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4)
엉망이 된 황토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이트.
로라스는 게이트를 보며 생각했다.
‘하늘 산맥과 평야에서 나오는 게이트의 종류 자체가 다른 건가?’
금광으로 쓰고 있는 첫 번째 게이트와는 같은 모습이긴 했다.
다만 그 게이트의 크기가 작았고, 하늘 산맥의 황금빛과는 다르게 검붉은 빛이 돌았다.
‘크기에 비례하는 건가?’
웨이브를 일으켰지만, 첫 번째 게이트에 비하면 그 숫자가 적은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
계획대로 실전 훈련에 쓸 만한 상황에 로라스는 만족하기로 했다.
위기를 기회로.
이번 전쟁은 락을 그리고 와카디아 지역을 더더욱 단결시키게 만들 터였다.
일반 사람들은 락의 치안을 믿고 더더욱 생업에 종사할 것이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훈련의 가치를 믿고 말이다.
그렇게 게이트 염탐을 끝내고 로라스는 부대로 복귀했다.
적의 규모를 파악했고, 웨이브의 주기도 파악한 이상 크게 염려할 건 없었다.
정말 실전인 훈련을 실행할 뿐.
군의 움직임을 보며 로라스는 만족스러웠다.
특히 시그탑이 열정을 쏟고 있는 기사단의 위력은 더더욱 그랬다.
개개인으로 봤을 때는 기준에 못 미칠지 모르지만, 군軍이 왜 군인지 확실하게 보여 줄 정도의 조직력을 갖췄다.
기사단이 적진을 가르고, 보병들이 마무리한다.
지극히 정석적인 부대의 움직임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막강한 효율을 자랑했다.
가끔 흥분하거나 또는 운이 너무 없어서 부상을 입는 병사들이 있었을 뿐.
로라스와 간부들은 그런 부분은 감수하기로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이라는 것을 병사 하나하나가 각인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덜 죽는다.
그렇게 일곱 번의 몬스터 웨이브를 겪은 부대는 마침내 제5마을까지 도착했다.
마을은 엉망이었다.
5마을 소속이면서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눈빛에는 침울함이 가득했다. 그간 힘들게 쌓아 올렸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영주님께 건의하여 기존의 세금 면제는 물론이고, 복구 전까지 필요한 모든 것들은 부담토록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보상 받기에 부족한 것을 알지만, 인명 피해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로라스는 그런 그들을 위로하고는 멀지 않은 곳의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여유가 있다면.’
아예 훈련을 목적으로 한 게이트로 쓰겠지만, 지금의 락은 아직 감당하기 버거운 계획이다.
여하간 목적한 것을 이뤘으니 게이트를 닫아야 할 때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소영주.”
“경은 부대를…….”
“제가 가 보고 싶습니다.”
시그탑이 재빠르게 하는 말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위험도 없었고, 시그탑이 저렇게 나선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라스는 그렇게 시그탑, 번천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은근 기대는 했는데 말입니다.”
번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산맥의 게이트처럼 뭔가 건질 수 있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그건 괜찮으니 그냥 멀쩡한 동굴이었으면 좋겠다.”
바닥은 질벅한 진흙 덩어리, 습한 공기. 무엇보다 콧속을 찌르는 악취는 너무나도 고약했다.
통로의 크기라도 컸으면 그래도 좀 낫겠지만, 길마저도 좁디좁아 이러다가 오리걸음을 하거나, 두 손바닥으로 기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황이 열악해지지는 않았다. 다른 것은 모두 그대로지만 말이다.
그렇게 걸을 때 시그탑이 로라스를 불렀다.
“소영주님.”
“말씀하십시오, 시그탑 경.”
“근래…… 전신이 터져 나갈 듯한 느낌이 듭니다. 특히 소영주께서 전수하셨던 내근을 단련할 때 심해집니다. 혹시 영문을 아시는지요?”
시그탑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로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축하드립니다, 시그탑 경.”
“네?”
“터져 나갈 듯한 느낌이 단전이나 가슴 쪽이라면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나, 전신에 그런 느낌이 충만하다는 건 좋은 징조입니다. 수련을 정말 고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특별한 건……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가장 쉽지 않은 거 아니겠습니까? 게으르지 않다는 것. 그냥 평상시대로 지내면 그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부족감에 불안하실 겁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순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현상. 소위 그걸 깨달음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생각만으로 뭔가를 얻었다면 참으로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로라스의 답변에 시그탑은 물론이고, 번천도 귀를 종긋 세웠다.
평상시 주군은 말로 뭘 알려 주는 법이 없었다. 있었어도 대부분 행동이 수반되었다. 말은 아끼고, 행동이 먼저라는 식이었다.
이렇게 뭔가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
로라스가 계속 말했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옳은 방향으로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 강해지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순간 옳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니까요.”
동굴을 은은히 밝히던 빛이 사라지자, 로라스는 빛 구슬을 허공으로 띄워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옳은 방향으로 가다 보며 깨달음이라 불리는 순간이 오긴 합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준비가 되었기에 자각한 것뿐입니다.”
“…….”
“포스가 우선입니까? 육체가 우선입니까?”
그리고 이어진 질문에 시그탑과 번천은 마치 서로의 눈치를 보듯이 쳐다봤다.
로라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둘을 계속 쳐다봤고.
“의미 없는 질문 같습니다. 서로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그탑의 대답에 번천도 거들었다.
“같이해야지요. 포스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육체가 탄탄해야 하고, 육체로 커버되지 않는 부분은 포스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누가 답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처럼 두 개는 늘 같이 있는데, 하나만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지.”
시그탑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겪고 있는 현상도 그런 것입니까?”
“포스를 담는 육체. 그 그릇이 변하기 시작한 겁니다. 같이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시그탑 경. 아버님이 더 이상 자신이 위라고 주장하지 못하시겠군요.”
평소 시그탑의 대련 상대는 에듀였다.
시그탑의 전력이 담긴 움직임을 받아 줄 상대가 락에서는 로라스와 에듀뿐. 에듀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매우 많은 대련을 해 왔다.
사실 둘 모두에게 로라스가 최적의 상대이긴 했으나, 두 사람 입장에서 로라스에게 지도 대련을 요청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시그탑도 농을 농으로 받았다.
“제가 원래 주군보다 승률이 조금 더 높았습니다. 비슷하다는 건 주군의 주장이셨지요.”
“하하하. 아버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던데요.”
오고 가는 농에, 열악한 환경이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진입하기 시작했다.
“크허어어엉!”
어느 정도나 들어갔을까?
앞쪽 어둠 멀리에서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셋 모두 몬스터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몸 하나 피신시키는 데 문제는 없기 때문이었다.
공간이 협소한 문제가 있지만, 그건 장점도 되었다. 사방팔방 마물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로라스는 어둠 속으로 빛 구슬을 쏘아 내었다. 그리고 한참을 쏘아져 나가던 빛 구슬은 그것들을 비추었다.
“크허어어엉!”
대체 뭐라 이야기해야 저 형태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모두 형태가 다르니 설명할 수 있어도 무의미했다.
로라스는 광역마법으로 바로 마물들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폭발로 인해 이 통로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좀 역겹지만.”
그 후는 당연한 수순이 벌어졌다.
세 명의 마스터들은 학살에 가깝게 마물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어려운 건 없었다. 다만 몬스터들의 비명 때문에 귀가 아픈 게 가장 거슬렸을 뿐.
그렇게 일행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마물들을 처리했다.
“저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방팔방 수많은 동굴 입구를 지닌 공터에서 게이트의 핵을 찾았다.
까아아앙!
시그탑의 검이 핵을 강타했고, 핵이 깨지는 소리가 강렬하게 동굴에 퍼졌다.
마정석에 가까운 핵을 잘라 내면 이제 게이트는 닫힌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우르르르르르.
게이트가 사라지는 것 대신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굉음과 함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핵이 아니었던가?’
로라스로서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게이트의 부피와 질량이 어느 정도나 될지 모르는 상태다. 무너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입구로!”
로라스는 곧바로 소리치며 투명한 막을 전개해 냈다.
우르르르르르르.
계속해서 지축은 흔들렸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먼지가 시야를 완벽하게 가렸고, 밀도가 높으니 숨 쉬는 것조차 편치 않았다. 축축한 진흙바닥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개천지보 삼보. 정개안정??眼睛.
가린 시야를 열기 위해 로라스는 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통로를 찾아 곧게 검을 내밀었다.
부우우웅!
강렬한 풍압이 검에서 일어섰고, 풍압은 그대로 쏘아졌다. 아니 뻗어 나갔다는 표현이 옳았을 것이다.
먼지의 대기라는 벽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방위가 들어왔던 곳과는 달랐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쿠쿠쿠쿵!
천장에서 떨어지던 흙먼지는 이내 돌조각이 되었고, 그 조각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리고 천장이 빠른 속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 나가는 로라스 등의 속도가 빨라지던 순간.
“하앗!”
통로를 벗어나 또 하나의 공터에 도착한 로라스가 그대로 달려왔던 방향으로 다시 검을 날렸다.
퍼어어어어어엉!
서로를 향해 뻗어 가는 엄청난 힘이 충돌했고, 통로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공터에 자욱한 흙먼지가 점점 가라앉았고, 흙투성이가 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설마 게이트가 닫힌 건 아니겠지요?”
“게이트라면 그냥 소멸이야. 우린 게이트가 있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시그탑의 대답에 번천이 다시 물었다.
“혹시 아까 그게 핵이 아니었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군. 핵이었어. 이런 마나를 품은 마정석은 없으니까.”
시그탑이 언제 챙겼는지 깨진 핵의 조각을 보이며 하는 말에, 로라스는 호흡을 크게 하며 말했다.
“핵이 한 개가 아닌 것 같군.”
시그탑과 번천이 로라스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저건…….”
시그탑이 파괴했던 것과 완벽하게 같은 크기와 모양을 지닌 핵이 돌기둥에 처박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번엔 저걸 파괴하면 여기가 무너진다는 건가?”
로라스가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이 지나쳤던 통로는 무너졌지만, 동굴 입구처럼 생긴 굴은 많았다. 아까와 비슷한 공터이고.
‘미로에서 길을 잃은 처지가 된 건가?’
그렇게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잠시 쉬는 게 좋겠군.”
흙먼지가 가라앉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기는 탁하다. 빛 구슬 자체가 뿌옇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로라스는 운기조식을 하고 싶었지만, 흙먼지를 마시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먼지의 영향은 크게 없겠지만, 왠지 진기가 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호흡을 고르며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이쪽입니다!”
굴들 중 하나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굴들이 있었고, 음성마저 울렸다. 하지만 로라스는 그중 소리가 나는 굴을 찾아내고 앞에서 기다렸다.
긴장된 표정으로 시그탑과 번천이 옆에 나란히 섰다.
굴에서 사람의 형태가 보인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