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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93화 (193/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3)

“혼담을 넣었다는데 모르고 있었나?”

확인하듯이 다시 묻는 마르크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 소문이 있긴 했네요.”

의외의 인물이 대답을 하고 나왔고, 난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한 이는 바로 에르자일이었기에.

“사실이었나?”

“…….”

“필요하신 말씀이었다면 로라스 백작님에게도 말씀하셨겠지요.”

나긋한 어조에 상냥한 느낌. 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혹시 중간에 소문이 와전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안 그런가요?”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르크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매지스터, 아니 레이디 에르자일 님을 뵐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매지스터 헤르메스 님은 안녕하신지요.”

제법 기민하다.

후계 싸움을 뻔히 아는 와중에 헤르메스의 제자인 네가 이곳에 어떻게 와 있냐는 물음이니까.

“여기에 마르크 공자가 계시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에르자일도 같은 느낌으로 받아쳤지만, 마르크는 능글맞은 표정을 계속 유지하며 말했다.

“카르이샤 백작님은 제 숙부님 되시는데, 제가 못 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러게요. 저의 마탑과도 친밀한 관계이시니까요. 혹시 아시나요? 전장에는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많이 파견되어 있는 것을?”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에르자일이었지만.

“물론 알지요. 그나저나 다른 소문은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무슨?”

“아버님께서 에듀 백작님에게만 혼담을 넣은 게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

“헤르메스 님께도 사람을 보냈는데.”

이번 공격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화의 흐름상 헤르메스에게 보낸 사람이라는 건 곧 혼담을 넣었다는 것이고, 그 대상은 에르자일과 마르크일 테니 말이다.

물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디존슨이 대놓고 이렇게 움직였다는 건 선 가르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내 편이냐? 아니면 적이냐?

혼담은 그런 것을 알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에르자일은 만만치 않았다.

“디존슨 백작가는 사람이 없나 봐요?”

뜬금없는 물음에 마르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사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정보가 느리다는 거죠. 저와 로라스 백작님이 약혼 한 지가 한참 되었는데, 그걸 모르고 계신 것 같은 걸 보면 말이지요.”

마르크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리고 날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에르자일은 계속 말했다.

“그러니 그런 무의미한 혼담을 넣은 게 아닐까요? 양쪽 모두에게 말이에요.”

마르크는 호흡이 거칠어진다.

평정심을 찾으려는 것 같은데, 욕망 어린 눈빛으로 에르자일을 보는 게 눈에 거슬린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가?’

기대에 찼을지도 모르겠다.

에렌에서 디존슨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으니, 가문의 힘으로 에르자일을 배우자로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테니.

그리고 그 기대가 흔들리니 본성이 표정에 그리고 눈에 나타난 것일 터.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에르자일은 보란 듯이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백작님, 카르이샤 백작님에게 인사드려야지.”

그렇게 끌려가는데 뒷통수에 박히는 시선이 따가울 정도다.

‘완벽하게 선을 그은 건가?’

아들이 저리 나대는 걸 보면 디존슨은 이미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그새 많이 안 좋아지신 건가?’

그렇지 않다면 디존슨이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이리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확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 에르자일이 나를 끌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기가 불편함이 그 중얼거림에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물었다.

“뭘 만들어?”

“그런 거 있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에르자일.

“아니지?”

생각나는 게 있어 물으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 마. 헤르메스 님도 곤란해지신다.”

“해 봤는데 저항 관련 아티팩트라도 몸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통하지 않은 걸 보면.”

떠봤는데 맞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신경 끄기로 했다.

에르자일은 예측하기 쉬운 사람이나, 심사가 뒤틀렸을 때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긁어 부스럼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들 거야.”

그녀가 태연스레 뱉은 말을 들으며 카르이샤 숙부에게로 향했다.

* * *

할아버지가 돌아오셨다.

그리고 날 부르시며 대뜸 한 말은 이랬다.

“제법이더구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지요?”

“내가 있던 곳까지 네 이름이 들렸어. 뭘 어찌한 거냐?”

“끼니는 꼭 챙겨 드시는 걸 아니까 걱정하지 않지만, 신경 쓰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를 보니 어떻더냐?”

“살이 빠지셨어요. 나이 드시면 체중 감소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가지만 개의치 않았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실 테니.

한참을 접점 없이 평행을 달리던 대화가 서로 만났다.

“그래도 내 건강을 그리 걱정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손자가 할아버지 걱정하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요.”

“정말 걱정되면 여기 눌러앉든가.”

“할아버지 뵙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제 집으로 가야죠.”

“그럴 거면 걱정을 하지 말아야지. 말로 하는 건 누구나 한다.”

“밥값 하라 하셔서 크라운에도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 것을 가득 챙기고 왔지. 밥값은커녕 오히려 불편함만 잔뜩 가지고 왔지 않느냐.”

“뻔히 아셨을 텐데. 그래서 절 보내신 거 아니었습니까?”

할아버지는 전쟁을 반대하신다. 그리고 굳이 아버님을 크라운에 오게 만들었던 황제파의 속내를 읽으셨을 거다. 그래서 날 대신 보내신 것일 테고.

“그렇게 소문내면서 전쟁을 할 줄은 몰랐지. 조용히 움직였어야지.”

“전쟁은 늘 변수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래. 어떻더냐, 거기는?”

“엉망입니다. 나름 중심을 잡고 있는 자들이 있으나 그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크기의 힘으로 모두를 누르고 있는 상황.”

“정말 황제가 고집을 부리면?”

“크기의 힘이 있으니 이길 겁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연합하여 대항한다면 필패. 외교가 엉망이니 아마 그렇게 흐를 것입니다.”

“역시인가?”

“이건 에렌에서 침묵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북부군이 움직이면 또 달라지겠지요.”

할아버지는 책상을 톡톡 치다가 말씀하셨다.

“백작 작위를 줄 정도로 공을 들였던데. 또 뭘 내게 주더냐?”

“그게 모호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황제가 정말 우둔한 이가 맞습니까?”

“멍청한 사람이지. 전대 황제에 비하면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히든아이를 통해 예측할 수 있게 된 황제의 속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셨다.

“그러니 멍청한 사람인 게지. 황제가 왜 머리를 써?”

“…….”

“애초에 나를 견제하는 행위 자체가 멍청하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말이 또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그는 황제다.

권력의 제1인자.

하지만 그런 자가 타인과 경쟁을 하는 순간, 그 절대적인 벽을 스스로 허무는 것과 마찬가지.

“내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느라, 제 이름의 무게 값을 잊어버린 게지.”

“…….”

“그 대가는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겠지.”

할아버지는 분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로라스, 그럴듯함에 속지 마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권력을 잡고 태어난 이가 그 정도도 못하면.”

“머저리지요. 이해했습니다. 잠시 헷갈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쭙는 건데 말입니다.”

할아버지를 직시하며 물었다.

“에렌으로 끝내시는 겁니까?”

“원했다면 녀석이 죽었을 때 손에 넣었을 거다.”

조금은 당황하실 줄 알았는데, 태연하게 황제가 됐을 거라는 대답에 웃음만 나왔다.

“황제의 자질을 타고 났었다. 내 충성을 받을 그릇이었지. 그게 문제였어.”

“자식 교육을 소홀히 했군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든 대소사를 제 손으로 처리했으니까. 배울 게 없었을 것이다. 그게 실수였지.”

할아버지는 그리 대답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으셨다.

“생각해 보니 내가 딱 그 꼴이군.”

“그럴 리가요.”

“그와 다른 게 있다면 베스타인은 많다는 거지. 쓸 만한 인재, 공신 들은 전부 베스타인의 성을 줬으니까. 사람도 많았던 게지.”

할아버지는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찻잔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계속 말했다.

“욕심이 있었던 거지, 나도.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미련을 가진 걸 보면.”

나를 포함한 네 명의 후계 후보 중 할아버지의 피를 직접적으로 이어 받은 이는 디존슨 하나뿐.

자식 교육이라는 말을 괜히 했나 보다. 울적하시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잠시의 침묵을 깨며 말했다.

“카르이샤 편에 설 것이냐?”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 빤하게 행동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카르이샤가 그런 재능이 있지. 하지만 너를 품을 정도의 그릇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별 대답을 하지 않으니 은근한 눈치를 보이시며 물으셨다.

“너는 정말 생각이 없어? 사내라면 응당 야망이 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완성하신 에렌을 욕심내기보다는, 락을 에렌만큼 키우는 게 더 큰 야망 아니겠습니까?”

“내가 네 녀석을 후계 후보로 지명한 이유는 생각 안 하고?”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할아버지의 손자이기도 하지요.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은 잘한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재능을 제대로 쓸 생각을 해야지.”

“락에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남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는구나.”

“뵙고 가려고 여태 기다렸을 뿐입니다. 락에서도 할 일은 태산이니까요.”

할아버지는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기왕 내려가는 거라면, 앞으로 몬스터들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하거라.”

“보고라 하시면?”

“전국적으로 몬스터 숫자가 늘었다.”

“…….”

“게다가 게이트가 출현했지. 그것도 바라디아 지역에서! 그곳은 내 영지에서 가장 안정적인 곳이었단 말이지.”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늦게 도착한 것이다. 마침 내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규모는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오천.”

하늘 산맥에 나타난 몬스터 웨이브와 같다. 그 정도면 에렌에서도 병력이 집결하였을 테지만, 별 소문도 없이 끝난 걸 생각하면…….

“로드를 처리하셨습니까?”

“놈들이 확산하기 전에 끝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게이트는 하늘산맥에만 있는 게 아니었군요.”

“그곳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장소는 보통 정해져 있다. 하늘산맥, 붉은 사막, 끝이 보이지 않는 정글, 얼어붙은 대지 등.”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소는 지킴이들, 선택받은 자들과 지켜보는 자들이 있는 곳.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

“…….”

“하지만 그중 바라디아는 아니야.”

“또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봤으니까. 로라스.”

“네, 할아버지.”

“재능을 부여받고 태어난 이는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힘에 따른 의무. 알고 있습니다.”

“권력도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잡아야 하는 것. 그래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

“솔직히 네가 에렌을 물려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너는 특별하니까.”

“할아버님…….”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네 녀석이 숨기는 비밀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특별하다는 건 숨길 수가 없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다.

‘제 인격이 두 명입니다. 원래 그랬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

“하지만 락을 선택했지. 그렇다면 그 선택에 집중하고, 네 의무를 다해라.”

계속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은 손자 로라스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내가 왜 할아버지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난 당연히 해야 할 대답을 했다.

“명심하고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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