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2)
‘담백하네.’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크라운에서 사치의 끝을 하도 봐 와서 그런지 카르이샤 숙부의 저택 첫인상은 그래 보였다.
물론 지위가 있어서 다른 귀족들의 거처에 비해 상당한 규모였지만, 내부 장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콘셉트였을 뿐.
“로라스 백작님.”
입구에는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르자 백작님, 어떻게.”
보통 파티 입구에는 초대받은 이들을 안내할 시종이 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라르자 백작이 직접 있다는 건 뜻밖이었다.
“삼공자님의 귀한 손님이신데, 제가 직접 모셔야지요.”
“지나치십니다.”
“하하하, 하나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금 에렌에서 로라스 백작님을 뵙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많은 초대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쪽으로는 별 흥미가 없어서.”
“그런데도 삼공자의 초대는 응하셨으니 제가 직접 모셔야지요.”
그만큼 내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백작이 직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사실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들어가시지요.”
하지만 덕분에 일은 더 수월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그 정도로 날 존중해 준다면 이후 귀찮은 일도 적어질 테니까.
“그런데 성녀님과 매지스터 에르자일은 같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들어가면서 라르자 백작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좀 있다고 해서요. 두 사람 모두 말입니다.”
실망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아델리나나 에르자일 둘 다 사교계에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나를 통해 그 두 사람이 왔다면 카르이샤 숙부의 영향력을 많은 귀족들에게 보여 줄 기회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음에 같이 뵐 날이 있겠지요.”
“필요하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겠지요. 그 두 분이라면 삼공자께서도 언제든 시간을 내주실 겁니다.”
들어가면서 라르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후계 싸움이 이제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두 번째 후계인 둘째 큰아버지 멘토라스도 에렌에 입성했다고 들었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큰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하간 서로 세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잘한 다툼으로 하루가 멀다고 소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말이다.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원래라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일이 좀 많아지신 모양이시다.
‘이제 건강을 신경 쓰셔야 할 텐데.’
초월자라 해도 시간은 피할 수 없다. 가진 포스는 더 농후해지셨겠지만, 육체적 나이는 포스로도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여든이 넘으셨나?’
단련된 육체와 포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매번 장기간 외부 출장은 건강에 무리가 가는 일.
그렇게 파티장에 입장했다.
“로라스 백작님과 라르자 백작님이 입장하십니다.”
길고 긴 미사여구와 형용사가 붙지 않음이 마음에 들지만, 다가오는 사람들은 여전히 같다.
어떻게든 줄을 대고 싶어 하는 무리, 멀찌감치 후계 싸움을 지켜보며 나라는 변수에 흥미로워하는 무리, 자신의 파벌로 끌어오고 싶어 하는 무리.
피곤하다.
‘에르자일이나 아델리나와 함께 왔어야 했나?’
둘 중 하나를 파트너로 데리고 왔으면, 최소한 여성분들을 앞세워 오는 사람들은 피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나같이 웃는 탈에 얼굴을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물론 나도 비슷한 탈을 썼다.
귀찮긴 하지만 뜻이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할 터.
‘테라라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아쉬운 건 사실이다.
가끔, 아니 상당히 높은 확률로 모자란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 테라는 곧잘 참는 것 같지만, 내가 수틀리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아 데리고 오지 않았다.
크라운에서 판드와 함께 파티에 참여했을 때, 몇 번이나 뒤엎을 뻔했다. 그가 능글맞게 먼저 대처해서 나설 틈이 없어서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웃어 주고, 귀 가문의 명성은 많이 들었다는 둥, 영광이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사람들을 살폈다.
사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늘 파티 참석의 목적은 뭇 귀족들에게 카르이샤 숙부를 지지하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다. 다른 초대를 모두 거절하고 딱 초대에만 응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라르자 백작은 내 속내를 모를 것이다. 일단 세가 약한 후계끼리 연합하여 일단 첫째, 둘째 큰아버지의 압박을 견디자는 게 그의 기본 전략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주인이 보이질 않네.’
파티 주최자인 카르이샤 숙부가 보이질 않는다. 보통 이 시간대 나타나야 정상인데 말이다.
그때 시종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매지스터 에르자일 님과 카르이샤 백작님 입장하십니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다.
내 시야에 에르자일이 카르이샤 숙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화려하다.
외모 그 자체만으로도 별다른 꾸밈이 필요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작정하고 치장하고 왔는가?
하얀 피부의 적당한 화장 그리고 붉은 빛의 레이스 달린 드레스는 그녀의 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시선을 뺏기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미리 약속되었던 건가?’
아니, 그 전에 저래도 되나 싶었다.
그녀의 신분 그리고 내 동행도 아닌 카르이샤의 동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헤르메스가 카르이샤 숙부를 지지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이는 소수.
모두가 귀족들이나, 여기만큼 계급제도를 확실히 보여 주는 바닥도 없다.
신분 낮은 이들은 말도 못 붙여 보고 주변을 돌며, 먼저 말 한마디 건네주길 기다리고 있고, 몇몇 귀족들은 무리를 이루어 다가간다.
이런 것들이 이런 파티를 싫어하는 이유다.
그때 카르이샤 숙부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라스!”
동시에 에르자일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날 불렀다. 그것도 꽤나 큰 목소리로.
딱 그 순간, 거짓말처럼 우리 사이에 있던 인파가 갈라지듯 길을 열었다. 이게 귀족 사회다.
“숙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랑스럽다, 베스타인 가문의 이름을 드높였더구나.”
비아냥이 아닌 진심이 묻어나는 숙부의 목소리, 진심으로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점 때문에 그를 밀어주기로 한 거지만, 속내를 숨길 필요는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실력 있는 이들 대부분은 권력에 집요하게 욕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스스로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카르이샤 숙부가 그런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참된 군인.
겉만 그런 게 아니라, 속도 그렇다.
현재 후계 싸움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는 건, 따르는 이들 때문일 터.
최고 지휘관이 정치를 모르면 고생하는 건 그 밑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계속 파티가 진행되었고, 잠시 짬이 났을 때 에르자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초대받았다는 말 왜 안 했어?”
“너도 말 안 했잖아.”
뭔가 뾰로통한 대답. 하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참석하라 하셨어.”
“스승님이?”
“관심 없는 거 맞지?”
“…….”
“그런데도 네가 여기 참석했잖아. 그러니 힘을 실어 주시겠다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간, 그 어떠한 정치적 행보도 보이지 않았던 헤르메스다. 그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측근 전부 다 그렇다.
‘둘 중 하나다.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거나, 아니면 미리 언질을 받았거나.’
할아버지가 그를 후계로 낙점했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면…….
‘아니면 나인가?’
헤르메스는 내게 힘을 싣겠다 했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난 이미 선택했고 결정을 내렸다.
목적을 명확히 하기로 했다.
에렌의 후계자보다는 락의 후계자가 더 좋다. 그리고 락의 후계자로서 행동하는 거다.
사람들이 점점 몰렸다. 특히 젊은 사내들이 이쪽을 보는 시선은 뜨겁기까지 하다.
“버러지들!”
그런 시선은 당연히 에르자일도 느꼈고. 그녀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그럴 만한 존재잖아. 그리고 저들은 피 끓는 나이이기도 하지.”
“너는?”
“응?”
“너는? 아무 관심도 없어? 어머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셔?”
순간 떠올랐다.
약혼을 약속했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들었다. 나도 괜찮고.”
“자존심이 상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너는 아름답다니까.”
“엎드려 절받는 기분이야. 어떻게 하면 네가 스스로 내게 프러포즈할까?”
웃음이 나왔다.
“일이 끝나면 고민해 보지.”
에르자일의 표정이 묘하게 변할 때였다.
“여기 있었군, 로라스 맞지?”
저돌적으로 다가오며 묻는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와 그 옆에 내 또래의 여인.
누군지 잠시 생각할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 형이다. 마르크 베스타인이라고 하지.”
모르는 이름이다.
사실 베스타인의 성을 쓰는 이는 많다. 공신들에게 하사하는 이름이 베스타인. 괜히 미들 네임이 네 개나 있는 게 아니다.
“날 몰라? 아무리 처음 보는 거지만,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옆에 서 있던 여인이 그를 말렸다.
“그는 이제 백작이야. 예를 지켜.”
그러고는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베네마이 베스타인, 디존슨 백작님의 장녀지요.”
디존슨의 아들, 딸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여기에 왜 참석한 거지?’
의문을 가지며 답례했다.
“두 분은 처음 뵙는군요. 진즉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백부님의 성에서는 뵙질 못해서.”
“그거야 워낙 바빠서…… 축하한다. 백작이 되었다면서? 이렇게 빠르게 작위를 받은 사람도 없었을 텐데.”
제 아비를 닮아 그런가 무례한 놈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말을 섞어 봤자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 좀 면박 주듯이 물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동생이지만, 앞으로 처남이 될 사람인데. 미리미리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 * *
락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메어리는 계속해서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괜찮을까요?”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냈다.
“뭐가?”
“그 혼담 말이에요.”
“언급할 가치조차 없어.”
“하지만 디존슨 백작님은…….”
메어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에듀는 단호했다.
“인정 안 해도 어쩔 수 없어. 로라스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까지는 잡을 생각이 없어.”
“로라스에게 언질이라도 줄 걸 그랬어요.”
“그럴 필요도 없어. 우리 입으로 그 말을 꺼내면 일이 공식화돼. 그럼 세간의 이목 때문에 공식적인 발언까지 해야 하고, 그건 로라스에게 도움이 전혀 안 돼.”
“괜찮겠지요?”
“로라스를 믿읍시다. 똑똑한 아이지 않소. 알아서 대처할 거요.”
에듀의 말에도 메어리는 쉽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디존슨이 막무가내로 나오고, 일을 진행시키면 어쩌나 싶은 걱정뿐이었다.
그런 불안한 모습에 에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로라스가 대처 못 하면 에르자일이 있지 않소. 미리 언질해 뒀으니 그녀가 옆에서 도울 거요.”
“하지만 에르자일은…….”
메어리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에르자일이 엄마, 엄마 하며 자신을 따르는 것이 좋았다. 가끔 도가 지나칠 때가 있지만, 친근감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줄 모른다는 걸 알기에 개의치 않았다.
아름답고, 현명했으며, 사람들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가끔 생각조차 못 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었다.
언제였을까?
호위병도 없이 에르자일과 둘만 외출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있으니 둘만 재미있게 다녀오자고 해서 에렌의 중앙시장으로 구경 나간 적이 있었다.
진귀한 물건이 있다고 호들갑 떠는 호객꾼을 따라 골목 깊숙이 들어갔던 게 화근이었다. 진귀한 물건 대신 자신들이 만난 건 음침한 강도들이었다.
‘개구리…….’
매지스터, 매지스터 하며 사람들이 그녀를 부를 때, 단순하게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에르자일은 그 강도들을 순식간에 개구리로 변신시켰다.
그것보다 더 놀란 건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을 끌고 유유히 시장 구경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마법이 풀렸는지, 아니면 정말 개구리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여전히 모른다.
분명 그녀는 현명하지만, 가끔 이렇게 과격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일에도 그런 반응을 보이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지는 않겠지?’
메어리는 정말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