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5)
‘으음!’
고작 일 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와카디아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사람이다.
장이라도 열리지 않으면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상시로 여는 가게가 늘어나고, 지역민이 아닌 외부인이 늘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외부인의 구분은 옷만으로도 판단이 된다.
북부라는 이름이 준 영향인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옷은 두텁다. 지역민보다 훨씬 말이다.
여하간 사람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니까.
‘건물의 간격도 좁아지는 것 같고. 렌이 좋아라 하겠군.’
인구의 유입은 영지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옛날 땅의 헐값에 가까웠던 토지를 가장 많이 매입했던 건 렌의 상단이었으니까.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그리고 필요도 없었다.
그게 ‘투자’였고, 렌이 영지에 봉사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이득은 가져가야 한다. 여기에 엄청난 자산, 그게 바로 어디로 움직이지 않는 땅이라면, 그 가치를 더 올리려 노력할 테니까.
무엇보다 가장 이득은…….
‘우리 가문이지.’
와카디아의 대영주.
또 영지전을 통해 각 영지의 토지를 배상금으로 받아 실제적인 대지주.
‘아직 멀었다.’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는 아니겠군.
이제는 속도 조절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돈, 권력 이런 걸 원했다면 크라운이나 에렌에 남아 있었을 터.
목적성을 잃으면 안 된다.
두 분의 행복, 그분들의 아들로 평범하고, 행복하게.
물론 내가 평범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안다. 노력해 봐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의지대로 행한다는 건 늘 쉬운 일은 아니지.’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마음이 느슨해진다. 게다가 이제는 시스템화되어 알아서 번영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느긋해지는 가운데 싱숭생숭하다고 할까?
“번천, 에르자일, 좀 걷자.”
“왜? 무슨 일 있어?”
에르자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좀 둘러보려고. 아니, 날도 저물기 시작하는데 하루 머무르는 것도 좋겠다.”
그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봤다.
특별한 건 없었다. 활기찬 마을을 확인하니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자경단이나 병사들의 숫자가 의외로 많은 것 같은데.”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느긋해서 몰랐지만, 마을을 둘러보니 그렇다. 특히 성벽이라 불릴 만한 것이 아닌 방책이긴 했지만, 그것을 주변으로 경계병이 많았다.
번천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상합니다. 외부인을 제외한 순수 영지민들은 천여 명.”
자경단 및 병사들은 거의 백이 넘어간다. 이 정도면 성인 남성들의 반수는 경계에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으니 활기와 긴장감이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아무래도 영주를 만나 봐야 할 듯싶었다.
* * *
“로라스 백작님, 어떻게 여기에!”
이 영지의 영주인 콜라벨 남작이 깜짝 놀라며 맞이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리 방문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콜라벨 남작님.”
작위는 내가 위이지만, 소영주일 때부터 봐 왔던 사람들이니 쉽게 대할 수는 없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방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것을요.”
기꺼운 듯 잘 정돈된 수염을 만지며 좋아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어려운 건 없으십니까?”
“어려운 게 있을 리 있겠습니까? 얼마 전 에듀 백작님이 복귀하신 뒤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근래 우리에게 적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와카디아는 또 하나의 에렌입니다. 모두 에듀 백작님의 영도하에 똘똘 뭉쳐 있으니까요.”
“그러면 왜? 곧 추수 기간 아닙니까? 농지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왜 다 경계를 하는지 의아해서 말입니다.”
“아! 별건 아닙니다.”
콜라벨 남작은 손사래를 치더니 말을 이었다.
“근래 평야 쪽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몬스터들이요? 맹수가 아니라?”
“네. 몬스터들이 종종 몰려나와서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대영주님께서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지침을 내리셔서.”
“왜인지는 파악하셨습니까?”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영지들과 토벌대를 만들어서 근처를 정리했는데도 끊임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몬스터들과 맹수들의 영역 다툼이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몬스터들과 맹수들이라…….”
“의아하시죠? 맹수들에 밀리는 몬스터라는 게.”
말마따나 의아하긴 하다.
메타린 평야의 맹수들이 다른 맹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을 밀어낼 정도라는 게 말이다.
“다릅니다, 정말. 일단 메타린의 맹수들은 다른 곳의 맹수들과 덩치부터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50프로 이상 큽니다. 게다가 지능도 뛰어납니다.”
콜라벨 남작은 말을 하면서도 뭐가 신이 난 듯했다.
“오죽하면 경력이 아무리 많은 사냥꾼들도 평야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겠습니까? 전설이긴 하지만 옛날 한 왕국이 평야를 농지로 개발하려다가 박살 나기도 했습니다. 그 여파로 왕국은 멸망했고요.”
“짐승들이 한 나라의 군대를 상대했단 말이지요?”
“그러니 전설이지요. 아니, 사실 전설은 아니지요. 상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역사서에 몇 줄의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거대 몬스터들이 없나 보군요.”
아무리 덩치 큰 맹수라 하더라도 오우거급의 거대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콜라벨은 고개를 저었다.
“웬걸요. 오우거에 자이언트 앤트까지 있었지요. 락에 계셨으니 자이언트 앤트는 아시죠?”
“본 적 있습니다. 한 번이지만.”
“토벌하던 중 그 사체를 보았습니다.”
“그걸 맹수가?”
“네, 그때 몬스터들이 싸움에서 밀렸다는 판단을 했지요.”
“그 후는?”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을 만큼 몰려들긴 하지만, 주변 영주들과 함께 대응하고 있습니다. 락에서 용병들을 보내 주기도 했고요.”
콜라벨은 그러다 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딱 감당할 만큼만 몰려온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체계도 그리고 몬스터들에 대처할 시간도 생겼지요. 신기한 일 아닙니까?”
짐작되는 게 있었다.
‘프라일인가?’
나조차도 그 정체가,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는 사람.
‘여유가 생길 테니.’
그간 너무 바빠서 신경 쓸 틈도 없었지만, 이제는 시간도 생겼고 알아봐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네. 그나저나 피곤하실 텐데. 침실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번거롭다니요. 식사도 준비하겠습니다.”
영주 관저에서 하루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콜라벨 남작가의 배웅을 받으며 락으로 향했다.
“주군.”
그렇게 마차에서 번천이 날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없는 사이 뭔가 다른 조직을 만드셨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번천은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보며 말했다.
“저 노란 옷이 종종 눈에 띄어서 말입니다.”
“노란 옷?”
번천의 시선을 따르니 신관들이나 입을 만한 스타일의 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걷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저런 자들을 꽤 봤다.
어제 본 사람들이 입은 옷의 형태와 색이 너무나도 똑 같았다.
“유행인가 보지.”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락에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정말 우리 영지 맞습니까?”
번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떼지 못했다.
“많이 변했지?”
나도 그리 말하면서도 놀랐다. 콜라벨 남작의 영지를 봤을 때도 놀랐지만, 지금의 락은 그 보다 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거대해져 있었다.
‘락에서 삼 층짜리 건물은 한참 후라고 생각했는데.’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거리 하나가 통째로 그렇게 같은 양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소영주님!”
“소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마차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몰리기 시작했다.
“소영주님! 여기요! 저 벨이에요!”
“말 못 들었어! 이제 우리 소영주님도 백작님이신데, 백작님이라 불러야지!”
눈에 익숙한 소년부터, 소영주라 부르는 중년 사내를 핀잔주는 부인들.
소리 지르지 않고 내 얼굴만 감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락에 이주해 온 이주민들. 그리고 마차에 다가오지 않고 무슨 일인가 멀뚱멀뚱 보는 사람들까지.
가뜩이나 번화한 곳이 인파가 몰리니 마차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모두들 잘 있었나!”
마차에 타고 있을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여전히 정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랏트 할아범.”
“아이고, 소영주님. 이 늙은이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겁니까?”
“할아범보다는 할아범이 만드시는 설탕과자를 기억하시는 거죠.”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소영주님을 위한 설탕과자는 늘 있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솔직한 마음은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지키고, 책임져야 할 내 사람들의 앞이다.
어떻게든 시선 한 번, 말 한마디 섞어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의 희망을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가까이 있는 이와는 악수를 하고, 그 뒤로는 대화를 나누고, 시선은 멀리 있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만. 소영주님 피곤하셔. 돌아오셨으니 이제 매일 보게 될 텐데.”
“그래, 그만. 자경대원들 뭐 해!”
랏트 할아범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길이 그렇게 조금씩 열리고 있을 때였다.
‘응?’
마차가 나아가기 전에 먼저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노란색의 신관 형태의 옷을 입은 이들. 콜라벨 남작의 영지에서 그리고 몇 개의 영지를 거쳐 오면서 익숙하게 봐 왔던 차림새.
‘해피랜드.’
오는 도중에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행복한 땅이라는 신흥 종교의 사제들이었다.
해피랜드는 새로운 하늘을 열고, 풍요로운 땅을 만들어 신세계를 만든다는 목적의 종교다.
눈살이 절로 찌푸렸다.
번천과 대화를 할 때 그리고 그들에 대해 알았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대충 들은 교리도 제법 괜찮았다.
에펠리온의 종파로 보일 정도로, 그들의 성전과 비슷한 교리도 논파한다. 사람을 위한 종교.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집회가 너무 많았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그리고 무슨 돈을 그리 요구하는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상당 숫자가 많은 헌금을 내고 있다고 들었다.
종교의 순작용보다 부작용이 더 클 것 같은 우려가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로라스 백작님이십니까?”
노란 다섯 명의 무리 중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에게 신분을 물으려면 먼저 밝혀야 하는 게 예의. 그대들은 누군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번천이 먼저 앞섰다.
“아! 제가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해피랜드의 사제 존말론이라 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해피랜드의 고위 사제님들이십니다.”
“그게 락의 소영주이시자 백작님의 행렬을 막은 이유가 되는가?”
번천 입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고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가 어찌 감히. 로라스 백작님에게 인사드릴 기회라 생각해서 서둘렀나 봅니다.”
“인사는 언제든 영주 관저의 담당자에게 신청을 하면 될 터. 정말 무례하다.”
번천의 이런 반응을 예상 못한 듯 존말론이라는 사제는 적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그때 뒤에 서 있던 사제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자가 입을 열었다.
“신의 사제에게 너무 번거로운 절차를 따지시는 게 아닌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무슨 호랑말코 같은 소리지?’
“백작의 모친이신 영주 부인께서도 저희들이 오면 지극정성으로 환대해 주십니다. 만나뵐 때 그 어떠한 절차도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번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