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7)
임프리아 왕국이 멸망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지만 소수의 사람에게는 의외의 결과였다.
그들은 이 전쟁에 어떤 용병단이 참여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켄트라미우스.
가벼운 이름의 용병단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용병단이 제국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이리 허무하게 함락돼서는 안 됐다.
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임프리아가 그 정도의 국력으로 왕국 행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그들을 비호했기 때문이었다.
임프리아를 비호한 이유?
간단하다. 돈이 되니까.
자국 내의 범죄자들을 그리로 빼돌려 주면 목돈이 들어오고, 이후에도 꾸준히 상납금을 바친다.
벌써 수십 년째 유지된 사업이고, 얽힌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왕국이 무너졌다.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말이 흘러나올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들은 손을 써야 했다.
* * *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 임무는 최악의 결과를 나타냈다.
인명 피해가 큰 건 아니었다.
적과 직접 싸운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최강의 용병단원이었다는 그 자존감이 깨졌다.
게다가 하늘 같았던 대장이 직접 나섰음에도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희는 잘못이 없다.”
켄트라미우스의 대장 카벨로가 그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심하고, 적을 조사하지 않은 건 내 책임이지. 너희 책임은 아니다.”
손도 못 써 보고 패배의 쓴맛을 느끼고 있던 용병들이 카벨로에게 집중했다.
“난 모욕을 갚아 줄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모두가 두 눈을 빛냈다.
이번에 아무 소득이 없다지만, 대장이 저런 열의를 보였다면 반드시 이뤄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카벨로는 생각했다.
‘이들의 신망을 잃을 수는 없지. 어찌 키운 자들인데.’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집단, 세력이라는 게 필요했다. 실제로 칠 인의 좌에 있는 이들 모두 세력을 이끌고 있다.
자신에게는 이들이 바로 그런 세력.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 자리를 잡고 확장의 시기에 제대로 발목을 잡힌 느낌이었다.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성녀라 불리는 아델리나는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자존심은 회복해야 다음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법.
‘로라스, 그 애송이는 언제든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뒤늦게 로라스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상세한 보고서는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받아 본 내용으로 판단했을 때 로라스는 운을 타고 난 애송이. 하지만 가진 실력은 있고,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높은 귀족.
이 정도가 카벨로의 평가였다.
그리고 그 정도면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준은 아니다.
적으로서 위협이 되는 건 성녀였다.
가진 실력은 이미 본 바 있고, 그녀 뒤에는 에펠리온 교단이 있다. 자칫하다면 그녀를 죽였을 때 역풍을 맞을 확률이 있다.
교단을 상대로 할 때는 늘 그런 위험이 있으니까.
‘거기가 아마 후계 싸움이 한창이지?’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듯싶었다.
* * *
사라락.
사라락.
방은 오로지 종이와 종이의 마찰음만 들리고 있었다.
벌써 네 시간째.
로라스와 렌, 아델리나, 세 사람은 그리 보고, 또 볼 뿐이었다.
“하아아!”
그러다 아델리나가 다른 소리를 내자 로라스와 렌의 시선이 슬쩍 그녀에게 향했다.
“재미있네요.”
그리고 아델리나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임으로 동의했다.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이 종이 뭉치들에 적힌 글자들은 재미를 넘어 기발함까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등쳐 먹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기 한 몸 무사히 빼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뇌물을 먹이고, 그 가치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정말 사기꾼, 범죄자들의 정석, 그것을 활용한 갖가지 방법이 가득이었다.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아니, 그러니 이런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로라스 역시 흥미롭게 읽으며 생각했다.
‘고개가 너무 뻣뻣하다고 생각했더니.’
지금 자신들이 읽고 있는 건 임프리아 왕이었던 슈카가 준 서류. 그것도 가지고 있는 것 중 5퍼센트도 안 된다고 했다.
‘맛보기가 이 정도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슈카는 그것을 넘겨주는 대가로 안전은 물론이고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로라스로서도 깜짝 놀랄 만한 돈.
그는 렌을 보며 물었다.
“어때? 도움이 돼?”
“이거…… 몸값으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숨기고 있는 것들이 모두 이 정도라면 말이지요.”
아델리나도 말했다.
“저라면 더한 것을 요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똑똑한 사람입니다.”
렌이 옆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서류들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담이 큽니다. 서류상의 인물들이 그냥 두고만 볼 리 없을 테니까요. 슈카 왕도 그것을 아니, 딱 그 정도의 요구만 했을 것 같습니다.”
“부담이라…….”
로라스가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에 렌이 설명하듯 말했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칼을 그냥 두고만 보겠습니까? 슈카 왕은 그 칼을 쓰지 못하지만, 소영주께서는 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테고.”
“날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자칫 우리도 벨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는 충분하다 했으니.”
“네. 잘 써먹을 수 있습니다. 예전의 락이라면 빨리 넘겨야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니까요.”
렌은 슬쩍 아델리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도 소영주님을 도와주고 계시니.”
“그럼 거래는 계속해야겠군.”
“네. 그런데…… 슈카 왕의 요구가…….”
“또 뭐가 있나?”
“자신의 안전을 소영주와 영주님의 이름으로 확실하게 해 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간도 자신이 죽을 때까지라고 정해 놨는데.”
“똑똑한 놈이네.”
상대가 누구든 뱉은 말은 지키는 로라스다.
“하지만 평생은 곤란하지. 오 년은 확실하게 보호해 준다고 해.”
로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델리나를 보며 물었다.
“아델리나 님에게도 도움이 되십니까?”
“교단에 이런 걸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델리나 님의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돕고 싶군요.”
“제가 무슨…… 그래도 그리 말씀해 주시니 힘은 되는군요.”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도 희망과 믿음이란 게 생겼으니.”
광신도는 곤란하지만, 적절한 수준의 믿음이라면 종교는 도움이 된다. 게다가 락은 앞으로도 각 나라, 지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터.
종교라는 공통점으로 묶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만한 위험이 있긴 했지만, 아델리나가 에펠리온을 장악하고 좋은 관계만 유지하면 그것도 문제는 아닐 듯싶었다.
‘여하간 큰 건 처리 했으니.’
황제가 만족해할 만한 승리일지는 모르겠으나, 최소 그가 원했던 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다음을 준비할 차례. 무엇보다도.
‘곧 돌아갑니다. 어머니, 아버지.’
가족이 보고 싶었다.
* * *
별거 아닌 지역이라지만 점령한 이상, 누군가는 치안 안정을 위해 남아 있어야 하는 법.
로라스는 그것을 메리어트 남작에게 떠넘겼다.
주된 전공은 자신에게 줄을 댄 귀족들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로 만든 군관들에게 넘긴 상황이다. 이 정도는 넘겨 줘야 귀찮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려해 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메리어트 남작의 감사 인사를 받은 건 덤이다.
눈치 빠른 사람이니 중앙 정계에서도 오래 살아남을 터. 빚을 하나 지워 둔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것도 나름대로 소득이라면 소득일 터.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우선이 그대의 안전이다. 렌.”
“번천 경이 함께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겠습니까?”
“적이 많아지지 않았나. 경계를 늦춰서는 안 돼.”
“숫자도 많습니다. 그래도 전쟁 경험이 있는 이들이니, 호위병력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락으로 이동시켜야 할 사람의 숫자가 만 명에 가깝다.
오랜 노력 끝에 희망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예상보다는 일이 수월해질 테지만. 그래도 힘든 일이다. 시간도 오래 걸릴 터이고.
“성기사 몇 분과, 사제들을 몇 따라 붙일 겁니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아델리나의 말에 렌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델리나 님의 도움을 또 받게 되었군요.”
“교단을 위한 일이니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준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렌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출발했다.
“저희도 가지시요.”
“네.”
로라스와 아델리나도 움직였다. 크라운으로 귀환할 시간이었다.
* * *
“잘하고 돌아왔다.”
“과찬이십니다.”
“아냐, 잘했어. 잘해 줬어!”
황제는 크게 기뻤는지 연신 같은 말을 하자, 로라스는 말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 아군에 큰 피해가 있습니다. 죄를 청합니다.”
“아! 그 이야기 들었어. 아주 큰 함정이었다지?”
“소신도 마법을 배웠지만, 그런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겼다면서. 적의 포로들이 아군이 되고 싶어 할 정도로.”
로라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짐이 전쟁을 모른다 하나, 승패가 운으로 갈리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아. 듣자니, 다른 사람이 지휘관이었으면 전멸했을 거라 하더군.”
“그 정도는…….”
“짐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건방져 보이지. 뭔 딴 뜻이 있는 게 아닌가도 생각되고.”
멍청하다고 생각한 황제가 뜻밖의 말을 하니 로라스로서는 의외.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저 폐하의 명령을 완수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 말해 주니 짐으로서는 기쁘기가 더 없다. 백작의 명령을 어기고 돌격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귀족들을 감싸는 것도 놀랍고.”
순간 로라스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지금 황제는 떠나기 전의 황제는 좀 달라 보였다.
‘권력에 관련된 거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멍청해도 태자 시절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자이니, 본능적으로 뭔가를 감지해 냈을지도.’
그때 황제가 말했다.
“꽤 재미있는 말도 들었지. 이러지 말고 내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참석하겠나?”
“영광입니다.”
“그럼 내일 저녁에 다시 보지.”
“네. 폐하.”
그렇게 황궁을 나서며 로라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변화는?’
황제는 멍청하다.
자신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도 황제를 보며 권력욕만 앞서는 우둔한 놈이라 했다.
하지만 오늘 만남, 대화의 뉘앙스는…… 정말 권력의 정점에 선 자 그 자체였다.
‘그새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로라스가 그렇게 나올 때 밖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라스 백작님.”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로라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온스 경.”
“긴히 모시고 싶다는 성녀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녀님께서요?”
별 의심 없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탔다.
마차 안에서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온스 경의 기사단도 이번에 전공을 세우셨는데 이번에 거론되지 않아서…… 제가 죄송합니다.”
온스는 황급히 말했다.
“저희가 한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성녀님을 호위했을 뿐인데요.”
“그것 자체가 막중한 임무 아니겠습니까? 이번 전쟁은 성녀님의 공이 반이니, 그분을 보호한 온스 경의 공도 크지요.”
빈말은 아니다.
용병 마법사라는 변수가 있긴 했었지만, 원래 이겨야 하는 전쟁. 그런 전쟁을 엄청나게 돋보이게 만든 건 성녀가 만든 작품이다.
황제가 그토록 기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말이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 끝에 마차는 작은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응?’
신전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좀 걸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작은 골목 앞에 마차를 대고 온스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이상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그냥 하나의 골목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돌고 도는데 무슨 미로 같은 느낌이다.
그 작은 골목을 한참 그렇게 도니 작은 목재 건물이 나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한 사내가 우릴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