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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83화 (183/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3)

“후우우욱!”

전신에 열기가 후끈했다.

활력이 전신에 가득한 기분.

육체에서 느껴지는 활력 자체가 죄책감이 들 정도의 상황이었는데도, 감각만큼은 정직했다.

가진 여력을 이리 전부 발휘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

그만큼 냉정해져야 했다.

현재 내력을 다 소진시켜야 하는 적이다.

‘이런 마법사를 왜 여태 모르고 있었지? 흑마법사라 그런 건가?’

헤르메스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대륙의 알려진 마법사의 이름은 대충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흑마법사는 워낙 은밀히 움직이는 존재이니, 일단은 무조건 조심하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에르자일을 데리고 왔어야 했나?’

아니다.

그녀가 어머니 곁에 있으므로 마음 놓고 에렌을 떠날 수 있었다.

‘마법사라…….’

일반 마법이 아닌 흑마법에 대한 지식은 남들이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으음, 불가 계열의 무공이 뭐가 있었더라.’

흑마법에 사술 같은 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나에 사악한 기운이 들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항마(降魔)가 들어있는 무공이면…….’

머릿속에 든 무공은 많지만, 개천지보와 천왕계열의 무공을 제외하면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무공들이다.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적에게 시간을 주게 되다는 것이다.

또 오늘과 같은 마법을 준비하면 곤란해진다.

‘들어간 제물과 마나석을 생각하면…… 임프리아에 그런 마법을 펼칠 재력이 있을까?’

마나석 이외에 제물까지 들어간 마법진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물로 쓰인 건, 많이 낡아 보이는 물건들인 걸로 보아, 이 세계의 유물 같은 게 아닌지 추측했다.

단순하게 낡은 물건이 무슨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터이니, 뭔가 사연이 있는 그런 물건들. 당연히 값나가는 물건일 것이다.

“로라스 백작님, 메리어트 및 주동자들을 체포해 왔습니다.”

밖에서 까미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가니, 까미유와 병사들이 메리어트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을 포박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적에게 사로잡혀도 이런 대접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날 보자마자 원성을 쏟아 내는 사람들.

‘단순히 명령 불복종으로 처리해야 할까?’

저쪽 세계라면. 명령 불복종은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 세계는 좀 달랐다.

귀족들의 목을 날리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 또 적에게 사로잡혀도 돈이 문제지 목숨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군 병사들은 굶어도, 포로로 잡힌 귀족은 잘 먹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깔끔했을 텐데 말이지.’

일단 목을 날릴까도 고민했다.

이유야 일단 죽인 후에 만들어도 된다.

전장에서 전사 처리시키면 가문에서 좋아할 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한 건, 적의 함정이 훌륭해서였다. 내가 끌고 갔다고 해도, 피해는 필연적이었을 터.

‘그래도 이대로 놔주기에는 괘씸하지.’

고심하기 시작할 때 메리어트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 이 한목숨을 받쳐 반드시 만회할 것입니다.”

정말 약삭빠르다. 다른 놈들은 원성을 쏟아 낼 때 용서를 구한다.

별 능력도 없는 놈이, 루니 백작의 수족이 된 이유도 이런 눈치 때문일까?

“명령 불복종이 그 첫 번째 죄. 그렇게 공격했음에도 대패한 것이 두 번째 죄. 메리어트 남작.”

“네. 백작님.”

“이런 경우 크라운에서는 어찌 처벌을 내리지?”

“둘 다 가볍지 않은 죄입니다. 근신 처벌은 물론이고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겠습니다.”

보통 이럴 때 죽여 달라고 말하는데,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지휘권을 모두 박탈하겠다. 막사에서 근신하라. 데리고 있던 병사들은 재편성하여 다른 지휘관들에게 배치하겠다.”

“승패는 병가상사. 어찌…… 한 번 패했다고 이런 법은 없습니다.”

“내 병사들은 정규병들이 아닌 사병들. 우리 가문을 위해서 싸워야지, 다른 곳에 배치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래도 본보기로 몇 놈 죽여야 할 듯싶다. 평상시라면 무시할 수 있는 일이나 거슬리는 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 기회에 지휘 체계를 바로 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죽으면 다 끝이지요.”

그때 나서는 이가 있었다.

“악에 죽으면 구원의 기회도 없을 터. 그리고 그대가 이끈 병력 전부가 사병은 아니었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어찌 지질 건지요?”

나선 이는 아델리나였다.

* * *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아델리나가 반문해 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담이 클 것입니다. 크라운에서 악의를 품은 가문도 생길 것이고.”

“제가 부담을 지는 게 낫지요. 현재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그리고 악의는커녕 고마워할 것입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말입니다.”

아델리나는 자신이 가진 힘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오늘도 교단의 힘과 분위기를 잘 몰아 귀족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이해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저리 호언장담하는 이유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혹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다면 제게 미루십시오. 제가 이 부대의 책임자이니까요.”

“그럴 역량도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전쟁 이외의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대체 어쩔 생각인가?

“여러모로 도움을 받는군요.”

“저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아까 해 주신 말씀.”

“무슨…….”

“백작님의 이름을 이용해도 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내게 미루라고 한 말이었는데 말이다.

여하간 여태 지켜봐 왔던 그녀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아 허락했다.

“그리고 이번에 전장에 펼쳐진 마법 트랩 말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봤으니까요.”

본 사람은 많지만, 나 이외에 전장에 마법 트랩이 존재하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델리나가 처음이다.

‘혹시?’

흑마법이니 만큼 성녀인 그녀가 뭔가 눈치챈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마법인지 알고 계십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 트랩입니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서 단일 마법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없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렸던 것이지요.”

“…….”

“정말 잘 만들었지만, 미리 알면 피하면 그뿐인 함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요?”

……!

“백작님께서 적을 너무 거대하게 보시는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지나치면 모자람과 같은 법입니다.”

새로운 관점을 가진 의견에 머리가 다 맑아지는 느낌이다.

“별거 아니었군요.”

“네. 물론 이 정도로 구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도 인정은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겁을 먹은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지레 너무 많은 걱정을 한 것도 사실.

“감사합니다. 개안한 느낌입니다.”

“저야말로, 그곳에서 활로를 여신 걸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감탄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 * *

병사 대부분이 한동안 멍한 얼굴로 지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기에, 그냥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곱씹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물론 대부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눈만 감으면 그 감옥이 생각나기에.

생각만 하면 당장이라도 그 미칠듯한 화마가 자신을 덮칠 것 같기에.

일부러 외면하는 자들.

그리고 그 전부를 보며 말하는 병사들.

“전멸할 뻔했다면서?”

“전멸, 그 말이 딱이지. 그냥 죽으면 다행이게, 타 죽는 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로라스 백작님이 어떻게 구한 거야?”

“하아!”

“…….”

“하아!”

“하아! 뭐? 말을 해야지.”

“못 본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게 뭔 소리야?”

곁에 있던 병사가 끼어들었다.

“그 지옥을 구경만 했더라도 밤잠은 다 잤을 거야. 그러니 다행인 거고. 평생 다시 못 볼 광경을 놓쳤으니 불행인 거지.”

“아니, 그러니까 로라스 백작님이 어떻게 구한 거냐고!”

“그게 어떻게 표현을 못 하겠네. 그냥 창을 휙휙 휘두르니까 길이 열렸다고 해야 하나?”

“그게 뭔 개소리야?”

“그래, 내가 한 말이지만 나도 그리 느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던 병사들은 두 부류다.

까미유, 까메유 형제와 함께 따라나섰던 병사들. 그리고 그 후에 도착한 병사들.

전자는 지옥을 보았고, 후자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매우 궁금해했고, 지금처럼 전자를 잡고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에 해답을 명쾌히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답하던 병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아니셨다. 그냥 그렇게 정리하자.”

질문을 던진 변사들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은 다른 곳에서 들을 기회가 생겼다.

“에펠리온 님의 가호라고 로라스 백작님과 함께하신 거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이.

“그건 포스가 아니었고, 마나도 아니었습니다. 신성력에 가까운 힘이에요. 그건.”

에펠리온 교단의 성녀 아델리나.

사실 그녀가 이 전쟁이 성전이라 선포라 했을 때 만해도 말들이 많았다.

임프리아가 악의 축 가운데 하나라지만, 그 세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교단이 전면에 나서, 임프리아 척살을 외치며 성전이라 포장했다.

그걸 곧이곧대로 듣는 순진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제국 황제와 모종의 결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권과 교권이 만든 모종의 계약.

“성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로라스 백작님은 에펠리온 님의 대리인으로 성스러운 힘을 발휘하신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노라면, 이게 정말 성전인 것 같았다.

“신입니다. 그분은.”

“성전에 몸 바칠 수 있었으니 죽어도 원한이 없습니다.”

“신의 역사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영광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전쟁의 당사자들.

“회개할 겁니다.”

“그분만이 저의 구원자이시며, 앞으로도 평생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아군뿐만 아니라 임프리아의 포로들도 한결같이 같은 말을 하니, 긴가민가하던 것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리 지휘관은 신의 대리인이다.”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악마의 술수도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아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그리고…….

“저희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포로들은 같은 편이 되어 싸우길 원했다.

이 현상은 광풍과도 같았다.

그 탓에 지휘관인 로라스의 위엄에 손상이 갔다.

그들은 로라스를 지휘관이기 전에, 하나의 신앙의 상대로 받아들였다.

신은 모두를 사랑하는 존재.

그런 이유 때문인지 로라스를 무서워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라도 한번 들으려 했고, 자신과 손길 한번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모든 것을 끝내고 평화롭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들은 사제나 신에게 기도해야 할 것들을 로라스에게 바라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현상에 로라스는 골머리를 앓았다.

종교를 사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그는 자신을 신으로 대하는 자들을 보며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화를 내고, 처벌하지 못했다.

웃는 얼굴에는 침 뱉지 못한다는데,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이들에게 벌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좋은 점도 있긴 했다.

“신의 말씀이다!”

“걸어라! 고난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로라스의 명령은 신의 말씀이 되어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었으며…….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안내하셨다.”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무엇보다 노예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선사했다.

그렇게 로라스와 그의 군대…… 아니, 신도들은 임프리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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