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7)
“영주님, 잠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지스터 에르자일.
던전 안에서 수많은 트랩을 미리 제거하고, 토벌대 전체의 용기를 주는 마법까지 시전한 이 엄청난 매지스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군 정지! 정지하라!”
에듀는 곧바로 부대를 멈췄다. 그러고는 에르자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매지스터.”
이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될 사이이긴 했지만, 에듀는 그녀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일반적인 던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라면?”
“그게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마나의 흐름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에르자일은 마나가 없을 거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나가 없는 공간에서 자신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
에듀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곤란해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고, 그녀의 말은 늘 맞았기 때문이다.
“네.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얼마나?”
“사흘 정도 필요합니다.”
토벌대가 사흘이나 멈춰 있어야 한다는 말에 에듀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감사합니다.”
에르자일은 곧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커다란 바닥을 종이 삼아, 그녀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사흘 후.
그녀는 깨달았다.
이미 이 공간 안에 갇혔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마나의 흐름을 도형화하니 눈에 익은 도형이 드러났다.
‘공간 왜곡!’
에르자일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범상치 않은 크기의 던전에 그 정밀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건 그냥 공간이 아니다.
‘이 정도면 신화적인 공간!’
이런 건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듣지 못했고,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
‘감당이 될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상함을 눈치채고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지스터.”
자신을 부르며 결과를 요구하는 에듀를 향해 에르자일은 입을 열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에듀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곳은 게이트 따위가 아닌 걸로 판단됩니다. 하나의 세계에 수많은 세계가 겹쳐 있는, 말하고 있는 저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공간입니다.”
“나갈 수 없다는 건가?”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해 줘야 합니다. 가야 하는 길이 우리가 있던 그 공간이 맞는지를 알아내려면 말입니다.”
“…….”
“죄송합니다. 더 좋은 방법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아냐.”
에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 실수지. 들어올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네?”
에듀는 에르자일을 보며 반문했다.
“수많은 세계가 이곳에 존재한다 했나?”
“그럴 거라 파악됩니다.”
“그럼 맞아. 들어왔을 때 그 오싹한…… 인지되면서도 아닌 것 같은 붕 뜬 감각.”
“…….”
“예전에 경험했던 적이 있어. 진즉 매지스터에게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에르자일이 깜짝 놀라며 묻는 말에 에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옛날 이런 곳에서 로라스를 만났다는 것을 말이다.
* * *
“회개하고 반성하며, 그분을 찾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겁니다.”
츠어질의 말에 메어리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기세요.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구원으로 이끄실 겁니다.”
“믿습니다.”
“주말 예배는 잊지 마세요.”
“물론이지요.”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리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신 교주님의 시간을 너무 빼앗아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백작 부인께서 우리 해피랜드를 위해 힘써 주시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츠어질은 미소와 함께 목례를 했다.
그렇게 영주 관저를 나오며 츠어질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 같은데.’
락의 영주와 소영주의 소식이 끊긴 지도 반년이 넘었다.
수하를 시켜 수색을 했지만 하늘로 사라졌거나, 땅으로 꺼졌거나, 둘 중 하나가 확실했다. 도저히 종적을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토벌대는 전멸했고, 로라스가 이끌던 5마을에서의 게이트 공략대도 전멸했다고 봐야 했다.
영주 대리인 백작 부인이 자신들의 편인 이상 더는 거칠 게 없었다.
‘무엇보다 그 소영주가 베스타인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 큰 수확이지.’
당장은 필요 없는 정보였으나, 이런 옵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츠어질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를 장악하면 조직에서도 내 영향력이 높아질 터. 그 애송이 놈을 짓눌러 줘야 하는데.’
칠 인의 좌에 가장 늦게 들어왔지만, 놈의 확장세는 만만치 않았다.
물론 놈의 세력이 어떻든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이 없지만, 일정 부분 정보를 공유하는 이상 세력의 차이가 너무 나서는 곤란했다.
‘켄트라미우스. 그 시건방진 놈처럼 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천천히 움직인다.
츠어질은 그리 다짐했다.
* * *
“직접 말씀이십니까?”
“뭘 그리 놀라나?”
베스타인의 반문에 에르페유는 대답했다.
“그냥 저만 가도 충분합니다. 굳이 주군께서 직접 움직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매번 에르페유와 대립각을 세우는 헤르메스 역시 이번에는 그와 동조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주군께서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는 서로를 보며,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자 마음먹었다.
‘허허허.’
그리고 그런 둘을 보며 베스타인 공작은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앙숙이던 두 사람이 저렇게 의견을 같이할 정도로,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이 녀석들마저 그리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할지…….’
그리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일검도 받아 내지 못할 것들이 지금 누구의 건강을 걱정하느냔 말이다.
파라일 린 베스타인.
에렌을 넘어 제국. 제국을 넘어 세계. 그 어떤 곳에서 이 풀네임을 모르는 이가 있단 말인가?
이 이름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자가 자신 이외에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 이름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주어진 모든 의무에 충실한 지도 수십 년.
나이가 들었고, 기력이 예전만 못한 걸 체감하고는 있다. 하지만 자신은 파라일 린 베스타인.
“마물들이 이 정도로 늘어난다는 건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 감당할 수 있을 때 전력을 다해 뿌리 뽑는 것도 나쁘지 않아.”
베스타인이 그리 입을 열자, 눈치 없는 에르페유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제가 뿌리를 뽑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여기 에렌에 계시면! 으헉!”
말을 하다 말고 뭔가에 깜짝 놀라며 소리를 내는 에르페유.
순간 모인 이들은 뭔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당사자인 에르페유는 그냥 입을 다물 뿐이었다.
베스타인 공작은 고개를 돌려 헤르메스를 보며 물었다.
“자네 생각도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보는가?”
“주군의 뜻에 달려 있지요. 필요하다 판단하시면 저는 뒤따를 뿐입니다.”
에르페유는 눈을 부릅뜨고, 헤르메스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눈치 빠른 헤르메스는 짧은 순간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말을 바꾼 것이다.
그녀는 슬쩍 베스타인 공작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별다른 포스는 느끼지 못했는데. 혹시 의지만으로도 포스가 실체화되는 것인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경지지만, 그 대상이 베스타인 공작이라면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젊은 사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떤 부대를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갓 서른이 되어 보일 정도의 젊은 사내. 에렌 최고회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젊었다.
공작이 물었다.
“부대 재편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하지만 뿌리를 뽑으시겠다는 건 토벌을 전 지역으로 확산하시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당연히 부대 편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네가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이 기회에 병력을 점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니.”
흐뭇한 표정으로 사내의 말에 호응해 주는 베스타인.
공작뿐만이 아니었다.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는 물론이고, 참석한 모든 이가 만족스럽고, 대견하다는 표정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린델 수 요르하.
베스타인 공작의 심복 중 심복이며, 에렌 15만 대군을 주물렀던 군사 아란데일의 아들이 바로 린델이었다.
아란데일이 그리 급사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던 터.
그 탓에 먼저 간 동료의 아들인 린델은 그들에게는 애틋한 존재였다.
공작부터 시작하여 날고뛴다는 인물들의 지원을 받아 린델은 초엘리트의 길을 걸었고, 서른이 갓 넘은 지금 최고회의에 참여가 가능한 지위까지 오른 것이다.
“일군단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린델의 대답에 베스타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과하다. 독립부대들만 소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린델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주군의 안전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현재 체계상으로 주군께서 에렌을 비우면 군단의 통솔권은 백작들에게 넘어갑니다.”
“이제 녀석들도 관여할 때가 되었지. 여태 잘해 온 것 같은데.”
“일군단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베스타인은 약간은 엄한 목소리를 말했다.
“온전한 책임과 의무를 가질 때도 되었다. 너무 많은 병력은 필요치 않다.”
베스타인은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를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에르페유 아이언 세터. 그리고 헤르메스의 마탑은 최고 중의 최고.”
두 사람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자, 공작은 계속 말했다.
“또한 여기 모인 이들 모두 한다면 하는 이들. 누가 감히 이들을 막겠느냐. 지나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단호한 공작의 말에 린델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단 하나 정도는 준비해야 할 텐데.’
수단 하니 생각나는 게 있어 그는 공작에게 다시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주군.”
“무슨?”
“북부 와카디아의 일입니다.”
“거기가 왜?”
“에듀, 로라스 부자가 마물을 토벌 중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근래 연락이 없긴 했다만, 실종?”
린델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영지를 비운 지 일 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물들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으음. 그 지역의 마물들은 항상 문제가 있었지. 그래서 치안에 문제가 생겼는가?”
“그건 아닙니다. 이젠 제국 전역에서 가장 마물이 적은 지역이 되었으니까요.”
“그럼 특별히 뭘 할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에듀가 잘해 왔다. 그리고 로라스가 어떤 아이인지 생각하면 특별히 걱정할 건 없다.”
“하지만 실종 기간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의외이긴 하지만 신경 쓸 거 없다.”
공작의 절대적인 믿음에 린델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와카디아가 무너지면 마물들은 에렌에서 직접 상대해야 한다.
‘내가 모르는 또 뭔가 있는가?’
로라스가 잘난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저리 확신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걱정하지 마. 로라스는…….”
베스타인은 에렌의 절대 권력자가 아닌 할아버지 미소를 지으며, 슬쩍 다시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를 쳐다봤다.
‘설마!’
마치 이 두 사람을 뛰어넘을 거라는 제스처, 최소한 맞먹을 거라는 그 신호에 린델은 의혹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린델의 의혹을 제거해 준 건 공작이 아닌 다른 이였다.
“녀석이라면! 충분하지요.”
입을 연 이는 에르페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