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1)
아델리나가 말했다.
“신중함도 좋지만, 이만한 전력 차이에 시간을 너무 끄는 것도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크라운에 남아 있는 분들이 이 사실을 아시면…….”
순간 메리어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사실 황도에 계신 귀족분들이 누굴 믿고 있을까요?”
“저를…….”
아델리나는 거기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첫 전투, 그 의미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다른 질문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야겠군요. 병사들에게 기도해 줄 시간이라.”
자신을 붙잡으려 손을 내미는 듯했지만, 감히 몸에 손을 못 대는 그를 보며, 아델리나는 말했다.
“그분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믿어 의심치 마세요.”
고개를 숙여 예를 표시하는 그를 보며, 아델리나는 밖으로 나왔다.
‘믿긴 누굴 믿어? 모두 자신의 욕심에 눈이 벌게진 자들인데.’
나중을 위해 대놓고 그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다.
임프리아가 파 둔 함정에 빠지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에……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게 그분의 뜻대로 되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고.’
물론, 그분이 꼭 신은 아니다. 사실 자신에게 신보다는 한 사람이 더 중요했기에.
‘이 정도면 됐겠지.’
탐욕에 눈먼 자, 반드시 움직일 터였다.
* * *
닷새째.
그 시간 동안을 지켜만 봤다.
임프리아 군에 새로운 원군 따위는 오지 않았다. 다만, 그들도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는지, 부지런히 목책을 만들고 구덩이를 파는 모습이 보였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저럴 거면 차라리 성에 틀어박혀 수성을 하지.’
그래도 전쟁이라 그대로 밀릴 생각은 없다는 의지를 보인 것인가?
저런 병력으로?
적이 멍청하면 좋아하는 게 정상인 것 같은데, 오히려 화가 난다.
또 얼마나 죽어 나갈까?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좋은 소식이 있다면, 뒤늦게 합류한 아델리나가 번천의 무탈함을 전해 준 것.
여하간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수 없기에, 지휘 본부에서 공격 날짜를 고민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지켜보려고 하시는 거예요?”
“황당할 정도의 대응을 보이니, 오히려 고민이 많아집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는 것 같군요. 임프리아는.”
“그 탓에 사람들이 많이 죽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뭔가 안타까운 목소리.
하긴, 이 어린 여아에게 죽음이란 그럴 것이다.
“괜히 따라오셨습니다. 굳이 동행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닙니다. 저도 백작님의 뜻에 깊게 동감했는데요.”
그래도 보면 강단은 있다. 그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감정이란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신수 때문에 그 요사한 사술을 부렸을 때가 떠올렸다. 그런데도 역시 밉지는 않다.
땡강 부리는 딸, 여동생 같은 기분.
게다가 이번에는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만큼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다.
“조만간 움직일 겁니다. 그때는 미리 말씀을 드리지요.”
“신중한 것도 좋지요. 아! 그러고 보니 번천 님이 신신당부했던 말이 있었는데.”
“번천이 말입니까?”
“적이 함정을 팠다고 했어요. 마법 트랩의 일종이라고. 주의하라 말하더군요.”
말하는 게 그리 대수롭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적의 매복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수립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고.
번천이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에, 가슴이 좀 울렸을 뿐이다.
“백작님!”
그때 까미유가 안으로 들어왔다.
출전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그들 형제를 곁에 두니, 나름대로 부관으로서도 역할을 했다. 귀찮은 메리어트도 떨어트릴 수 있었고 말이다.
“무슨 일인가?”
“메리어트 남작의 부대가 출진했습니다.”
“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걸로 착각했다.
“적이 쳐들어왔다고 맞대응하겠다는 명분이었는데…….”
까미유의 말을 들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쳐들어왔다는 적의 숫자는 십여 명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숫자로 봐서 아마 정찰대일 텐데, 그것을 적의 침공으로 간주하고 달려나갔다고 했다.
“미친놈!”
욕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봉에 배치해 달라고 했을 때 눈치채야 했는데.’
전공을 탐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려울 것 없었다. 어차피 공격은 내가 이끌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명분을 잡고 선수를 칠 줄은 몰랐다.
“출정 대기 명령을 내려.”
“네. 백작님.”
자리에 일어서며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지금 움직이게 됐군요. 후방으로 물러나십시오.”
“허락하시면 같이 움직이고 싶습니다.”
“전장입니다!”
“제 한 몸 지킬 힘이 있다는 건, 백작님이 제일 잘 알지 않으실까요?”
이런 일로 지체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그녀 말마따나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스스로 챙기십시오.”
걸음을 서둘렀다.
* * *
“두근두근하지 않냐?”
오면서 친해진 동료의 말에, 막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쳐서 입을 열면,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긴장한 거야?”
동료는 뻘게진 막스의 얼굴을 보며 놀려 대듯이 말했다. 하지만 대꾸도 못 하고 얼굴이 허옇게 변하는 막스를 보며,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긴장 풀어, 이 친구야. 적은 우리 상대가 되지 못해.”
막스는 그걸 어찌 장담하느냐 묻고 싶지만, 아까와 같은 이유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도적 떼라 봐도 무방해. 장비도 빈약할 것이고. 소문으로는 어린애들하고 노인네들만 몰려나왔다잖아.”
“…….”
“딱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몇 년을 훈련한 우리야. 고작 도적 떼에게 우리가 질 리 없잖아.”
막스도 그 사실을 안다.
동료가 말은 안 했지만, 숫자도 아군이 수배나 더 많다는 것도 안다.
두근두근두근.
하지만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였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 약간 그런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망칠 생각만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젠장 읽어서는 안 됐어!’
자신의 소대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은근히 내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전우들 사이에서 똑똑한 놈으로 보이고 싶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건.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봤던 전쟁의 역사서와 소설을 봤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전쟁이라는 게, 두려워졌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공포감을 느꼈다.
책의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읽어 가면서 알아 버렸다.
전쟁이 그냥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면서 땅따먹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피에서 비린내를 직접 느끼고, 죽은 이를 밟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속에 있는 장기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어떤 광경인지 상상까지 해 버렸다.
상상하면 비겁해진다더니, 자신이 딱 그 꼴이다.
“그래도 평야인 만큼 매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계곡에서 퇴로가 가로막히고, 좌우에서 공격당하는 건, 가장 많이 읽은 전술. 하지만 지금은 지형상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군 속도를 올린다.”
그때 명령이 하달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대 달렷! 우리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다.”
막스는 자신들의 소대장을 보며 또 생각했다.
‘출세욕에 사로잡힌 간부는 꼭 끝이 안 좋던데. 특히 그 소대원들은 99퍼센트 전멸이었고.’
소대장은 평민 출신으로 출세욕에 불타고 있었다. 대대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 같은데. 그래서 다른 소대보다 자신들이 좀 고달팠다.
‘1퍼센트를 믿어야 하나?’
그 1퍼센트는 가끔 출세욕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 있어서 나온 수치.
막스는 자신들의 소대장이 그런 인물이길 바라면서 상상의 나래를 계속 폈다.
‘이렇게 달리면…… 힘 빠져서 못 싸우는 거 아냐?’
다행히 그런 걱정은 없었다.
적이 손가락 하나 크기로 보일 때쯤 진군을 멈추고, 진형을 짜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스의 상상력은 그치지 않았다.
‘소문대로 약해 보여. 하지만…… 저 뒤 넘어, 아니면 지금 최정예 기병들이 돌아서 우리 옆구리를 치면 어찌 되는 거지?’
상상과 더불어 수많은 의심.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상상이던, 망상이던 전쟁에는 그 어떠한 영향도 없으리라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안감에 자꾸 생각되는 것을 말이다.
“돌격하라!”
명령이 하달되었다.
총지휘관인 메리어트 남작은 단숨에 끝장내려는 것 같았다. 하긴 적이 저리 오합지졸처럼 보이니, 뭔 수를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저 방책만 넘으면 끝인가?
임프리아도 나름대로 방어를 위해 준비하기는 했다.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저 방책들 말이다. 하지만 저것들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군의 기병들은 최정예들이다. 일반 기병들도 있지만, 영주들이 내놓은 기사들도 상당 숫자 저 안에 있었다.
저런 허접한 장애물은 그들의 돌격을 막지 못할 것이다.
“우아아아!”
기병들을 따라 달렸다.
‘걱정할 것 없어!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적의 최정예들이 갑자기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미 기세를 탔다.
쉽게 무너질 리 없다. 게다가 자신들은 선봉. 로라스 백작이 이끄는 본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물론, 노예들이 대부분이라 얼마나 힘을 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쪽수는 중요한 거니까.’
막스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제 걱정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테니까.
‘개활지. 갑자기 활과 마법이 쏟아지지 않는 한…….’
쓸데없는 생각을 또 해 버렸다. 그냥 동료와 함께 오를 맞춰 달리는 게 최선.
적의 방책 저지선을 넘어섰다.
“우아아아아!”
그리고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 대며 달려갔다.
“죽어랏!”
“죽엿!”
적 진영에 들어갈 때까지 걱정했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너무 수월하게 적과 부딪쳤고, 일방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공세가 이어졌다.
‘쉬벌!’
하지만 막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계속해서 내뱉었다.
주변에 피가 튀고, 살덩어리들을 밟는 그 묘한 감각 때문이 아니다.
‘왜 자꾸 지랄이냐고!’
분명 압승일 것이 분명한 이 전투에서 왜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말이다.
자신과 동료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고, 반면 적의 훈련 상태는 형편없었다.
자신들을 이끌고 계속 앞으로 돌격하고 있는 소대장?
1퍼센트의 확률이 맞아떨어졌다.
소대장은 야망에 걸맞은 능력이 있었다. 저렇게 날뛰는 와중에도 자신들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는 인성까지 갖췄다.
아마도 그와 계속 같은 부대에 있다면, 자신들도 소대장쯤은 몇 년 안에 달 것이다.
전황?
말할 것도 없다. 이건 무조건 이겼다.
그런데…… 이 가슴 서늘함은 무엇인가?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인가
‘말이 씨가 되고, 전염되는 것처럼. 생각도 마찬가지이거늘!’
우르르르르르르.
이제 하다, 하다 못 해 몸까지 떨리는 듯했다.
우르르르르르.
또 한 번의 울림. 깨달았다.
우르르르르르.
이 흔들림은 불안감이 만든 게 아니라, 진짜 땅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퍼어어어엉!
그리고 폭음이 울렸다.
삐이이이!
그 엄청난 굉음에 귓속이 얼얼해지며…….
‘뭐지?’
분명 눈앞에서는 여전히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외치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 이질적인 감각 상태.
‘미친 건가?’
그리고 적 뒤쪽에서 커다란 흙덩어리들이 일어나는 걸 보았다.
‘마법?’
아마도 마법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저 흙덩어리들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젠장!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됐어!’
막스는 상상을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