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8)
“우리 군사가 아직 모르는 게 있었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헤르메스였다.
“품에 구렁이 수십 마리는 품고 살았던 아이야. 스물도 안 됐을 때부터 그랬지. 그 척박한 곳에서 우리 마탑과 아이언 센터를 세우더니 세를 키운 거 봐 봐.”
“…….”
“힘들게 키운 제자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락으로 간 후로는 얼굴 보기가 참으로 힘들거든.”
결국 걱정할 거 없다는 소리들에 린델은 살짝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입을 연 자들은 세상에서 천재로 추앙 받는 이들. 당연히 웬만한 재능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이들이다.
하지만 로라스에게는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특히 계속 지켜보는 공작의 표정은 더더욱 묘했다.
마치 너희들이 아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그런 느낌일까?
실제로 베스타인 공작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도 상대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까?’
에르페유는 물론이고 헤르메스도 로라스의 평가를 후하게 하고 있지만, 원래 평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고수가 하수에게 하는 것.
저 두 사람은 로라스보다 자신들이 위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로라스는 권신이라 불리는 에르페유보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헤르메스보다 강하다.
굳이 그 사실을 두 사람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몇 년 못 봤으니 더 무시무시해졌을 터.’
로라스는 어렸을 때는 제법 숨기는 척하더니, 나이가 들어서는 소용없다 느꼈는지 제 경지를 숨기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가 자신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마흔? 어쩌면 그 전에 나를 능가하겠지.’
누가 들었다면 까무러칠 만한 생각.
오대 대마법사라느니, 십대 포스 마스터라느니, 최강의 기사라는 그런 명성 따위는 베스타인 공작 앞에서는 태양 아래 반딧불 같은 것.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초월자 베스타인의 경지를 마흔 전에 다다를 것이라는 건, 정말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
초월자는 초월자를 알아보는 법. 초월자인 공작이었기에 로라스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마흔도 지금의 내 경지인 것이고, 내가 초월자라 불렸을 때의 경지는 지금 이르지 않았을까?’
공작은 그리 생각하다가 표정이 어두워졌다.
‘욕심이 조금만 있었어도.’
로라스가 권력욕이 있었다면 생각할 것 없이 그를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다.
‘미련한 놈. 결국 가지면 뜻대로 될 것을.’
하지만 로라스는 그게 없었다.
좋은 아들, 좋은 영주가 될 수는 있어도 좋은 지배자는 될 수 없다.
자신의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수많은 의무 그리고 비정을 안고 가는 그런 자리.
아쉬운 마음에 후계 후보로 만들긴 했지만, 결국 로라스는 에렌을 벗어나 락으로 돌아가 버렸다.
‘영악하게 셋째와 줄을 대고 말이지.’
권력을 가질 마음은 없지만, 멀어질 생각도 없다는. 마치 뒤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포지션. 능력 그리고 자신감이 없다면 가질 수 없는 포지션이다.
생각이 깊어지고 있을 때 린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북부에 지휘관급이 부족하다는 걸 생각하면, 일부 병력을 예비대로 주둔시켰으면 합니다. 만의 하나 하늘 산맥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면 막을 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베스타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생각은 아니구나. 어느 정도나?”
“삼천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규모면…… 누구를 보내려고?”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나서고 싶습니다.”
“네가 직접 말이냐?”
“마물 토벌전에 제가 필요치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방어선 구축은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동안 힘들었나 보구나. 그 핑계로 좀 쉬려는 것 아니냐?”
“아닙니다. 저는 단지…….”
“농담이다. 그래,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장벽도 나쁘지 않겠다[email protected]괜찮겠지.”
“장벽이라면…….”
“곧 겨울이지 않느냐. 놀고먹는 이들이 많아질 거다. 좀 더 싸게 인부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인부들은 일자리가 있어 좋아할 것이고. 재정은 충분하니 이 기회에 뒤를 방비하자.”
“주군. 남부가 심상치 않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니 뒤를 방비하자 말한 것이다.”
매우 복잡하고 정치적인 발언이었기에, 린델은 잠시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이내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가마.”
그렇게 회의가 끝났고, 열흘 후, 대규모 토벌대가 에렌을 떠났다.
* * *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주모.”
“그런가요?”
“뭐 걱정하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오랫동안 어떤 단서도 없으니…… 정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은 게@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메어리의 대답에 오리시암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영주님과 소영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주모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냥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주님의 말씀으로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것 같다고 하시던데. 우리 영지는 괜찮겠지요?”
“또 예배를 보셨습니까?”
“마음이 불안하니.”
“종교에 의지하는 것도 좋지만 지나쳐서 좋을 게 없습니다, 주모.”
“알면서도 자꾸 그러네요. 에렌만큼이나 치안이 좋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리시암은 바로 그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은 이후로 락의 치안은 에렌과 쌍벽을 이룹니다. 창궐하던 마물들도 토벌대 이후로 숫자도 극히 적고 말입니다.”
“…….”
“그뿐입니까? 렌은 지금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상단을 운영하는 중입니다. 옛날의 락이 아닙니다. 몇몇 곳을 제외하면 가장 부유한 영지입니다, 주모.”
“알면서도 자꾸 그러네요. 마음이 헛헛한 게 요새는 꿈에 자주 그이와 로라스가 보이니.”
메어리의 말을 들으며 오리시암은 웃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점점 약해지신다.’
초기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종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멘탈은 점점 좋아지지 않았다[email protected]나빠졌다.
메어리는 일반적인 아녀자다. 아니, 일반적인 아녀자보다 더 순한 사람이다.
‘영주님도, 그리고 주군도 너무 대단해! 그게 문제야.’
에듀로부터, 로라스로부터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 왔던 그녀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왔다.
덕분에 영지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영부인이 되었지만, 두 사람이 없는 지금은 절대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락, 아니 와카디아 대영주의 대리인이다.
하루에도 그녀가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수십 여건이다.
‘지금이야 잘 버티고 있지만…….’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버티고 있지만, ‘앗!’ 하는 순간 무너질 게 뻔했다
‘뭣보다 그 잡것들!’
해피랜드가 문제였다.
종교 집단이 자신의 세를 모으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지금은 선을 넘고 있었다.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받아 부동산을 모으고, 이권 사업 등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쪽 수입이 줄고 있고 말이지.’
귀족의 꿈을 꾼 이후, 토니의 확실한 보좌관으로서 활동하는 오리시암이다. 그 탓에 흑사회의 접촉을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와카디아 흑사회의 수장이다.
해피랜드의 교세가 커지고, 자연스레 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흑사회 조직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모자라 공적인 일까지?’
백작 부인을 앞세워 사업에 끼어들고 있었다.
특히 개간 사업에서 영향력은 이미 상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작년에 로라스가 데려온 노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 있었다.
노예들이 믿는 건 로라스지, 락이 아니다.
그런 로라스가 사라지니 찌든 노예근성이 튀어나오는 이들이 많았고, 그런 그들을 끌어안은 것이 해피랜드다.
‘이제는 대놓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토니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토니 경은 백작 부인의 말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르니.’
생각해 보면 락의 규모에 비해 최고 수뇌부는 몇 되지 않는다.
에듀와 로라스 그리고 삼대기사들. 토니와 렌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무게감이 다르다.
“경을 믿습니다.”
그때 메어리의 말에 오리시암은 깜짝 놀랐다.
“네?”
“그래도 경이 계시니 적지 아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게 무슨…….”
조금은 편안한 표정의 메어리가 답했다.
“로라스가 그랬지요.”
“주군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남편과 자신이 없을 때, 어디인가 가야 한다면 시그탑 경을 대동하라고요. 그리고 무슨 일을 벌여야 할 때는 드리블 경, 렌 경과 상의하라 했지요.”
메어리는 천천히 대답하면서 오리시암을 직시하며 말했다.
“영지의 의견이 분열되었을 때는 토니 경에게 도움을 청하라 했고.”
오리시암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로라스는 경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말씀을…….”
“시국이 혼란하여 버텨야 할 경우가 있다면, 반드시 오리시암 경과 상의하라 했지요.”
오리시암의 표정이 굳어졌다.
‘버텨야 하는 경우…… 지금 주모가 혼란하다 느끼고 있는 것이고…….’
오리시암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주모께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그저 저를 믿어 주시옵소서. 두 분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메어리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걱정하는 걸 알아요. 하지만 오리시암 경과 토니 경이 제 곁에 계시는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모께서는 뜻대로 통치하시면 됩니다.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옆에서 말씀해 주세요. 귀 담아 듣겠습니다.”
순간 오리시암은 바로 해피랜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가 나에 대해 그런 믿음이 있었다는 거지?’
오리시암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로라스.
주군으로 대하는 사람. 하지만 자신은 그와 잘 맞는 편은 아니다. 그에게 넙죽 엎드리는 이유는 하나.
‘어찌 비벼 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강자잖아.’
처음 보는 순간 고양이 앞에 선 쥐의 감각이 뭔지 알았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압박감.
전신의 털이 올올히 삐죽 치솟아 올라, 엎드리라, 엎드리라 했던 본능적인 경고.
지금 생각해 봐도 간 볼 것도 없이 넙죽 엎드린 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이었다. 살았으니까. 그리고 거스르지 않고 버텨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몰랐다.
자신을 하나의 도구로만 보고 있는 줄 알았지, 모친 메어리에게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말이다[email protected]했을 줄은 말이다.
그 무서운 로라스도 메어리 앞에서는 그냥 얌전한 고양이가 아니던가?
‘그래. 열심히 한다. 최선을 다해 돌아올 때까지 무조건 버틴다.’
오리시암은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계속 그리 믿어 주시면 제가 모든 걸 알아서 하겠습니다.”
“믿어요, 오리시암 경.”
여기서 제대로 그녀에게 점수를 따서 나쁠 건 없을 터.
메어리의 말에 오리시암은 고개를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이 오리시암. 한 목숨 주모께 바치겠나이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말이 잘도 터져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한가?
‘남작이다, 남작.’
그녀가 로라스에게 좋은 말 한마디만 해 준다면 귀족이 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지금도 물론 기사 임명으로 귀족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남작은 돼야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거라 생각하는 오리시암이었다.
그렇게 영주 관저를 나오며 오리시암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