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5)
병영에서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엄숙하면서도 이상하게 편한 분위기의 장소.
두꺼운 천과 가죽 따위로 공간을 만들었고, 화려한 마법 등이 아닌 초와 기름 먹인 심지를 태워 안을 밝히고 있었지만…….
“신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그 장소에는 성녀가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무시되었다.
전장이 아니라 지옥에 던져 놔도 그녀가 있는, 이 임시 신전은 늘 이런 분위기를 유지할 것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성녀는 사람을 만나 주었다.
대부분 노예 출신의 병사들.
하지만 그들도 눈과 귀가 있었다.
사제 한 명 보기 힘들던 자신들이 귀족들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성녀에게 축복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임시 신전에는 매우 많은 횟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는 많았지만, 대부분 그냥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운에 감사했다.
성녀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게 해 줬지만, 워낙 참석자가 많아 하루 쉰여 명의 사람들만 신전으로 들였기 때문이다.
똑같은 날이었다.
대부분 그녀를 보며 울었고, 그녀가 내리는 축복에 감격하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는 끝났다. 그만 나가라.”
그 시간 동안 성녀를 호위하던 성기사 하나가 여전히 공간에 남아 있는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두꺼운 후드를 쓰고 있었다.
사실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신 앞에서 자신이 부끄럽다고 후드를 눌러 쓰는 교인은 늘 있었기 때문이다. 심하면 엷은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교인까지 있었다.
게다가 성녀의 예배에 크게 감화되어 정신 못 차리고 저렇게 남아 있는 교인들도 가끔은 있었기에.
“끝났대도.”
그래서 성기사는 늘 그랬듯 그 교인을 내보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툭.
남은 교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성기사의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꽉 깨물었다. 동시에 어깨에 올린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성녀는 이상함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호흡 몇 번 하는 그 시간뿐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성기사가 이미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바닥에 두꺼운 양탄자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놀랐나?”
후드에서 흘러나오는 얇은 목소리.
남자라 하기에는 가늘고, 여자라 하기에는 두꺼운 그런 묘한 중성적인 느낌이 났다.
“에펠리온의 성녀를 한 번 보면 몇 달을 잊지 못한다고 하더니……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워, 당연히 그럴 만해.”
얼핏 들으면 성희롱처럼 들렸으나 또 달리 생각하면 진심이 담긴 찬사.
“그래서 고민 중이야.”
“…….”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후드는 마치 하나의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아델리나를 살폈다.
“계획을 좀 바꿔야겠네. 죽이려고 왔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
“고맙지 않아? 내가 마음먹은 걸 철회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지. 대신 넌…….”
후드가 계속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너 누구니?”
“뭐라?”
“누군데 그렇게 개소리를 지껄이지?”
후드는 잠시 흠칫했다.
* * *
즉흥적인 계획이긴 했다.
사실 계획을 세워도 제국의 진군 속도가 빨라, 충분히 준비할 시간도 없긴 했다.
물론 크게 신경 쓸 것들은 아니다.
중요한 건 목적을 이루는 거 아니겠는가?
오랜만이다.
이리 손쓰기 위해 직접 움직인 건 말이다.
신전을 찾은 이유는 에펠리온 교단이 눈에 거슬렸던 탓이다. 그리고 접근하기가 쉬웠다.
성녀에게 이리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줄, 사실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겸사겸사라고 봐도 좋았다.
성전을 선포한 교단.
성녀를 죽이면 부대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 분명할 터.
그러면 의뢰인인 임프리아의 왕의 심기를 달래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아쉬웠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개똥철학과 비슷한 설교를 하는데,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미모 덕분인지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여색에 그리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만한 여자를 보니 흥이 동했다.
그래서 살려 주기로 결정했다.
노예보다는 동반자로 삼으면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도 했다.
일단 정신 마법으로 세뇌하던, 아니면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보여 주던, 그녀를 포섭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너 누구니?”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지만, 가지고 있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위화감을 넘어선 그 알 수 없는 변화에 카벨로는 잠시 당황했다.
“누군데 그렇게 개소리를 지껄이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 재미까지 있구나.”
그 말에 아델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그 용병 마법사인가?”
“날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어찌 알았지? 극비인데.”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보기보다 말이 거칠구나. 이러면 좋은 첫인상을 망치는데.”
“너 보기 좋으라고 있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아델리나는 이를 살짝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닐 정도로 자신감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든.”
저급한 도발이다. 보통 효과는 확실했지만, 카벨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오히려 자신의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하긴 했지.”
머리가 세었는지? 아니면 원래 은발이었는지 묘하게 밝은 흰 머리였다.
카벨로는 그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어떤가? 이제 좀 달리 보이나?”
“풋! 누구에게 들이대는 거지? 그딴 걸로?”
계속되는 도발에도 카벨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린 계집의 말 따위에…….’
그리고 스스로 경계했다.
자신은 어디 탑에 틀어박혀 마법만 연구하는 그런 마법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산전과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다.
그런 자신이 고작 저런 도발에 기분이 상한다는 게 이상했다.
세상에 필연을 가장한 우연은 있어도, 그냥 우연은 없다. 자신을 호위하던 성기사 하나를 손 한번 대지 않고 쓰러트렸음에도 저따위로 나오는 건 둘 중 하나다.
철딱서니 없거나, 아니면 인지했음에도 스스로 지킬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성녀쯤 되면 사람도 많이 대했을 터, 그렇다면 후자일 것이다.
지금 자신이 왜 저딴 도발에 넘어가는지 납득하니,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아델리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신의 심공을 저리 빨리 떨치는 놈도 드물었다. 사실은 정체를 몰랐던 로라스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다.
‘그저 그런 놈은 아니란 말이지?’
물론 그녀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로라스에게 단지 준비된 함정을 판 놈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준비했다고 해도 그만한 위력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적당한 긴장감. 그리고…….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네가 운이 좋은 건지.”
“그건 뭔 소리지?”
“나와 너, 모두가 운이 좋은 걸로 하자.”
아델리나는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카벨로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운이 좋은 건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음이고, 네가 운이 좋은 건 최소한 발악이라는 걸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냐?”
“여기까지 오고, 아까 개소리를 한 걸 보면 그분을 어찌해 볼까 해서 온 것일 터. 혼자 그분을 상대로 했다면 힘이나 써 볼 수 있을까? 그래서 네가 운이 좋은 거지.”
카벨로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은 너도 날 상대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내가 제대로 파악한 거 맞나?”
아델리나는 예배 때문에 걸치고 있던 사제복을 벗으며 말했다.
“너도 시끄러운 건 원하지 않을 테고, 나 역시 너 정도의 문제로 쉬고 있는 병사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
그녀는 자신의 하얀 두 손바닥을 안쪽으로 보게 한 채로 들며 말을 이었다.
“어때? 여기서 멀쩡히 걸어나갈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인 걸로 약속하는 건?”
카벨로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멀쩡히 나가면서 네년은 내가 끌고 가는 걸로!”
말하기가 무섭게 앞으로 내밀어지는 오른손. 그리고 동시에 왼손은 등허리 춤으로 가져갔다.
순식간에 그의 오른 손바닥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델리나가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그녀의 선택은 전진이었다.
‘걸렸구나!’
자신에게 순식간에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카벨로는 쾌재를 불렀다.
자신은 마법사. 하지만 마법 주문을 외우지 않는 것은 함정이었다.
보통 마법사에게 스태프는 매우 중요한 도구. 명중률도 그렇고 마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맨손으로 그것도 주문이 없는 걸 보고 근접전을 선택한 것 같은데, 그게 그녀의 패착이 될 것이다.
‘탄!’
자신은 스태프 없이도 그리고 주문 없이도, 마나탄을 쏘아 낼 수 있는 고위 마법사이니까.
하지만 카벨로는 의외의 상황에 놀랐다.
파아앗!
마법사에게 스태프가 중요한 것처럼, 성직자에게도 도구는 중요하다.
어떤 직업이든 안 그러겠는가?
검사가 검이 중요하듯 말이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맨손으로 자신의 마나탄을 날려 버렸다. 그것도 무척이나 깔끔하게 말이다.
성직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성직자들이 치료 마법이나 강화 마법만 쓸 줄 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떤 성직자들은 강력한 무투가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체술과 각종 무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다.
지금 보니 그녀는 후자였던 듯했다.
“어울리지 않게. 내가 나중에 얌전해지도록 많은 교육을 시켜 주지.”
놀라기는 했지만,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오히려 더 안심되었다.
괜히 마나와 신성력 대결이 펼쳐지면, 시선만 끌지 않겠는가?
‘날 죽이겠다고 눈이 벌게져 달려드는 놈이 몇인데? 그중에 근접전을 좋아하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카벨로는 마법사이지만, 근접전 경험은 웬만한 기사들 뺨칠 정도로 많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아델리나를 보며, 카벨로는 등허리로 돌렸던 왼손을 끄집어내었다. 그 손에는 어른 팔목 길이의 작은 봉이 들려 있었다.
“발현!”
보통 주문에서 무슨 계열의 마법일지 추측하는데, 카벨로는 단지 두 글자만으로 마법을 펼쳐 내었다.
‘발칙한 것. 꽤나 건방을 떨었다만!’
성녀라고 오냐오냐 떠받들어 주는 것들만 있었나 보다. 제 주제도 모르고 이리 덤벼든 것을 보면 말이다.
완드에서 붉은빛의 기운이 쏟아져 나갔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보다 더 강한 푸른 불꽃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 절명할 수도 있겠다 싶어 위력을 낮춘 마법.
……!
하지만 카벨로는 곧바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까지 드러난 얼굴.
카벨로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더 폭발시킴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허리를 뒤틀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그녀의 하얀 손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투 마법사란 게 이런 건가? 움직임이 정말 기민하네. 감탄했어!”
여유롭게 자신을 보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카벨로는 분노를 터트렸다.
“제대로 해 주마!”
카벨로는 다시 몇 걸음 더 물러나며 제대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완드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다려 줄 만큼 한가하지는 않거든.”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아델리나가 달려들었고, 카벨로도 전의를 돋으며 소리쳤다.
“잡아 죽여 주마!”
매지스터, 칠 인의 좌 중 하나. 그 모든 것은 그냥 얻은 게 아니었다.
아무리 이용 가치가 있어도, 이런 모욕을 준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