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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89화 (189/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9)

“로라스.”

달려오는 어머니를 힘껏 껴안아 드렸다. 당신보다 더 힘있게 말이다.

“어머니.”

“내 새끼, 보고 싶었다.”

두 뺨에 올라와 있는 두 손의 온기는 늘 그렇듯 따뜻했다.

‘늙으셨네.’

정말 일 년 사이 많이 달라 보이셨다.

주름살은 둘째로 치고 활력이 많이 없어 보인다면 착각일까?

“살이 좀 빠지셨어요. 끼니 챙겨 드셔야죠.”

“먹었는데도 그러네.”

“불편하신 건요? 여기가 락이 아니라 불편하신 것도 있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그런 건 없었다. 페컴 님도 그렇고 트아이 님도 많이 신경 써 주시더구나.”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좋죠. 며칠만 있다가 같이 내려가요.”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물음에 반문했다.

“뭐가요?”

“큰일을 하고 왔지 않느냐. 백작이라니, 엄마는 깜짝 놀랐구나.”

“그게 뭐 대수라고. 이름 뒤에 붙는 글자일 뿐이에요.”

“그래도…… 뭔가 에렌에서도 할 일이 있지 않겠니?”

“락에서도 할 일은 없고요? 제집은 락이에요. 어머니.”

어머니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조심히 입을 여셨다.

“네게 거는 할아버님의 기대가 크시지 않니, 어미는 네 앞길을 막고 싶지 않구나.”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요.”

“그럼 다행이고.”

“그보다 정말 아무 일은 없으셨던 거죠. 계속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불효를 했네요.”

“없었대도. 그리고 큰일을 하는데 작은 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되지. 어미도 그 정도는 안다.”

“들어가요. 어머니.”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시니?”

어머니가 아델리나를 비롯한 일행을 보며 물었지만, 날이 차갑다.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들어가면서 곁에 있던 에르자일과 테라를 쳐다봤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어머니 때문인지 나서지 않는 이들이었다.

“다시 보니 좋다. 너희를 믿을 수 있어 일은 잘 끝냈다. 들어가자. 같이 밥부터 먹자.”

이미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외부인을 초청하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끼리만의 파티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외부에 어떤 일을 처리하러 가셨다고 했다.

눈에 띄게 서먹서먹해 보였는데, 두 분의 관계도 많이 나아진 거라 봐야 했다.

‘하긴 시간이 얼만데.’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도 아니고, 감정이 격화됨으로 벌어진 사이. 그 정도면 복구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페컴까지 참여한 연회는 즐거웠다.

노독(路毒)을 푼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먹고, 마시고, 즐겼다.

그리 연회를 끝내고, 어머님을 침실까지 모셨다.

그대로 침상에 쓰러지면 그날은 끝나겠지만, 그럴 수야 있나.

크라운의 일은 끝나고 이제 에렌 그리고 락의 상황에 대해 알아볼 차례였다.

락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해야 했고, 반대로 아델리나 등에게도 락의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려 줘야 했다.

앞으로 일을 같이해 나갈 사이니까.

그렇게 필요한 인원을 커다란 응접실 하나에 모두 불러 놓고 돌아왔는데 말이다.

‘뭐냐?’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 * *

“이대로 두고 볼 참인가요?”

부인 네라페의 말에 디존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뭐 어쩌자고?”

“놈이 기세등등해져 돌아왔다고요.”

“그래 봤자지.”

“그건 아니죠. 에렌은 황제의 영향력이 없다시피 하더라도, 황제는 황제입니다. 의미는 충분히 있어요.”

네라페의 말에 디존슨은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찝찝한 일을 만들어!”

그녀가 워낙 자신만만해서 은근 기대했었다. 골치 아픈 놈 하나 치워 버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제 놈이 어찌 나올지 긴장까지 해야 했다.

“그게 어디 저 잘되려고 한 거예요. 모두 당신을 위한 거지.”

“그러니까 일을 제대로 하던가. 카르이샤도 골치 아픈데, 이제 그 애송이까지 신경 써야 하는 판이니.”

디존슨의 역정에 네라페는 불만 어린 표정이었으나, 실제로 일에 실패해서 크게 만든 건 자신이기에 참았다.

디존슨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마.”

“정말 가만히 두려고요?”

“그럼?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서? 아버지까지 계시는데.”

“…….”

“기다려, 결국 락으로 내려갈 테니까.”

“락으로 가겠어요? 지금처럼 좋은 기회를 두고? 전쟁 승리 후 젊은 정복자다, 차기 제국의 검이라고 칭송받는 지금?”

디존슨은 네라페를 쏘아보며 말했다.

“락에 잘 있던 놈이 에렌에 오고 크라운에 간 건 본인 의지가 아니었어. 아버님하고 황제의 뜻이었지. 제 아비를 닮아 권력에 큰 관심이 없을 거야.”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감히 꿈도 꾸지 못해 포기하는 것뿐이지. 만만찮은 놈이 아니에요.”

“그걸 누가 모르나! 제발 좀!”

디존슨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고, 그 모습에 네라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리 느슨하고, 약해 빠져서야…… 이런 중요한 일을 왜 기다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러다 락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에 잠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권력욕은 감춰도 그래도 제 가족은 끔찍이 여기는 건 사실이니. 하지만 그년 옆에는…….’

사실 직간접적으로 몇 번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녀 옆에는 만만찮은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특히, 에르자일. 그 건방진 년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며 일을 무산시켰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네라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 *

“미리 인사라도 할까요?”

모인 이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번천이었다.

번천은 일단 에르자일과 테라를 먼저 소개했다.

“매지스터 에르자일 님이십니다. 영광찬란한 마탑의 주인이신 헤르메스 님의 제자이시면서, 주군이신 로라스 백작님과 동문이기도 합니다. 락에 있는 마탑의 주인이시지요.”

번천의 소개에 에르자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단지 시선만이 아델리나와 쥬니스를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번천은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이내 테라를 소개했다.

“여기는 주군의 직속 기사 테라입니다. 주군께서 신임하는 기사이며 아이언핸드 센터 출신이기도 합니다.”

“테라라고 합니다. 로라스 백작님의 첫 번째 기사이며, 성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고, 다른 분들 역시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라는 그리 자신을 밝히고는 번천에게 물었다.

“모두 주군의 일을 돕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주군의 신하냐고 조용히 물을 찰나 번천이 먼저 말했다.

“그건 주군께서 말씀해 주시겠지. 그리고 너는…….”

번천은 테라가 두 번째 기사라고 정정하려 했다. 웬만하면 테라에게 양보하지만, 그 타이틀은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말을 꺼내기 전에 입을 여는 이가 있었다.

“아델리나라고 해요.”

아델리나는 스윽 둘러보듯이 보며 말을 이었다.

“로라스 백작님과는 확고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혹시라도 외인이라고 경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성녀님을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 놀랐습니다.”

“테라 경은 젊은 나이에 그분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지요? 능력이 대단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테라가 신나서 이야기하려는 찰나였다.

“확고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요?”

순간 사람들은 당황했다.

대놓고 적대적은 아니지만, 비호의적임은 분명한 싸늘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꺼낸 이가 에르자일이었기 때문이다.

번천도 테라도 모두 로라스의 신뢰가 두터웠지만, 에르자일은 신뢰뿐만 아니라 락에서의 영향력이 달랐다.

‘마탑의 탑주’라는 지위도 지위이거니와, 그녀가 락의 영지민들에게 받는 지지는 영주 일가를 제외하고 거의 첫손에 꼽힌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마법을 사용해 주고, 마법 도구까지 베푼다. 거기에 신전이 없을 때는 의원 역할까지 하는데,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 한 일.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마법사란 존재는 원래 그런 거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걸 모두 감안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무슨 뜻인가요?”

아델리나가 오히려 반문하자, 에르자일은 다시 한 번 또렷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로라스와 확고한 관계, 그 확고함이 뭘 표현한 건지 묻고 있어요.”

곁에 있던 번천은 순간 안심했다.

에르자일이 아델리나를 보고 오해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주군이 뭔가 공식적으로 뭔가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두 사람이 혼인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애초에 전도유망한 마법사가 당시 시골이라는 표현조차 아까운 락에 왜 정착했겠는가?

거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영주의 부인인 메어리에게는 어머니라 불렀다.

‘오해하신 거지. 성녀님과 뭔 특별한 관계일지. 충분히 그럴 수 있고.’

하지만 주군과 성녀는 그런 관계가 아님을 번천은 잘 알기에, 곧 오해가 풀릴 거라 생각했을 때였다.

“글쎄요. 말 그대로 확고함이겠지요.”

“…….”

“웬만한 오해. 아니, 절대적으로 해지될 수 없는 관계. 그런 확고함?”

에르자일이 침묵했고 이어지는 말에 번천은 기겁했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확고한 동맹 관계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런 말은 에르자일의 오해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번천이 기겁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와 잤나요?”

에르자일의 물음은 그만이 아닌 모든 이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걸 제가 매지스터에게 대답해 드려야 할까요?”

“보통 교단의 성녀들은 사내를 가까이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저희 교단은 그런 교리는 없군요. 대사제들 중 정부(情婦: 첩)를 거느린 사람도 많습니다. 매지스터.”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런데 매지스터께서는 그게 왜 궁금하실까요?”

이름을 밝혔음에도 에르자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철저하게 선을 긋는 아델리나.

“성녀님도 그럼 그런 정부 중 하나일까요?”

그리고 에르자일은 그런 아델리나를 상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은 듯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아델리나의 목소리도 냉랭해지자 에르자일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로라스의 약혼녀로서 물어봐야 해서요.”

아델리나는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매지스터께서 그분의 약혼자라고요?”

“그러니 물어봐야 했어요. 정부(貞婦: 정실부인)가 될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두고 정부(情婦)와는 다투고 싶지 않아서요.”

싸늘하다 못해 이제 서리가 내려앉을 판이었다.

“저기…….”

번천이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다. 그래서 입은 열었으나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그 전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소문만으로는 주군은 팔다리가 여섯 개씩 있는 무슨 괴물이 되셨던데.”

“아! 그 전투에 난 참전하지…….”

하지만 애석하게 번천은 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 전투에 있었던 사람은 아델리나가 유일했다.

그렇게 오히려 더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에르자일과 아델리나의 말 그대로 눈싸움이 계속되었을 때였다.

“늦었다.”

로라스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이야기하고 있었나?”

그리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번천과 테라 그리고 판드의 묘한 눈빛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음에 로라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그러는데?”

그는 현재 상황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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