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2)
솔직히 누군지 잘 몰랐다.
“놈!”
벌게진 눈, 떨리는 전신.
하지만 놈이라 자신을 칭한 놈은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실, 문제 될 건 없었다.
어디 이런 놈이 한둘이었던가?
죽인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지하고 있는 원한이 수두룩한데, 인지 못 한 원한이 수배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놈의 경우 후자인 걸 보면 별 볼 일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볍게 손을 쓴 것이 화근이었다.
스팟!
마나 탄 하나면 죽을 놈일 줄 알았는데, 그것을 검으로 갈라냈다.
그것도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매우 깔끔하여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오랜 경험상 이 정도의 위력은 놈이 마스터, 또는 그에 근접할 만한 경지라 봐야 했다.
뭐, 그래 봤자 별 볼 일 없는 놈은 아니라는 수준으로 격상된 것뿐.
하지만 그만한 실력이라면 충분히 자신에게 덤벼들 수도 있었을 텐데, 놈은 곧바로 몸을 빼내었다.
아마도 자신들이 준비한 함정을 제국에 알리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놈을 향해 마나 탄이 아닌 정식으로 마법을 날렸다.
마법은 라이트닝.
놈처럼 검을 쓰는 놈들이 가장 애를 먹는 마법.
터어엉!
하지만 놈은 그것을 막아 내었다.
피한 게 아니라 막아 내었다.
이건 정말 많은 걸 의미했고, 놈이 별 볼 일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마검사?’
어린놈들이 겉멋에 검과 마법을 동시에 하겠다고 설치는 놈들 따위와는 달랐다.
그런 놈들이라면 마나 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검사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마법을 제대로 무효화시켰다.
그건 마법 경지 역시 상당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마검사.
애매모호한 경지의 조합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물론 그때까지 걱정하지 않았다.
매지스터.
그 단어는 꽤 많은 이에게 주어졌지만, 그중 몇몇은 그 급이 달랐고, 자신은 그 몇몇 중 하나.
오랜만에 긴 시간 공을 들여 주문을 완성했다.
이미 점에 가까워질 정도로 멀었지만, 더 멀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완성해 낸 죽음의 추적자는 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경지로 봐서 이 마법 하나로 죽지는 않겠으나, 발목을 잡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의 수하들이 가서 죽이면 그만.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죽음의 추적자가 놈과 접촉했음에도 놈의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제대로 된 주문을 말을 타고 도망치면서 무효화시켰다?
그런 경지면 여기에 있을 필요가, 아니 애초에 도망칠 필요도 없다. 자신과 같은 경지의 마법사가 도망친다는 건 전제할 수 없다.
‘실력도 좋고. 마법 무구까지 갖췄어?’
도구의 힘일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마도구.
급히 수하들에게 추격시켰다.
경지로 봐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국경에 닿기 전까지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도 추격에 나서고 싶었지만, 마법 트랩이 완성 직전이었다.
임프리아는 자신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했고, 자신은 그 값을 치러야 할 용병.
트랩을 완성시키고도 수하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정말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예측이 이리 자주 틀린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강한 적이란 건가?’
적이 강해서 좋을 것 없지만,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강하기를 바랐다.
이십 년을 넘게 무료한 상황이다.
연구에 돈이 필요하여, 계속 이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연구과 막바지에 이르니 이 짓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 연놈들을 만나기 전에 몸을 풀 상대면 좋겠는데 말이지.’
모든 게 마무리되면 증명될 것이다.
자신이 대륙의 손꼽히는 마법사가 아닌 단 한 명.
전에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이후에도 없을 그런 대마법사라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용병마법사 카벨로는 자신의 예측이 또 한 번 틀리길 바라며 움직였다.
* * *
제법 잘 싸웠다.
그냥 병력의 숫자와 질로 밀어붙이는 형태지만, 적의 수준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
뭐, 그깟 초전의 승리는 줘도 문제 될 거 없으나,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
지금 참전하면 모양새가 빠진다.
아군이 위태롭다면 모를까?
별 피해 없이 잘 싸우고 있는 전투, 져라! 져라! 할 생각도 없다.
결국, 피를 덜 흘리는 게 옳은 거니까.
메리어트 남작은 나중에 징계해도 된다.
그렇게 마음먹고 끌고 온 병력을 멈추게 했다.
오천 가까이 끌고 왔지만, 이들 중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이천 수준.
훈련되지 않고, 체력이 좋지 않은 노예 출신 병사들은 애초에 전장에 내보낼 생각은 없다. 이천 중에서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부대는 까미유, 까메유 부대뿐이다.
“출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니 까미유가 물어왔다.
“나가서 뭐 하게?”
“이렇게 되면 메리어트 남작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지. 어찌 됐든 지금 선봉장은 그니까, 일단 전투가 이대로 무사히 끝나는 걸로 만족해. 까미유, 까메유.”
“네. 백작님.”
형제를 보며 명령했다.
“불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왔으니, 뭔가 대비는 해야겠지. 기병들을 끌고 좌우로 산개해라. 개활지이니 적들이 옆으로 돌았다면 금방 보일 터, 보이면 바로 다시 돌아와라.”
“군명.”
두 형제가 힘차게 대답하며 움직였다.
이 전쟁에서 제일 큰 소득은, 저 두 형제일 것이다. 기병들을 끌고 가라 했지만, 사실 기병의 숫자는 많지 않다.
그마저도 대부분 메리어트가 끌고 나갔다.
분명, 이 부대의 총지휘관은 나이지만, 이해관계가 너무 얽히다 보니 규율, 지휘 체계가 그리 좋지 못하다.
명확한 락의 지휘 체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두 형제는 거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생각이 없거나 지휘관인 날 배려하는 것. 둘 중 하나일 텐데, 이번엔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렇게 말 머리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퍼어어엉!
전장에서 퍼지는 굉음, 상당한 거리임에도 여기까지 귀가 먹먹해질 만한 그런 소리.
동시에 시선을 돌리니 먹구름처럼 흙먼지가 빠른 속도로 몰려왔다.
‘지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에는 너무 엄청난 크기의 먼지 폭풍. 하지만 저것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건 금방 깨달았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폭풍과 동시에 전장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으니까.
‘대체 누가…….’
아니, 그 전에 인위적으로 저런 걸 만들어 낼 수는 있는 것인가?
있긴 있을 것이다.
책 안에서 이론으로서만 존재하는…… 그래서 몇몇 마법사들이 그토록 손에 넣고자 하는 9써클의 마법.
그중 몇몇 마법은 저런 위력이 있을 것이다.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공정하기 이를 데 없는 마법이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이럇!”
달려갔다.
* * *
지옥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이런 지옥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줄은 예상하지는 못했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언제 이런 걸 봤었나?’
생각이 나질 않는데, 자신은 분명, 이 지옥을 경험했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뭔가 잘못된 걸까?
머릿속이 갑자기 뒤죽박죽되었다.
“으아악!”
“막내야!”
“이 새끼야! 달려!”
“뒈지고 싶어! 일어나! 일어나라고!”
“지옥이다! 다 죽는다!”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절규.
그건 아군과 적을 구분하지 않았다.
가슴 아래쪽이 덩어리 같은 뭔가에 꽉 막혔다. 그리고 그 덩어리는 위로 치솟아 올랐다.
뜨겁다 못해 불탈 것 같다.
‘전장이 사람을 죽이고 죽는 그런 공간이라지만.’
아군을 미끼로 적을 끌어들이고, 전부 죽이려 한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화가 났다.
그 분노를 미칠 듯이 폭발시키고 싶었다.
광기(狂氣).
‘하지만…….’
난 이런 아비규환을 몇 차례나 겪었던 자.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자리를 잡아 갔고, 뜨겁던 덩어리는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살려 주세요!”
말에서 내렸다.
“살려 주세요…… 엄마!”
몇 살이나 되었을까?
죽었다 깨도 스물은 안 되었고, 많이 봐줘도 열일곱?
적군일 것이다.
메리어트가 끌고 나간 아군은 정규병들. 이런 어린아이가 있을 리 없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런 소년이 내게 기어왔다.
적이라는 걸 알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혈을 짚었다.
이 상황에서 이 아이를 백 프로 살릴 확신은 없다.
살리고자 한다면 살릴 수야 있겠지만.
“으으으으으으.”
“엄마!”
이 아이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이렇게 만든 놈.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모순이다.
나도 알고 있다.
이기는 게 전부인 전쟁이다.
적중에 이런 소년들이 많은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런 지옥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이들을 외면했으니까.
아니, 아예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
…….
…….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삶을 살려고 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주객전도.
목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끝으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일단 이 사태를 끝내야 했다.
기억 속의 나를 잠시 끄집어냈다.
로라스는 경험이 없으나, 유역후는 경험이 있으니까.
자!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할까?
무엇을 가장 우선시해야 할까?
머리가 열리고, 눈이 열렸고, 마침내 몸이 열렸다.
전신을 옭아매는 수많은 기운.
감각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고, 볼 수 있었다.
이건 마법이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마나가 갈가리 날뛰고, 부풀어 오르며, 찢기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혼돈 속에서도 패턴을 만들어 가고 있는 감각을 확장시켰다.
어떤 놈이냐? 아니면 어떤 것이냐?
분명, 그 근원은 있을 터.
찾아내고…… 보았다.
아니, 느꼈다.
이 공간은 준비된 지옥.
어떤 미친놈이 이 공간을 그렇게 만들어 뒀다.
마법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규모. 하지만 그 미친놈은 그걸 해냈다.
흑마법일 것이다.
처음으로 강대한 적을 만난 것 같다.
수많은 제물과 엄청난 마나석이 소요되었지만, 이걸 구성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마법사일 것이다.
헤르메스 수준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을 터.
커터를 결합시켰다.
일단 활로를 여는 게 우선이다.
개천지보 팔보 지세계(地世界).
경지에 오른 후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처음이라 미숙하지 않냐고?
그럴 리가!
기억 속의 나는 이보다 높은 경지도 훨씬 능숙하게 사용했고, 지금의 난 기억 속의 나.
부으으으으으으으으응.
내력을 끌어 올리니, 커터가 미친 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너희는 나에게 집중해라. 이것이 너희가 유일하게 살길이니.
천왕강림(天王降臨).
커터가 대지를 내리쳤다.
그리고 이 지옥도에, 선을 한 줄 그어 버렸다.
흙먼지도 그리고 화마도 내가 만든 이 길에 접근할 수 없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선을 그었고, 그었으며, 그었다.
지옥도 자체를 파훼하면 모두가 살 것이나, 그것은 숨겨 둔 제물과 마나석을 파괴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
일단은 활로부터 만들어 주고 봐야 했다.
“살고 싶은 자! 가라!”
눈치 빠른 자들이, 먼저 내가 만든 고랑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생과 사는 각자의 운명.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했고. 이제 난…….
이 지옥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만든 미친놈을 잡을 것이다.
* * *
햇살 가득한 하늘을 한 무리의 어둠이 가리고, 곳곳에 죄악의 불길이 솟구쳤던 날.
수많은 생명의 절규가 가득한 그곳에 당신께서 내려오셨도다.
가라사대 모두 가라 하셨다.
말씀에 산 자들이 모두 물러나려 하나, 수많은 죄악이 그 숨통을 졸라 사자(死者)로 만듦에, 사지(死地)가 되었다.
당신의 두 손에 든 것이 하나 되어 사지를 가르니, 죄악이 발악했다.
아델리나가 잡고 있던 펜 끝이 멈췄다.
가슴이 떨리니 손도 떨린 탓이다.
‘역시…….’
확신 가운데, 그분 스스로에게 들은 게 없으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불안은 싹 사라졌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사부님.”
아델리나는 펜을 놓고 가슴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