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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06화 (20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6)

3일째.

끊임없이 뻗은 길과 수많은 동굴 입구.

이 던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걷고,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7일째.

계속 걸었다.

그에 마물은 끊임없이 출현했다.

다행이다.

그거라도 나오지 않았다면 환장해 죽었을 것이다.

마물이란 존재가 오히려 희망을 심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이 매일 같은 광경만 보고 걷는다 생각해 보라. 마물은 그냥 선물이다.

* * *

“아쉽군요.”

마지막 남은 마물의 머리통을 깔끔하게 날리며 번천이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뭐가 말인가?”

옆에서 시그탑이 묻는 말에 번천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엄지손톱만 한 마정석을 내려다봤다.

크기도 작은 데다 색도 탁한 것이, 하급의 마정석이긴 하지만 마정석은 마정석. 번천 입장에서는 그것을 버린다는 게 아까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사들은 물론이고 시그탑마저도 마정석을 챙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챙기는 이는 드물었다. 지금은 희귀하게 튀어나오는 상급의 마정석이 아니면 저렇게 돌 취급을 당하는 판이었다.

“차라리 지금은 저만한 크기의 고기 조각이 더 낫겠지요.”

지금 번천의 속내가 모든 이의 속내.

일행은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10일째.

그래. 걷는 것도 문제없고, 덤비는 마물도 문제없다.

하지만 식량이 문제다.

수통의 물이 비어진 지도 나흘이 지났고, 건량은 어제 모두 나눠 먹었다.

12일째.

부상자가 발생했다.

* * *

“괜찮아?”

“끄떡없습니다. 그리고 면목 없습니다. 고작 저런 마물 따위에.”

특이하게 한 손 도끼 두 개를 쓰는 기사 지젤이 라이너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이 죽은 것인지, 경각심이 떨어진 것인지……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계속된 지젤의 말에 라이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긴 했으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감이 죽은 것도, 경각심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기력이 떨어진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먹고 마셔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일행은 생식 행위를 이틀째 하고 있지 못했다.

고작 이틀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 전 열흘 동안 역시 제대로 먹고 마신 게 아니었다.

‘으음!’

라이너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나흘 전 그 미끼라도 챙겼어야 했다.

일반적인 녹색 이끼가 아닌 습기가 거의 없는 황색빛을 띤 이끼이긴 했지만, 그래도 수분은 있었을 터. 그거라도 먹었어야 했다.

“지젤 경, 괜찮은가?”

그때 로라스가 다가오며 묻는 말에 라이너가 대답했다.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이거라도. 효과가 좋습니다.”

라이너는 로라스가 건네주는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받았다. 끈을 풀어 열어 보니 알싸한 향기가 올라왔다.

“뭔지는 모르지만, 피를 멈추는 데는 좋다고 하니.”

로라스의 말에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들어 손바닥에 털었다.

떨어지는 금빛 가루.

거의 반 이상 쏟아진 그걸 보며 지젤이 급히 말했다.

“너무 많습니다, 주군. 굉장히 귀해 보이는데.”

“자네보다 귀하지 않아.”

“주군…….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로라스는 생각했다.

‘사람은 제대로 본 게 맞는데…… 이걸 어찌 뚫고 나가야 할지는 모르겠군.’

강력한 포스로도 이 난관을 뚫고 나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마법이 먹히질 않으니…….’

그랬다면 최소 갈증은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을 제대로 익힌 자라면 수속성 마법의 1서클만 배워도 대기에 흩어져 있는 물의 기운을 뭉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목마름은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던전 진입 이틀째부터 마나가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조심했어야 했다.

‘공간 왜곡이 있는 지역. 마나는 혼돈치 않다는 게 증명된 셈인가?’

마나는 혼돈치 않으니, 혼돈된 공간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로라스는 그러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마나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다.

‘나도 기력이 떨어졌나 보군. 우선순위를 제대로 두지 못한 걸 보면.’

결국,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터였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자신도 사람인 이상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행이 사족 보행에…….

로라스는 주변에 널린 마물 사체를 집어 올렸다.

‘좀 우기면 소머리라고 해도 될 것 같고.’

소고기다. 소고기다. 소고기다.

로라스가 그렇게 주문 외듯 스스로를 세뇌할 때, 옆에 있던 시그탑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영주…… 설마 아니시지요?”

하지만 설마는 역시나가 되는 법.

“잘하면 먹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시그탑이 뭐라 하기도 전에 기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 외람되지만 절대 안 됩니다.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굶어 죽기 전에 독 때문에 죽을 겁니다.”

마물은 피는 물론이고 그 살덩이도 식육을 할 수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잡식을 하는 종족. 그리고 모든 생명체 중 가장 호기심 많은 종족이다.

몬스터를 식육화해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오며, 몬스터는 사람이 먹지 못한다는 결론을 냈다. 물론 몇 종류는 먹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몇몇 몬스터들은 그 독성이 약해 오래 삶으면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체질에 따라 마비, 설사, 복통 이런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마실 물조차 없는 상황.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많이는 아니고. 최소한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로라스의 말에 모두가 경악을 했다. 라이너마저도 조심스럽게 좋지 않은 방법이라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푸아아악!

로라스가 일단 소고기라 세뇌했던 마물의 앞다리를 잘라 냈다.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사람들의 동공이 커졌다.

그 다리에서 피가 아닌 기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치이이이!

그리고 마치 불에 타듯.

촤아아아아!

기름에 튀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투욱! 투욱!

바닥에 떨어지는 건 핏물 섞인 붉은 기름.

‘독기 따위 태우면 그만일 터.’

물로 삶아서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렇게 독을 일정 부분 뺀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로라스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고수는 돼야 시도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내공으로 만든 불꽃.

로라스는 몬스터의 육신에 그것을 피어 올렸다.

타타타타닥!

돼지고기가 열기에 팽창하여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까지 났을 때, 사람들은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법인가?’

순간 그렇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곧 마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가 아니라면 포스일 터인데, 저게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경지였던가?

시그탑과 번천마저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누군가 움직였다.

‘내가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냥 먹지 못하는 거라 생각해서인가?’

라이너는 똑같이 마물의 다리를 잘라 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았다.

치이익!

한 손이 아닌 두 손. 그리고 뭔가 다른 소리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지금 라이너가 비슷한 방법으로 마물을 태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그리고 그것을 본 로라스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라이너를 보았다.

무작정 포스를 고기에 주입하면 그냥 터져 나가지, 저렇게 타지 않는다. 마스터인 시그탑과 번천이 입을 벌릴 뿐, 따라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라이너는 정확히 자신처럼 고기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포스의 특질인가?’

이 세계에서 삼매진화를 보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건 아니다. 내력의 특질처럼 이곳에서도 포스의 특질이 엄연히 다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라이너의 특질이 내력과 비슷한 면이 있었지.’

실버 스워드 대회에서 그의 포스를 경험했던 것을 떠 올리며, 로라스는 부지런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터억!

그리고 되었다 싶을 때 그걸 바닥에 내려놓고는 난도질했다.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았고 보기에 흉한 것도 알았지만, 냄새는 웬만한 고기보다 훌륭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먹어 보고. 탈이 없으면 먹는 걸로.”

로라스는 살 조각 하나를 크게 잘라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귀한 진미를 맛보는 것처럼 눈까지 감으면서 씹던 로라스는 그것을 삼키며 말했다.

“먹고 죽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 태웠음에도 복부에 미미한 신호가 있긴 하지만, 텅 빈 배에 기름기가 들어가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중요한 건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

로라스는 시그탑과 번천을 쳐다봤다. 이쪽이 먼저 먹으라는 신호였다.

시그탑과 번천이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고, 뒤이어 모든 이들이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다 먹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복부의 미미한 신호로 인해 속도가 조금 더디긴 했지만, 그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 * *

30일째.

대체 이 안은 얼마나 큰 곳일까?

공간 왜곡이 일어나는 지역이니 그 크기라는 개념조차 없는 것일까?

일행들 모두 단단히 훈련된 무인이고, 던전 경험이 많은 자들도 다수.

지도를 그려 가고 있으나, 단 한 번도 중복된 길을 만나지 않았다. 그 말은 그저 한쪽 방향으로 쭉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사람들은 말수를 잃었고, 얼굴이 점점 거무룩해졌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마물 고기나 뜯어 먹다가 이렇게 평생 헤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들을 이끄는 두 리더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는 것이다.

로라스와 라이너는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당연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다.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도 아닌 포스로 마물의 독기를 날리는 절대적인 마스터라서 그런 것일까?

잡념을 버렸다.

오로지 두 사람의 말에만 귀 기울이고, 시선은 그들의 등만을 바라보였다.

그것만이 버티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50일째.

“우아하하하!!

“우히히히히! 음하하하핫!”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우아아아! 시원하다!”

“시원을 넘어 얼어 죽겠다!”

이걸 웅덩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호수라 불러야 할까?

거대한 크기의 수원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으며, 그 차가움은 마치 얼어붙기 직전인 폭포수와 같았다.

미친 던전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짜릿한 선물을 안겼다.

마물 고기와 이끼만으로 버틴 사람들에게 차가운 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진미와 같았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쉰다.”

사람들에게 로라스는 그리 명령하며 갑주를 벗을 것을 허락했다.

사람들은 시릴 듯이 차가운 물임에도 몸을 던졌다.

먹을 물조차 없는데, 씻는 물이 어디 있었을까. 물의 감촉이 뭔지 가물가물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찰나에 만난 거대한 수원은 그들을 어린아이처럼 날뛰게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로라스 역시 배를 하늘에 둔 자세로, 이미 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좋구나. 근데 이런 호수까지 있는 곳이라면…… 이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감당이 안 되는구나.’

게다가 정말 시간 왜곡까지 걸려 있다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다.

그걸 냉수의 짜릿함으로 치부하며 로라스는 물속에서 눈을 감았다.

‘최후의 수단을 쓰기 전에 길을 찾아야 할 텐데.’

그 수단은 너무 위험이 크다. 원래라면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다. 하지만 시간 왜곡의 공포는 로라스를 살짝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지금, 부모님을 뵈어야 했다.

천추의 한을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은 평생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모른 채로 살다 가실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으어어어!”

그러다 한편에서 기겁을 하는 외침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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