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14)
“바깥이다!”
“이 얼마 만의 신선한 공기냐!”
“고기. 제대로 된 고기.”
“고기보다는 술이지.”
게이트에 나오자마자 토벌대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핵을 파괴했음에도 게이트가 존재한다는 거지?’
사람들이 분주히 야영 준비를 하는 가운데, 게이트에 대한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이런 던전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책에서조차.”
에르자일의 말에 내 확신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게이트 왜곡으로 이어진 세계의 길목.
“그럼에도 계산이 가능했다는 거지?”
그리고 에르자일이 내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연구는 필요해. 계산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하니까.”
이건 굉장한 발견이라 해도 좋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시간 왜곡을 감안하더라도 이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도를 만들 수도 있나?”
에르자일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해. 하지만 실용성은 없을지도 몰라. 게이트 안의 마물들, 계속 형성이 될 텐데 지속적으로 관리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필요한 것만 뚫으면 되니까.”
“또 시간 왜곡의 흐름도 제각기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려면 엄청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투자할 가치는 있지.”
계속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분명 그럴 가치는 있을 터. 하지만 여력이 될지 모르겠구나. 마물이 쏟아지는 속도를 보면 말이다.”
“관리만 가능하면 게이트는 또 다른 힘이 될 겁니다. 금광이 아닌 마정석 수급과 군사 훈련용으로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늘 산맥과 평야의 간격. 그리고 마물의 규모를 생각하면 우리 와카디아 지역의 게이트는 네 개 정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여전히 우려 섞인 말씀을 하셨다.
“우리만 생각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닫을 수만 있다면 닫는 게 좋을 텐데. 핵을 파괴해도 게이트가 남아 있으니 걱정이 되는구나.”
“몇 개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핵을 파괴하면 닫힐 확률도 있을 겁니다. 최소한 각 구역의 핵을 파괴함으로 마물들의 숫자가 극도로 준 걸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사이, 야영 준비가 끝났다.
라이너의 부대와는 달리, 락의 토벌대는 완벽하게 장기전을 준비했기에 식량 부족 같은 일은 없었다 했다. 덕분에 야영장에서 이리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데 문제는 없었다.
소량의 술까지 돌아가니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했다.
경계병을 제외한 모두 잠에 들었고, 나는 움직였다. 아까부터 이쪽을 보는 시선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인기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감각.
개천지보 구보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 시선을 알지 못했을 터였으나, 지금의 난 게이트 전의 내가 아니었다.
“역시 프라일 님이셨군요.”
게이트 근처에서 지켜보던 인영.
“오랜만이다.”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봤던 사람들 중 최강자인 자. 그리고 메타린 평야의 지배자.
“잘 지내셨습니까?”
“협조해 주는 이웃 덕분에. 그런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네. 너희들이 들어간 지…… 일 년째야.”
“알고 계셨습니까?”
“들어간 걸 봤으니까. 그래서 놔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니었습니다.”
프라일에게 게이트를 설명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마물들이 평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빨리 닫아야 해. 우리는 메타린 산맥의 게이트만으로도 할 일이 많거든.”
“거기도 게이트가 출현했습니까?”
프라일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어떻게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내가 없는 사이 많이 안 좋아졌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일이라면?”
“마물들이지. 우리 쪽은 괜찮지만 다른 지역은 난리도 아니라더군.”
“확인해 봐야겠군요.”
“아주 옛날에 이런 적이 있었지. 문제는 지킴이들이 오지 않고 있어. 그건 다른 지역도 게이트가 많다는 뜻이겠지.”
로라스가 알고 있는 프라일은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짜증과 분노, 거기에 초조한 기색도 보였다.
-사람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반대편에 서지 않도록 해라.
할아버지가 경외심까지 보였던 사람이 눈앞의 프라일.
“하늘 산맥은 이쪽이 맡겠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다른 쪽도 확인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상한 말을 했다.
“인간은…… 자꾸 망각을 한단 말이지.”
“…….”
“이 세계의 지배종이라는 자만인지는 몰라도, 멸종의 두려움이 없어. 그 위기를 겪었음에도.”
그러다 나를 직시하며 경고했다.
“정말 그거라면 준비해야 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합니까?”
“지배종이 바뀌는 거. 당연한 자연의 섭리라 해도 너무 많은 피가 흐를지 몰라. 일단은 나도 동종이 많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가끔 생각하지만 프라일은 짐승 같은 느낌이 있다. 영역, 무리를 따지는 맹수. 일단 대화하는 방식이 일반인 같지는 않다.
분명한 건 그도 대종사(大宗師)의 풍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도 그리 말씀하셨을 테고.
“그런데.”
“말씀하시지요.”
“드러내기로 한 건가?”
또다시 뜬금없다 생각되는 물음.
“예전에는 숨겼잖아. 아닌 척했고. 게이트 안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건가? 다 드러내고 있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엔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고…….
“그리 보이십니까?”
그래서 흥미가 일었다.
“뭐. 어찌 됐든 좋은 이웃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으면 그뿐. 특히 이런 때에 나서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좋은 일이지.”
할아버지 이외에 나를 알아보는 이.
“나서면 가능하겠습니까?”
“음흉한 건 어울리지 않아. 스스로 알면서 왜 물어?”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어디까지 될지. 프라일 님은 할아버지 이외에 처음 보는 초월자니까.”
“쓸데없는 말이다.”
그는 그렇게 내 호기심을 일축하며 말했다.
“여하간 난 내 영역을 지킬 테니, 넌 네 영역을 지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곳에 와 기다려. 올 테니.”
그렇게 몸을 돌리던 프라일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농지 만드는 거. 더 이상은 평야 안쪽으로 들어오지 말도록 해. 거긴 파칼이라 불리는 사자 일족의 영역이니까. 평야에서 사냥도 자제하고. 사자들하고 먹이 경쟁은 좋지 않은 선택이니까.”
그리고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사라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내 영역이라…….’
어디까지인지 고민해야 할 때였다.
* * *
벽에 설치된 등잔은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홀 중앙의 샹들리에 역시 눈이 부시지 않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게 빛을 발하고 있다.
직접적인 불이 없는 걸 보아, 쉽게 볼 수 없는 마법 도구일 것이다.
어디에 향초를 피워 놨을까?
락에서 쉽사리 맡을 수 없는, 소위 말하는 고급진 향내에 은은한 공기의 흐름.
길게 늘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질 것 같은 이 장소는 해피랜드의 예배당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리고 그곳에서 츠어질은 성인의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기사님들도 예배에 참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와카디아의 많은 영주님들도 참여하시니, 단합을 위해서도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듣기 편안한 목소리.
“교단에 능력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마을 관리직에 공석이 몇 개 있다 들었습니다. 맡기시면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직이 읊조리듯 편안한데도 묘한 흥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 뭐라 말해야 할까?
마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고 할까?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건 부군께서 렌에게 일임한 일이라.”
곤란한 듯 메어리가 입을 열자, 츠어질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렌 상단주가 자리에 없으니 추천드리는 겁니다. 일단 임시로 말입니다. 그가 돌아오면 만족해할 겁니다.”
“…….”
“그리고 락 이외의 지역에 몬스터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네? 사실입니까?”
“지역구에서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해피랜드에서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만들고 있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모양입니다.”
“토니 경과 오리시암 경에게 말해야겠군요. 아니, 테라가 영지에 돌아왔으니 웬만한 일은 다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각자 하시는 일들도 많은데 굳이 부담을 안겨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분들의 의무이고 책임이니 기꺼이 해결하려 할 겁니다.”
메어리의 말에 츠어질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런 일은 도움의 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부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교단에 능력 있는 자들이 많으니.”
그 순간 메어리가 츠어질을 불렀다.
“교주님.”
“말씀하십시오, 부인.”
“제가 해피랜드의 신도이고 교주님의 말씀을 존중하지만 지키는 선이 있습니다. 영지의 일은 부군과 제 아들이 떠나면서 만들어 둔 체계가 있고, 저는 그것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두 분께서는 분명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 두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흘렀습니다. 몬스터들의 습격, 영지민들의 민원 처리.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
“락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니 곡해하여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체계를 바꿔야 한다면 토니 경과 오리시암 경이 진행할 것입니다. 교주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메어리는 그렇게 츠어질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은 묘하게 풀렸고, 목소리에는 힘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년까지 왜 이래? 말을 잘 듣다가 엉뚱한 곳에서 버티는군.’
츠어질은 슬쩍 메어리의 옆을 곁눈질했다.
‘저년은 왜 같이 있어. 저년의 영향인가?’
불리한 세를 뒤집기 위해 준비한 오늘이었다.
‘그래. 오늘 둘 모두 은총을 내리지.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의식에 필요한 건 모두 갖췄다.
“부인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리해야지요.”
츠어질은 편안한 미소와 함께 그리 대답하고는 옆의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아델리나 님. 부인을 위해 예배를 시작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고는 묻는 말에 아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는 분이 다르다 하나, 좋은 교리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해피랜드 교주님의 설교가 어떤지 알고 싶군요.”
어떻게 최면을 걸지 고민하는데, 맹수 앞에 나 잡아 잡수 하며 초식동물이 달려오는 격이다.
‘날을 제대로 잡았어.’
츠어질은 느긋하게 단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차분히 설교를 진행했다.
사실 종교적 지도자 노릇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며, 남들에게 없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특히 확신.
스스로 꾸며 낸 이야기인 걸 알지만, 본인 스스로 그것을 맹신해야 했다.
나머지는 기술이다.
누가 들어도 옳은 이야기, 그것을 부풀려 알 듯 말 듯 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확신에 찬 목소리.
청중이 집중되었다 싶으면 살짝살짝 동작을 취한다. 정말 몰입하면 그들도 자신의 행동을 따르게 마련.
향초 중에 섞은 미량의 마약은 이런 그들에게 맹신을 심어 준다.
조명, 향기, 소리. 그리고 그들이 앉아 있는 저 편안한 의자까지. 어느 하나 계획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설교를 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그녀들의 손을 잡으며,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촉각을 포함한 오감이 완성되는 순간 인형술은 최면을 넘어 세뇌 단계로 들어간다.
“좋습니다. 안심하세요.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이고, 난 그분을 대리하는 대리자.”
마약에 취해 심신은 몽롱하게 되었을 것이고, 움직이는 손짓마다 붕붕 뜨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말은 천둥처럼 마음에 각인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신도들이 은총이라 말하는, 자신의 특기이자 비밀.
“중간 관리자를 우리 신도로 채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믿으세요. 맡기세요.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겁니다.”
침묵이 계속되자, 츠어질은 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은그릇을 가지고 왔다.
거기엔 작은 케이크 조각과 와인이 담긴 작은 잔이 들려 있었다.
‘더 버틸 수 있을까?’
믿는 신의 성체와 성혈이라 불리는 종교적 예식이니 의심하지 않겠지만, 사실 이건 다량의 마약을 섞어 넣은 것들. 그리고 은식기 자체가 고대 마법이 담긴 마법 도구.
이게 바로 성기(聖器)라 불리는 물건들이다.
의심 없이 먹고, 마시면 게임은 끝이 난다. 분명 그리했었는데…….
“지켜보는 재미는 있었는데, 더 이상 가면 수습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말이지.”
순간 들리는 말에 츠어질의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