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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02화 (20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2)

―마나에 반응하는 겁니다. 그리고 활성화되면 그때 부터 몬스터들이 쏟아집니다.

한창때 주군인 로라스보다 에르자일을 보좌했던 일이 많았던 번천이다.

확실했다. 저건 게이트였다.

“모두 마을로! 마을로 빨리!”

사실 제대로 게이트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건 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들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저 게이트로 시작한다는 것을.

번천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음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따를 만큼의 영향력이 있음을.

그렇게 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마을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분들은 움직이면서도 쓸 수 있는 마법트랩을 설치하십시오!”

지금 여기 있는 마법사들의 마법트랩이래 봤자 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물 속성만 파고든 자신보다 못한 실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터.

다행히도 마법사들은 당황하면서도 번천의 말을 따랐다. 가장 마탑에 자주 방문하고, 마탑주인 에르자일이 총애하는 기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번천 역시 제일 후미에서 뒤의 상황을 보며 달려 나갈 때였다.

“크아아악!”

뒤에서 괴성이 들렸고 게이트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마뱀이 거대화되면 딱 저 모습일까?

다른 게 있다면, 녹색이 아닌 검갈색을 띠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번천은 몸서리가 쳐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이렇게 순서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벌집에서 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는 도마뱀들은 새로운 환경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그 위로 새로 쏟아져 나온 도마뱀들이 덮쳤다.

상자에 수백 마리의 뱀을 가둔 것처럼 도마뱀들은 꿈틀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오는 느낌.

그렇게 그들은 뒤엉켜 있는 가운데 용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천과 사람들이 달려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두두두두두.

제일 후미에서 뒤를 살피던 번천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사족보행형 몬스터치고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그 많은 것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눈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그리고 앞쪽에서 기겁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번천은 혹시 앞에서도 몬스터들이 나타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없었다. 달려가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고, 도마뱀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몬스터다! 몬스터야!”

“으아아아악!”

분명 앞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에 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멀쩡히 달리던 사람들은 다리가 꼬여 넘어졌고, 넘어진 이들에 걸려 또 넘어지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꼼짝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아악!”

“살려 줘!”

공포는 곧바로 사람들 사이로 전염되었고, 이내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는 것 같았다.

“일어나 달려!”

그 순간 번천은 목소리에 포스를 실어 소리쳤다.

“앉아서 뒈지고 싶은가!”

번천은 멀쩡한 성인 남성들도 공포에 허우적거리는 걸 보며 순간 짜증이 났다.

락의 원주민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오히려 싸우자고 나설 이도 있었을 터였다.

‘이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몬스터들을 보고 소름이 돋았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야 충분히 저럴 만도 했다.

“일어나!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 달리라고!”

포스가 실린 목소리. 그리고 그의 손에 달린 푸른 기운의 검을 보며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시간을 손해 본 건 사실. 몬스터들이 불과 이백여 미터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도마뱀 몬스터들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중 달리는 속도가 느린 이들은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뒤도 보지 말고 달려!”

번천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린 건 그때였다.

“번천 경!”

몇몇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란히 서려 했지만, 번천은 그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달리라고 했다!”

“혼자선 무리입니다.”

“내가 무슨 영웅이라고! 안 죽어! 빠져나갈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다. 그러니 달려라!”

주저하던 병사들에 번천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병사 하나가 들고 있던 창을 뺏어 들고는 말을 이었다.

“봉화가 올라갔으니 락에서 곧 원군이 파견될 거야. 그때까지 문이 열려서는 안 된다. 버티는 거다.”

“하지만…….”

병사 중 하나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5마을은 가장 늦게 건설된 마을이다.

방벽을 세웠다 하나 공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쫓아오고 있는 중대형 마물들이 방벽으로 돌격하면, 문이 뚫리기 전에 방벽이 먼저 무너질지도 몰랐다.

특히 아직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동쪽 방벽은 더욱 그랬다.

그걸 번천도 모를 리 없을 터.

“살아남으십시오!”

번천은 씩 웃었다.

살아남으라는 인사는 옛날 락 자경단의 인사법.

“살아남아라.”

번천은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고는 심호흡을 하며, 검집에 검을 꽂고 창을 움켜쥐었다.

검이 훨씬 익숙한 편이었으나, 창의 숙련도도 상당히 높았다. 락의 훈련의 기본은 검이 아닌 창이었기 때문이었고, 개인 훈련할 때도 창술을 빼먹지 않았던 덕이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을 보며 번천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오너라!’

저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 정도는 있었다.

죽음?

아까 한 말은 그냥 멋져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따위 도마뱀들에게 죽으면 그간 해 온 고련이 너무나도 억울하지 않겠는가?

물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도마뱀들의 숫자, 그리고 체격에서 나오는 위력을 감안하면 방심해서는 안 됐다.

발을 옮겼다.

적의 숫자가 많을 때는 그냥 서 있어서는 안 된다. 금방 포위당하고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 이상 타격을 허락할 터.

“하아아앗!”

기합과 함께 첫 몬스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할 때 제일 중요한 건 한 번의 공격으로 최소한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는 것이다.

퍼어어억!

그래야 전면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휘이이이잉!

창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래야 다음 공격을 위한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다.

앞으로, 옆으로 그리고 다시 뒤로.

수많은 도마뱀들 사이에서, 번천은 자신이 밟을 다음 공간을 확실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타인이 보았다면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을 가질 움직임.

단 한 번이라도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덩치들이 금세 번천의 주변을 장악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번천은 그것에 대한 공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도마뱀 각 개체와 자신의 능력 차이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체력만 허락한다면!

몬스터들이 지금의 수배가 되어도 자신은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전략 무기로 취급당하는 포스 마스터의 위력이다.

인간들이 적이라면 목숨으로 마스터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전술적으로 그의 공간을 미리 점하여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다행히 이 덩어리들은 그런 지능을 갖지 못했다.

‘할 수 있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번천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않는다.

전장에서 종종 그런 실수를 하곤 한다. 진열을 갖추고 잘 버틸 수 있음에도 피에, 그리고 죽음에 흥분하여 진열을 벗어나 달려드는 그런 실수.

전장에서 그 실수는 곧 죽음. 번천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 내에서 착실하게 자신이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움직임을 보였다.

덕분일까?

처음에는 눈앞에, 그리고 주변에서 달려드는 덩어리만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가 넓어졌다.

자신이 확보할 다음 공간뿐만 아니라 그다음, 다음, 최소 세 수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적응이 되니 이제 눈이 닿는 그대로 모든 것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번천. 너는 테라와는 다른 장점을 가져가는 게 좋아.

불현듯 로라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테라가 집요한 거 알지? 그건 일대일 전투에서 엄청난 재능이야.

분명 테라보다 자신의 경험, 포스가 모두 위라 생각했지만, 대련에서 그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스만 개화하면 그 녀석을 상대할 때는 나도 까다로울 정도가 될 거야.

그때 로라스는 자신보다 테라를 칭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큰 건 네가 더 잘 봐. 그런데 너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라.

그리고 그 말이 그냥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다.

‘보이잖아. 전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활용한다는 것이 뭔지 느껴졌다.

‘주군이 말씀하신 게 이거였어!’

그리고 그것을 자각했을 때, 번천은 하나의 벽이 무너짐을 느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흐아아앗!”

번천은 보여 주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나아가지는 움직임. 그에 맞춰지는 창.

터어어엉!

새로운 깨달음에 흥분했던 것인가?

지나치게 힘을 준 창이 회수되기도 전에 몸통이 부서져 나갔다.

자각하지 못했다면 당황했을 것이나, 지금은 차분하게 검을 뽑았다.

다수와의 전투에서는 사정거리가 긴 창이 유리하지만, 검은 검만의 장점이 있었다. 사정거리는 짧아졌지만 위력은 배가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검은 그의 주 무기.

그야말로 날아다니듯 움직이는 번천.

“쿠오오오오!”

하지만 이 덩어리들의 숫자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쓰러진 덩어리만으로도 이미 작은 더미가 여러 군데. 이러다가는 덩어리의 벽에 막힐 판이었다.

“후우우!”

다행인 점은 포스는 여전하다는 것.

로라스도 천운을 타고나 말도 안 되는 양의 포스를 지녔다고 했던 번천이다. 그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움직임을 지속해 나갔다.

“으아아아!”

나름 몬스터 웨이브의 기세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나무로 만든 방벽을 에워싸고 있었다. 방벽 위로 사내들이 창을 찌르고 돌덩어리를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나마 더 이상 패닉에 빠지지 않고 저리 버텨 주는 게 다행.

‘오래 버티지는 못해!’

락이라면 돌 벽이라 이런 마물들의 공격에도 거뜬하겠지만, 개척 마을은 아니다. 목책의 방호력은 한계가 있었고.

‘부담을 줄여 줘야 해!’

번천은 몬스터들과 한 방향으로 달려 방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곳에 몰려 있는 도마뱀 사이로 끼어들었다.

“쿠오오오오!”

“우아아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의 괴성 사이로 번천은 긴 기합을 질렀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도마뱀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길 바라서였을 뿐이지만, 그가 예측하지 못한 효과가 있었다.

“번천 경이다!”

“번천 경이 왔다!”

목책 위로 환호성이 울렸다.

번천 스스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없다 여겼을지 모르지만, 락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해 도왔다. 그뿐인가?

스스로 자신을 얕보지만 최소한 무력에서만큼은 번천을 능가하는 사람은 드물다. 강자가 우글거리는 이 락에서 말이다.

특히나 용병이었다가 그 경지에 오른 번천은 일반병들에게는 실질적인 롤 모델.

영주인 에듀, 소영주인 로라스 또 기사들은 마치 하늘에 있는 구름같이 느껴졌지만, 번천은 히죽거리며 농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현실에 있는 사람.

“우아아!”

번천이 아슬아슬해 보이기는 하지만 거침없이 몬스터들을 베는 것을 보니 사기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지속했을까?

“후우우욱!”

끊임없이 솟아날 듯한 포스가 끊기기 시작했다.

번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변 마물들의 숫자가 이제 눈에 띄게 줄어 있는 상황이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맞다면 두 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올 터.

지금 도마뱀들보다 약한 놈들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더 강한 놈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최소한 이곳의 몬스터들은 마무리해야 했다.

번천은 있는 포스, 없는 포스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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