, 마을을 이루는 대부분이 거친 사람들이니까요. 아마 락 다음으로 피해가 가장 적을 겁니다.”
토니가 북부 지역을 대표해 말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지역에 피해가 발생하다 보니 들어오는 물자가 적어졌습니다. 특히 나타족의 불만이 큽니다.”
오리시암이 거들 듯 말했다.
“락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진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은 천재지변과 다름없는 일. 락도 물자는 충분치 못한 걸 이해시켜야 하오.”
드리블이 하는 말에 오리시암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걸 다 납득하면 나타족이 아닙니다.”
“제일 문제는 무엇보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불만을 누르고 있지만, 계속 이런 상황이 유지되면 우린 불만을 누를 명분이 부족해집니다. 강제적으로 그들을 내리누르지 않는 한 말입니다.”
상황이 좋지는 않은 듯 토니까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말에 에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다른 문제는 여유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물자 부족은 다르다. 일단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토니도 그것을 아는 듯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행히 영주님께서 이번에 그들까지 신경 써 주셔서 일단 불만은 가라앉았지만, 식량만큼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했네. 토니 경 그리고 오리시암 경. 두 사람이 그쪽을 잘 다독이게. 방법을 강구할 테니.”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굵직한 현안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방에는 에듀와 로라스만이 남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그리고 에듀의 물음에 로라스가 답했다.
“필요한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일은 없으니, 일단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일을 너무 많이 벌렸어. 무법지대를 편입시키는 작업과 도로 작업도 완성이 되지 않았는데.”
락의 급격한 발전.
사실 이번 게이트 출현으로 인한 마물들의 세가 늘어나지 않았으면 충분히 감당할 일이었다.
“아버님, 고민해서 좋은 방법이 나온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고민을 해야겠지요.”
“…….”
“하지만 이번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락하시면 제가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버님은 락의 내정만 봐 주시면 됩니다.”
“그럴 수야 있나. 한 손으로는 부족하다.”
에듀는 로라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든든하구나.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이제는 정말 너만 보면 아무 걱정이 없다.”
“건강하시기만 하세요. 아버님이 생각했던 것, 계획했던 것 다 이루는 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듀는 빙그레 웃었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을까? 우리 가족, 여기의 사람들이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
“그건 꿈이 아니라 일상이 될 겁니다.”
에듀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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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하지 마.”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어디 하나 부러트려서 다시는 도전하지 못하게 할 테니.”
까미유. 까메유.
로라스에게 선택받은 두 쌍둥이 형제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해서.”
“밀릴 수는 없잖아.”
“지휘관의 권위로 눌렀어야지.”
“성공하면 신뢰가 알아서 굴러들어 와.”
“말이라도 못하면.”
형제는 어느새 침묵과 함께 시선을 교환했다.
“가자.”
동시에 말을 하며 연병장으로 나가는 형제. 그리고 그곳에서는 백여 명가량의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미유와 까메유의 나이 아직 서른도 안 된 사내들. 하지만 그곳의 청년들은 형제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정렬!”
그들 중 한 명이 힘 있게 목소리를 내었고, 청년들은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춰 섰다.
‘군기라도 빠져 있으면 트집이라도 잡을 텐데.’
부대원들이 이런 군기를 가졌다면, 지휘관 입장에서는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까미유 입장에서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부대 내 사병과 간부의 알력은 존재하는 법이지만, 현재 상황은 알력이라기보다는 텃세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일반 병들을 맡기시지.’
이해는 했다.
눈앞의 병력은 서로 길게는 십수 년간 동고동락해 온 사이. 그들에게 자신 형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이방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을 수도 없고.’
차라리 망나니 같은 놈들이라면, 제 놈들끼리 뭉쳐 다니며 세를 과시하는 그런 종류의 놈들이라면, 진작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어째 쉬운 놈이 하나가 없냐.’
하지만 하나하나 만만한 놈들이 없었다. 웬만한 군관을 찜 쪄 먹을 무력의 소유자들.
락의 원주민이 아닌, 타 영지에서 주군이 직접 거둔 아이들이나 다름없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분명 처음 시작 때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을 뿐, 노골적으로 적대시까지 했다.
현재 이 정도로 만들어 둘 수 있었던 건 형제와 이 젊은 집단, 자칭 로스트 칠드런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 약속은 별게 아니었다.
―실력으로 눌러라. 그러면 이 직책에서 물러나겠다.
형제는 그렇게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