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0)
‘뭐냐? 정말?’
알 수 없는 침묵을 뒤로하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여자들의 거친 표정, 사내들의 불안한 표정.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좀 유추해 봐야 하는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이지?
번천과 테라에게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음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것도 가르쳐 놔야겠군.’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말이다.
“로라스.”
왠지 싸늘한 에르자일의 목소리.
“저 여자랑 잤어?”
“응? 뭐라고?”
순간 뭔 소린가 싶었다. 동시에 당황해서 그대로 의문을 입 밖으로 던졌는데 말이다.
“저 여자랑 잤냐고?”
다시 한 번 던져지는 질문에 내가 잘못 듣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성녀도 입을 열었다.
“백작님, 약혼자가 계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무슨 약혼자?
이 두 여자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
“약혼자…….”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려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에르자일이 저런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설마…….’
그리고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건가?’
아닐 것이다. 그리 믿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공을 잃고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전장에 던져져도 이리 당황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란…….’
이 세계에서 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유역후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경험도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유역후의 기억 속에 여자는…… 단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번천, 테라.”
“네. 주군.”
동시에 대답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준비해야지.”
“네?”
“그게 무슨…….”
“일도 끝났으니 락으로 가야 할 테고. 무엇을 해야 할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새로운 인원이 많이 왔으니, 그들을 어떻게 배치하여 군의 능력을 더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할 테고.”
굉장히 많은 말을 했는데 뭔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유역후의 기억에서도 여자에 대한 경험은 없다시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판드, 너도 가야지. 놀고먹을 생각은 아니지?”
“아! 물론이지, 나갑시다. 두 분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요.”
눈치 빠른 판드가 앞장서서 도망치니 편하다.
“로라스.”
“백작님.”
두 여자가 동시에 소리쳤지만, 애써 무시하며 탈출했다.
* * *
아침 식사.
커다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와 부모님뿐.
두 분과만 식사하고 싶어서 따로 시간을 마련했다.
아버지는 전투에 대해서 궁금해하셨다.
“사실 크게 별건 없었습니다. 마법 트랩이 생소하여 당황했지만, 포스를 다룰 줄 알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사람이라면 큰 피해 없이 수습이 가능했을 겁니다.”
“그러기에는 소문이 너무 거창하구나.”
“정말입니다. 그때 느낀 건 그 트랩에 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시각과 청각을 장악당하니 여유가 없어졌을 때, 어떤 혼란이 야기되는지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어머니는 그 때문에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다쳤는데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하셨다.
“다치기는요. 어머님이 주신 육체에 조금의 흠이라도 가면 되겠습니까? 머리카락 한 올 다친 곳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정말이지?”
“물론이지요. 옛날처럼 어머니 앞에서 목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랬다면 대번에 알아보셨을 텐데요.”
“옛날? 그때도 넌 내 앞에서 예를 차렸단다. 몸종 하나 접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지.”
“제가 그랬나요?”
어머니는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애가 아니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뭐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단다.”
“제가 불효자였군요.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고, 얘는 무슨 말을 못 하겠구나.”
어머님이 당황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것 같다. 역시 난 불효자인가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왜 저러시지?’
자꾸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눈짓을 보내신다.
“로라스.”
“네. 아버지.”
“너도 이제 슬슬 결혼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답을 못 하니, 아버지가 계속 말씀하셨다.
“사실 여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가문이 많았다.”
“…….”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정확히는 예전보다 더 많은 가문에서 네게 관심을 보이더구나.”
“생각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아버지.”
“너도 곧 서른이다. 사실 락에 있을 때 추진해야 했는데, 폐하의 부름을 받는 바람에 미뤄 둔 일이지.”
어머니가 옆에서 말씀하셨다.
“많이 늦었다. 네가 부족한 것도 없는데, 계속 혼담을 거절하는 것도 괜한 소문이 날 수도 있어.”
“거절할 명분도 이제 마땅치 않고 말이다.”
사실,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은 늘 생각으로 끝났다.
나라고 거기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실질적으로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트라우마.
내 트라우마는 아닐 것이다. 그런 걸 겪을 만한 일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아닌 유역후의 기억이다.
가족은 늘 책임을 동반한다. 무엇보다…….
‘약점이다. 큰 약점.’
무엇도 겁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도 그럴까?
‘부모님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이리…….’
잠깐만!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걱정을 하던 사람이었던가?
부모님은 내 가족.
언제부터 내가 부모님을 약점으로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뭔 개소리야! 내가 지금 가족을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두두둑.
목이 뻣뻣하다.
아! 지금 혼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내가 왜?
……!
유역후의 트라우마가 나 로라스에게 전염되었다. 그래,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니까.
하지만 유역후가 그랬다고 나 로라스가 그럴 필요는 있는가?
원래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나는 나.
어머님이 레지온의 이빨에서 날 보호하셨을 때. 절대 지워지지 않을 그 흉터를 얻으셨을 때.
―이게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한눈팔지 않고 아들 노릇 잘할 겁니다.
난 그리 약속했었다.
이분들의 아들로, 그리 살겠노라고!
“로라스?”
“네! 어머니.”
“그리 싫어? 결혼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한다. 못할 것 없다.
위화감, 불안감.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유는 알아야 했다.
왜 약점이라고 생각했는지.
―큰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안심하고 크라운을 갔다 올 수 있었던 건 에르자일. 그리고 테라 때문이다.
그리고 테라는 내가 없었을 때의 일을 말해 줬다.
―그런데 은근히 좀도둑들이 많더군요. 차라리 공작님의 성에 있었던 게 나았을 정도로.
―사람들이 마님을 따돌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문제라면 그게 제일 문제였지요.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주제넘습니다만, 제 눈에는 하이에나 무리 같은 놈들이었지요.
부모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 저택에 좀도둑들이 침입했었다는 것.
물론 테라에게 에르자일에게 걸려 작살났지만, 뭔가 굉장히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좀도둑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 이런 문제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
언제 내 본능이 틀린 적이 있던가?
틀려서 문제 될 것 없는 본능.
머리가 명쾌해지는 순간 어머니가 부르셨다.
“로라스, 저기…….”
“괜찮습니다. 혼담이 들어오면 어머님이 아버님과 상의해서 진행해 주십시오. 저는 상관없으니까요.”
“좋아하는 여자 없어?”
“그런 거 없습니다.”
“그게…….”
자꾸 망설이시는 것 같아 물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무슨 말씀이신데 그리 망설이세요?”
“내가 하도 바빠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에르자일과 약속한 게 있다.”
“약속이요?”
“너랑 약혼시키겠다고 말이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구나.”
순간 말문이 막혔고, 어머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으셨다.
“계속 함께 있다가 보니……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머니. 전 괜찮습니다.”
“정말이니?”
“모르는 사람보다는 에르자일이 훨씬 낫지요. 편하기도 하고요.”
“그럼 다행이구나.”
아버님도 옆에서 한 말씀 하셨다.
“에르자일 만한 재원도 없으니. 우리도 그렇고, 영지 사람들도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잖느냐.”
“네. 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정말 아무런 상관없었다. 오히려 에르자일이라 안심하는 것도 있었다.
에르자일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 없는 강한 사람.
사랑?
애틋한 뭐 그런 거 없이도 결혼은 할 수 있다.
곁에 있으면 나쁘지 않고, 여러모로 말이 통하는 그런 친구 관계.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간 지금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식사 시간을 끝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만날 사람이 있었다.
“백작님.”
마침 화원에 나와 있던 성녀가 반겼다.
“잘 주무셨습니까.”
인사를 하고 시선을 돌렸다. 용건은 성녀에게 있지 않았다.
“쥬니스.”
“네, 백작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너도 편한 밤 되었나?”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쥬니스에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쉬지도 못하게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라.”
“네? 무슨 부탁을?”
쥬니스뿐만 아니라 성녀도 관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들어도 문제 될 건 없기에 말했다.
“에렌에서 활동하는 동업자들 알고 있나?”
쥬니스의 표정이 굳었다.
근래 친숙하게 지낸 사이였지만, 쥬니스의 본업은 암살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동업자는 같은 암살자.
“잘은 모르지만…….”
“나와 그들을 연결하거나, 아니면 뭐 좀 알아봐 줄 수는 있나?”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으로도 부족해. 난 이걸 꼭 알아야겠으니, 필요하다면 에렌에 있는 모든 암살자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말이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가진 찝찝함을 그리고 그것을 내 머릿속에 지우겠다는 의지를.
* * *
아름답다.
톡톡톡.
연분을 얼굴에 바르는 여자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분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백색 피부가 오히려 연분이라는 것에 오염되는 느낌만 들 수밖에.
“매지스터,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세리는 조심스레 물었고, 연분을 바르던 여자. 에르자일은 세리를 쳐다봤다.
에르자일의 멍한 눈빛에 세리는 순간 움찔했다. 자신이 주제넘었다고도 생각했다.
‘미쳤지. 하지만 좀 이상했잖아.’
연분은커녕 입술에 보습제 한번 바르지 않던 에르자일이었다.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빼앗는데, 그딴 게 필요할 리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이곳저곳에서 선물로 잔뜩 받은, 개봉 한 번 하지 않은 연분을 책상에 가득 올린 채, 이것저것 발라 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괜히 말을 걸었나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여동생처럼 대해 준다고 해도, 그녀는 엄연한 매지스터. 신분과 능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끝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줄래?”
하지만 나오는 대답에 세리는 스스로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지스터께서는 워낙 피부가 하얗고 깨끗해서 너무 많이 바르는 게 오히려 흠이에요. 이럴 때는…….”
세리는 자신이 화장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며 화장용 붓을 드는 사이, 에르자일은 이미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에르자일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아델리나.
예뻤다. 정말 예뻤다.
단 한 번도 외모에 관해서 단 한 번도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 때문에 그것에 신경이 가 버렸다. 그래서 아침부터 이 요란이고 말이다.
문제는 그녀의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똑똑똑.
더 생각하기 전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화장에 집중하면서도 밖에 소리치는 세리의 물음에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께서 매지스터를 뵙고자 하십니다.”
에르자일은 순간 자신의 얼굴에 붓칠을 하고 있는 세리의 손목을 잡았다.
세리는 그런 에르자일을 보며 소리쳤다.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다시 에르자일을 보며 말했다.
“지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