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6)
“착한 분들이다. 락에 많은 걸 도와주시는 분들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해피랜드라는 종교가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그날 그 건방진 언행에 번천이 날뛰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조치를 하려고 했어도 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락에서 백작님을 막을 수 있는 건 영주님과 모친뿐이시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한 기세에 놀라 물러나는 꼴을 보니 내가 나설 틈이 없었다.
“오면서 소란이 있었다고.”
그새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는가?
“이해해라. 사제분들이 아직 널 몰라서 그런 것 같으니.”
이 일로 어머니와 어떠한 이야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고향으로 돌아왔고, 곁에 있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번천 경이 화가 많이 났다 들었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님이 이리 말씀하셨으니 그는 트러블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번천 경이 사람은 좋지만, 가끔 불같아서 걱정했다.”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를 보니 마냥 좋아진다. 해피랜드에 관한 내용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기분이다.
‘어차피 아델리나가 돌아오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믿는 구석도 있고.
“그런데 락에 돌아오셨는데도 여전히 야위어 보이십니다. 드레고레는 꾸준히 복용하고 계시지요?”
“그럼. 에르자일이 좋은 거라고 꼬박꼬박 시간에 맞춰 챙겨 주는구나.”
어머니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물으셨다.
“당분간은 바쁘지?”
“돌아왔으니 이것저것 확인은 해야 해서. 하지만 매일 이 티타임은 빼먹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약속드릴게요.”
“그래 준다면야 이 어미는 기쁘지. 다 끝나면 같이 신전도 가 보자꾸나. 대사제님의 설교에 좋은 말들이 많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티타임을 끝냈다.
그게 뭐 특별한 일이겠냐만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리 좋아하시니 정말 빼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응접실을 나오니 번천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주군.”
“왜 들어오지 않고?”
“아닙니다.”
오랜만에 락에 돌아와서일까? 아니면 정식 기사 서임을 받아서일까?
락이 군도 아니고, 하물며 전쟁 상황도 아닌데 지나치게 군기가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집에 온 거야.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제 일은…….”
어머님의 걱정을 전해 드렸다.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처신해야 할지는 알 것이다.
“일단 영지군과 자경대부터 돌아보자.”
“자경대는 반년 전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응?”
“예산이 확보된 이후로 원하는 이는 전부 정규병으로 전환되었다고 합니다.”
“아! 그랬지.”
예전에야 돈이 없어 금광 경비와 수송, 영지의 치안에 주민들이 봉사 개념이 강했으나, 예산이 되니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렌드 경과 드리프 경은 다 만나 봤나?”
“네. 도착하자마자 다 인사드렸습니다.”
“나랑 같이 움직이지. 어차피 나도 봐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주군.”
그냥 한 말인데 깍듯이 사과하는 번천.
“부담 되는 건가?”
“네?”
“기사, 왜 그래? 너무 경직돼 있잖아. 다른 곳도 아닌 락에서 말이야. 여기서 너를 싫어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래?”
“죄송합니다!”
다시 사과하는 걸 보며 깨닫는 게 있었다.
내가 너무 재촉하는 건지 모르겠다. 몇 년이나 락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그다. 나름 자신도 계획이라는 게 있을 텐데.
‘게다가 그 마법사 놈도 잡지 못했고.’
어떻게든 놈을 잡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조우할 기회가 있어도 쉽지는 않은 문제다.
그만한 경지의 마법사가 도망치고자 마음먹으면, 잡는다는 건 쉽지 않은 문제다.
무인이라면 쫓아가서라도 잡는데, 마법에는 귀환 주문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번천에게 시간은 많다고, 그리고 직접 복수하려면 시간도 걸릴 거라 말해 주려다 말았다. 더 부담을 느끼면 곤란할 테니까. 기다려 주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연병장으로 향했다.
* * *
“좌로!”
힘찬 목소리에 백여 명의 청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에 일제히 창을 내밀었다.
“들고 찔러!”
“하앗!”
“하아앗!”
순식간에 방패가 들리고 그 뒤로 창이 기계적 느낌으로 튀어 나왔다.
“밥 못 먹었냐? 기합이 그렇게밖에 안 나와? 힘찬 기합은 몸도 강해지게 만든다는 발란스 아저씨의 말을 잊었어?”
남들이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움직임이었으나, 청년들 앞에서 소리치는 더데이의 표정은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먹을 것도, 잘 것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내 말이 틀려?”
“…….”
“우리가 잘해야, 그래서 그 쓸모를 인정받아야 해! 그래야 다음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올 수 있어.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돼!”
더데이의 핀잔에도 청년들은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감히 가질 수가 없었다.
더데이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지옥 같았던, 하지만 그게 지옥이란 것도 잘 몰라 그저 힘들다고 울었던 옛날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나마 자신들은 운이 좋았다.
당시 뒷골목의 패자였던 고스트에서 자신들을 거둬들였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배는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외국어를 비롯한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쳐 주고, 저마다 원하는 기술을 배울 수가 있었다.
이건 분명 주변의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행운이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하루 먹을 걸 구하기 위해서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자신들은 먹고 자는 데 전혀 문제가 없고, 남은 시간에 뭔가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
정확히 하자. 그건 정말 꿈에서나 생각하는 행운이었다.
자신 이후로도 계속해서 아이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들로 인해 자신들의 몫을 뺏길 것 같아 싫어했다. 하지만 대우는 변함이 없었고, 아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깨달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혈육 하나 없는 자신들에게 혈육 같은 이들이 생겼다.
그렇게 형제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시 한 번 행복해했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받아 줄 수 있었으니까.
그 많은 형제들 중 자신들은 직업군인이 되길 원했다.
이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힘을 갖추는 법을 알려 주고, 가족을 만들 수 있게 한 사람.
로라스 백작.
그분의 밑에서 일하는데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락으로 가기를 결정했다.
잘한 선택이었다.
락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뒷골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예, 굶주려 쓰러진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활기찼고, 밤에는 술 한 잔으로 피로를 씻으려는 사람들이 오갔다.
자신들의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에렌 훈련소에서 굶주리지는 않았다 하나, 배급이 풍족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하얗고 부드러운 빵과 고기가 매일 나왔다.
욕심이 생겼다.
자신들은 로라스 백작의 은혜로 여기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에렌에 남겨진 동생들은 많았다.
우리가 잘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동생들도 전부 여기로 데려올 수 있다.
가족을 위해서 무엇을 못할 것인가?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일단은 이곳 책임자라는 기사 브렌드 경의 눈에 먼저 들어야 했다.
평상시보다 더 격렬하게 창과 방패를 움직였고, 더 절도 있는 모습을 보였다.
에렌에서는 약간의 느슨함이 있었으나, 이곳에서 그런 여유는 없었다. 무조건 잘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 했다.
“다시 들어!”
“하아앗!”
“우측.”
더데이의 외침에 청년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하고 있는데 뭐라 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청년들을 보며 중얼거리는 이가 있었다.
‘소영주께서는 어디서 저린 이들을 데려온 것이지?’
그는 바로 락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브렌드였다.
렌과 상단이 내려온 청년들.
사실 그의 눈에는 아직 앳된 티를 벗어 내지 못한 소년들이었지만, 실력은 그렇지가 않았다.
뭐든 적극적으로 했고, 기본적인 창술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무엇보다 협동성을 극도로 요구하는 제식훈련은 락이 아닌 제국 어디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래서 궁금해진 것이다.
소영주가 이런 아이들을 갑자기 어디서 데려왔는지가 말이다.
‘열심히 해도 너무 열심히 하니. 저러다가 몸을 상할 텐데.’
겉보기에는 다 자란 체격이나 또 모른다. 아직 성장 여지가 있는 소년이 있을지는.
그것을 컨트롤해 주고 싶은데 나설 틈이 없었다.
지금도 보라.
아침에 가르쳐 준 기본 중갑보병대의 기본 전술을 오후에 해내고 있었다.
흠집 잡을 것도 없고, 열심히 하는 애들에게 열심히 하지 말랄 수도 없고. 곤란한 마음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거지? 소영주는 시간이 없었을 텐데.’
이들의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할 때였다.
“브렌드 대장님. 소영주님께서 대연병장에 오셨습니다.”
“소영주께서?”
브렌드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여기도 변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영지 공터에 천막 막사 몇 개 세운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번듯한 건물에 돌로 바닥을 만든 곳도 있었다.
“부대 차렷!”
기다리고 있던 브렌드가 날 보며 크게 소리쳤다.
“로라스 백작님에게 경롓!”
“충!”
무구를 제대로 갖춘 삼백의 병사들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단 한 명도 시간의 오차가 없다. 말 그대로 정확하게 같이 창을 내밀며 손을 올렸다.
솔직히 낯이 좀 간지럽다. 하지만 일 년여 만의 귀환.
특별히 준비했는지, 아니면 평상시 훈련의 결과였는지는 모르지만, 정식으로 이런 예를 보인 이상 나도 제대로 자세를 잡아야 할 것 같다.
마주 손을 올려 주며 병사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반 이상은 아는 사람들.
숫자는 적지만 그 어떤 부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질 않는 최정예병들.
뭔가 뿌듯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도 살짝 했다. 잘 드는 칼이 손에 들어오면 써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 칼은 남에게 덤비지 말라고 위협해야 하는 용도 이상으로 쓰지는 말아야 한다.
손을 내리고 활짝 웃어 보였다.
근엄, 진지 같은 건 락의 원주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쉬어!”
브렌드 경의 말이 떠나기 무섭게 달려왔다.
“소영주님.”
“훨씬 더 늠름해지셨습니다.”
“백작님이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들의 축하 인사에 일일이 대답을 하고는 브렌드 경과도 인사를 나눴다.
“이리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브렌드 경.”
“축하드립니다, 소영주님.”
그렇게 브렌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락의 병력을 통솔하는 그인 만큼 치안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래 몬스터들이 많이 늘어났습니까? 오면서 몇몇 영지에 난리가 났던데요.”
“그렇지 않아도 영주님과 토벌대를 다시 꾸리려 하고 있습니다.”
“락도 많이 늘어났습니까? 샤이한 일족이 가만있지는 않았을 텐데요.”
산맥의 치안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화되어 있었다. 샤이한의 일족은 락의 충분한 지원을 받으면서 그 세를 확장 중이었다.
몬스터들과의 충돌은 당연히 벌어질 일. 그 덕분에 내가 크라운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산맥의 치안은 평지 다른 영지보다 오히려 안정화되어 있었다.
“게이트가 생겼나 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락에서 다른 영지를 지원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고요.”
게이트 이야기가 나오니 절로 생각나는 단어가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브렌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