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8)
안으로 들어가니 아델리나와 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제레미라고 합니다.”
사내가 날 보더니 벌떡 일어서며 자신을 밝혔다. 낯이 익질 않아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앞으로 백작님을 위해 힘써 줄 정보 조직의 수장입니다. 인사시켜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정보 조직.
자금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구축하려고 했는데.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왜?’
그녀와 맺은 약속이 있다.
일단은 한배를 탔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패를 오픈할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결정인데. 혹시?’
그다지 큰 조직이 아닌가 싶을 때,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시면 현재 크라운의 정세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답 대신 준비된 좌석에 앉았다.
“루니 백작이 세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백작님의 성공적인 원정에 고무된 상황입니다. 특히 이번 논공행상에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합류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길었다. 그리고 이들이 그저 그런 정보 길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크라운에서는 큰 조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들의 사소한 내용까지 이야기할 수가 없다.
물론 100퍼센트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최소한 무작위로 몇 가지 사실에 대해 교차 확인 해야 한다.
“새로운 귀족파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수장은 역시 루니 백작이고.”
잠깐 손을 그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하문하실 것이라도…….”
“새로운 귀족파라고 했는데 기존의 귀족파는 어디인가?”
“그건 당연히 북부의 베스타인 공작입니다.”
“북부가 에렌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건 사실이고, 또한 황제 폐하와 대립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베스타인 공작께서는 파벌로 황제 폐하의 앞을 가로막지는 않았어.”
할아버지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분이나, 당신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제레미란 자는 황제파, 귀족파의 대립각을 부각시키고 있다. 침략 전쟁 이외에 대립하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권력의 흐름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레미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단순한 상하 관계로는 보이지 않는군.’
잠깐이지만 그의 표정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저건 아델리나와 수평 구조의 협력자가 아니라 수직 관계라 봐야 했다.
아델리나가 말했다.
“백작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야기하세요.”
바로 대답하는 제레미.
“기존의 귀족파…… 베스타인 공작은 에렌, 더 나아가 제국의 안정에 목표를 두지만, 루니 백작은 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그 말은…….”
“네. 황권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루니 백작이 권력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이 더 황제 같긴 했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외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의 연세도 많지 않아 후계 싸움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네. 하지만…….”
제레미는 다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사남이신 리레이 황자 전하는 폐하가 아닌, 루니 백작의 아들입니다.”
“확실한가?”
“목을 걸 수도 있습니다.”
“리레이 황자의 세가 가장 약하다 들었다. 루니 백작의 숨겨진 아들이라면…… 왜.”
“당장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리레이 황자의 모친은 알메르에 후작가의 핏줄로 리레이 황자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녀를 지극히 총애했던 황제는 그래서 황자를 싫어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핏줄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아서 일지도 모르지요.”
제레미의 말은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차라리 지금 숨죽이고 있는 게 리레이에게도 낫다는 것. 그래도 황자이니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괜히 사교계에 나섰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말이다.
그리고 루니는 길게 보고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수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런 루니에게도 어쩌지 못하는 게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베스타인 공작, 할아버지다.
“베스타인 공작이 황제 폐하의 전쟁 의지를 억누르고 있지만, 그 외의 것은 무척 협조적. 아니 주도하에 일을 끌면서도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폐하를 배려하고 계시지요.”
그건 안다.
전대 황제와의 관계 때문에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참고 있으시다. 전쟁은 용납지 않고 싹을 자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네. 일단 그 두 분의 관계를 흔드는 것이 루니 백작의 최우선 목적일 것입니다.”
“내분이 있는 상황에서, 또 전쟁의 상황에 제국이 불리해질 수도 있는데?”
“오히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뭘? 내분? 전쟁 상황?”
제레미는 검지와 중지를 펴며 말했다.
“두 가지 전부입니다. 상황 자체가 악화되어야 루니 백작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집니다. 막말로 제국이 역공을 당하면 최선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는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루니 백작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전쟁이 본격화되면 베스타인 공작은 황제를 배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고, 국내 정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실 테니까요.”
“외교가 엉망인 이유가 있었군!”
“노예 무지렁이를 데려다 놓더라도, 지금만큼 타국의 적의를 끌어내지는 못할 테지요.”
단순한 내용이 아니었다.
또 루니 백작이 정말 그 정도까지 내다보고, 일을 기획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결국, 황제는 잡아먹히겠군.”
“그게 또 말입니다.”
“뭐가 또 있나?”
“아직 완벽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황제 폐하는 알려진 것처럼 그리 우둔하지는 않으십니다.”
“지금 말을 들으면 루니 백작의 꼭두각시 아닌가?”
“의도적입니다.”
제레미는 확정하듯 말했다.
“제국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고 하지요.”
“…….”
“절대자가 둘 일 수 없는 법. 황제 폐하는 베스타인 공작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싶어 하십니다.”
“루니 백작을 이용해서?”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로를 자신의 말처럼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저희 길드 입장에서는 루니 백작보다 폐하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더 힘듭니다.”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
“바로 보시는군요. 맞습니다. 루니 백작은 자신의 손바닥에 황제 폐하를 올려놓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으음.”
“백작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둔한 황제처럼 보이지만, 결국 권력을 움켜잡고 있는 건 폐하이시니까요. 루니 백작은 거기서 흘러나온 물을 마시고 있을 뿐.”
“재미있네.”
“아직 100퍼센트 확신하지 못합니다. 어떠한 사실은 무조건적으로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의문 가는 게 있어서 물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푸는 것 아닌가? 지금의 황제 폐하는 우둔한 것 정도가 아니라 머저리로 보일 정도야.”
제레미는 계속 듣고 싶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날 쳐다봤다. 그런 그를 보며 내가 본 것을 말했다.
“루니 백작의 성이 황성보다 더 사치스러운 것은 알고 있나?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그건 귀족들의 마음에 서열을 보여 주게 된다. 몇 년이면 자기가 키우던 개에게 물리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로라스 백작님 같은 분을 정계로 끌어들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
“부른 건 루니 백작이었겠지만, 전권과 함께 백작 위를 준 건 황제 폐하의 뜻이었을 겁니다.”
제레미는 계속 말했다.
“황도 수비대장은 루니 백작이지만, 그 수비대의 주축은 폐하의 친위대. 폐하는 그들만큼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십니다. 그리고 젊은 귀족들을 의도적으로 중앙에 진출시키고 계십니다.”
“…….”
“물론, 겉보기에는 모두 루니의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중 몇이 황제 폐하의 사람일지는 저희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건 저희도 전력으로 달려들어야 알아낼 수 있는 일인지라.”
그때 아델리나가 말했다.
“황제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맞습니다. 백작님.”
“뭐 알고 계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델리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의 사자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를 만났습니다.”
“무슨 대화였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때문에 백작님을 이리로 모신 겁니다. 큰 그림을 그리실 때 이런 상황도 아셔야 할 테니.”
이야기는 길어졌다.
* * *
“그간 감사했습니다.”
로라스의 작별 인사에 아마란체 후작은 옅은 미소로 답했다.
“내가 한 게 뭐 있나? 백작이 현명하게 처신하여 오히려 내가 고맙지. 덕분에 내가 숨통이 트였어.”
아마란체 후작은 에렌과 베스타인 공작을 위해 황도에 있는 사람. 하지만 그는 북부 출신의 귀족이다.
고위 귀족이라 하나, 지지 세력도 없는 상황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로라스의 활약은 아마란체 후작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로라스와 연줄을 갖고 싶은 귀족들은 많은데, 그 소통 창구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가능한 창구는 아마란체 후작.
그 탓에 떠나기 직전까지 수많은 파티로 피곤은 했지만, 로라스는 기꺼이 그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로라스 일행은 크라운을 떠났다.
크라운에 들어올 때 자신을 포함 단, 세 명이었는데. 지금은 수십여 명이 모인 행렬.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일정인 듯싶다.
백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지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양가가 없었다.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다.
특히나 아델리나, 그녀의 합류는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온 정보 조직과 에펠리온 교단은 락의 성장을 폭발시키듯 늘려 줄 거라는 기대감이 잔뜩.
‘좀 의외이긴 하지만.’
아델리나 동행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일단 교단 후계 다툼이 우선일 텐데 말이다.
크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현명한 사람이니 무슨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큰 도움을 받았으니 언제든 그녀를 도울 생각도 있었으니까.
다음으로는 판드와 쥬니스가 있었다.
판드를 장기 고용했다.
특출난 능력은 없지만, 곁에 있으면 즐거운 사람. 내가 그리 느낄 정도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겠는가. 어디에 쓸지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용했다.
사실, 용병은 방랑벽이 있어 이런 장기 계약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판드는 돈만큼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나이트 플라워 쥬니스.
본명이 아멜리에라고 했지만, 쥬니스란 이름이 입에 붙어 계속 그러기로 했다.
암살자란 게 밝혀진 후 그 처리를 어찌할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아델리나에게 구속당한 이후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 사람이라기보다는 아델리나의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지만, 같은 배를 탄 건 사실.
그다음으로는 까미유, 까메유 형제를 비롯한 젊은 군관들이다.
사내들에게 이런 비유는 그렇지만, 이제 막 개화되는 꽃 같은 존재들.
인성과 근성을 확인한 녀석들이다. 무엇보다 야망이 큰 녀석들이다.
뭘 맡겨도 제 몫을 다할 것이다.
‘여기서 버텨도 좋겠지. 하지만 기회는 북부에 있을 거야.’
이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야망이 있다 보니 계속해서 클 수 있는 뭔가를 원했고, 난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다.
‘중간 관리자가 지녀야 할 능력은 충분하니까.’
락이 겪고 있는 극심한 인재난은 이들로 인해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일이 많았는데 대충 정리된 느낌이네.’
락에서 에렌 그리고 크라운. 정신없이 움직인 느낌이다.
물론 그건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여전히 할 일은 많았고.
‘에렌에서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황제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곧 에렌에도 영향이 올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후계 싸움이 막 시작된 상황이다.
‘내가 신경 쓸 게 있나. 난 내 가족, 내 사람들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정리하니 로라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곧 부모님을 볼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