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0)
“지금 뵈어야 합니다.”
“계속 번천 님을 살펴보다가 어제 아침에 출정하셨습니다.
지금 닷새 만에 정신을 차린 거예요.”
아델리나의 대답에 번천은 소리쳤다.
“안 돼!”
그리고 다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다시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며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아델리나는 그런 번천을 보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상처가 생각보다 커요. 상처가 덧나면 보름 이상을 더 침상 신세를 져야 할 겁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번천은 다급히 계속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마법 때문에요?”
“…….”
“엄청나다지요? 수만금을 써서 트랩을 깔아 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번천은 순간 멍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혼수상태에서 말을 했던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아델리나가 말했다.
“함정을 파려면 은밀하게 시간을 들였어야죠.”
“네?”
“그만한 함정을 단기간에 만들려면 이목을 끌죠. 일단 물자가 움직여야 하니까.”
번천은 뭔가 허탈해짐을 느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주군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했고, 그럼에도 출정한 것을 보니 이미 대비책도 있어 보이니 말이다.
“물론, 로라스 백작님은 잘 모르시는 일이지요.”
“…….”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번천은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지금 함정은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은 자신만 알고 있고, 주군은 모른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 의미를 파악했지만, 아무 말 못 한 건, 눈앞의 이 아름다운 여인이 도저히 평범해 보이지 않았고.
“그분의 신하라면서 그분을 너무 모르시는군요.”
십 년 이상을 곁에 있던 자신보다 더 주군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쟁에서 그만한 페널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분의 격에 맞지 않습니다.”
“…….”
“그래야 성전이 될 테니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델리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번천 님이 그분의 엄청난 총애를 받는 바람에 제가 이리 잡혔어요. 괜찮은 걸 알았으니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저기…….”
“사흘만 참으면 거동은 가능할 거예요. 그 전에 움직이면 며칠 더 고생할 테니, 움직이지 말고 요양하고 계세요.”
아델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번천이 뒤에서 몇 번이나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아델리나는 곰 같은 번천이 그래도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는 있다 싶었다.
‘하지만 보좌해야 할 사람이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측근으로서는 그리 좋지 못하다.’
아델리나의 평가는 냉정했다.
‘그분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야.’
물론, 번천을 어찌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부족한 사람이나, 그분이 귀애하고 계시지 않는가. 정을 주신 게 분명했다.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충성심 하나는 보장됐으니, 최소한의 조건은 만족했음이야.’
물론 그걸로 충분치는 않았다.
충성심은 필수 조건 중 하나, 단순히 그뿐이다.
‘서류상으로만 봐서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분의 주변에 그리 뛰어난 인재가 많지 않아 보였다.
총괄적으로 보필하는 렌마저도, 사실, 성에 차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그는 숫자를 조금 아는,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 조금 아는 상인이며 참모일 뿐.
‘급할 건 없지. 이제 시작인데.’
다만 좀 귀찮을 뿐이다.
‘성녀이시니 안심할 수 있겠군요. 이 사람이 일어날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듯한 그 말을 자신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첫걸음부터 곁에서 지켜보려 했던 것에 차질이 생겼다.
로라스 진 베스타인.
충분히 알려진 이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락의 후계자? 에렌의 후계자?
‘후계’란 단어는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미딩의 실버 스워드 대회의 우승자?
그런 걸 누가 알겠는가? 기껏해야 무인들 몇몇만이 알 뿐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격의 크기를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만든 성전이다.
이런 연출은 자신의 전문 분야. 마침, 이 세계의 새로운 신분도 거기에 걸맞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웬만한 일은 ‘허허’ 하고 웃어 버리는 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분 자체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런 격을 가진 분이다.
‘바뀌지 않으셨겠지.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니까.’
그래서 이틀 차이로 출발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아델리나는 움직였다.
성전의 시작이었다.
* * *
여름의 끝자락인데 공기는 서늘했다.
전장의 공기는 늘 이랬다.
어떤 상황이라도 이곳의 대기는 폐부를 아릴 듯한 느낌을 줬다.
‘방심하지 말고, 과도하게 긴장하지 말란 뜻이겠지.’
질 수 없는 전쟁이라 하나 그런 전쟁은 없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많은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수많은 생명을 책임진 지휘관이라면 꿈꿀 그런 전투.
최소한 피해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는 것.
그래서 전쟁의 시작은 늘 이랬다.
살펴보고, 나의 동선을 만든다.
부대의 동선이 아닌, 나의 동선이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나만 좀 고생하면 피를 훨씬 덜 흘린다.
이게 바로 유역후의 전쟁 방식.
나도 영지전에서 실험해 본 적이 있다. 지금 상황이 와카디아 영지전보다 훨씬 좋은 걸 생각하면 절대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애초에 싸우는 병력을 줄일 생각을 한 것이고, 전공을 몰아줄 수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메리어트가 말했다.
“백작님, 본대와 너무 멀리 떨어지셨습니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따라와서는 옆에서 계속 초를 친다.
“싸울 지형은 눈으로 봐야지요.”
간단한 대꾸에 대답이 가관이다.
“볼 게 있겠습니까? 숫자도 천가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전쟁은 그냥 밀고 나가면 이깁니다.”
“전쟁은 처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입니다. 하지만 열 배에 가까운 전력 아닙니까? 이건 그냥 이기는 전쟁입니다.”
저 주둥이를 한 대 치고 싶다.
“선봉은 남작이 서면 되겠군요.”
흠칫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진격하면 이기는 전쟁이니, 그러지 않으면 전공이라도 세우겠습니까? 제가 양보하지요.”
“그건…….”
이런 놈이 제일 혐오스럽다.
말만 앞서는 이들.
다른 이들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신은 살짝 다치기만 해도 온갖 호들갑을 떠는 놈.
“남작이 끌고 온 병력도 있지 않습니까? 딱 좋겠군요.”
그렇게 말할 때였다.
“나타났습니다.”
멀리서 임프리아의 군이 보였다.
그런데 말이다.
“싸울 의지조차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메리어트는 멀리 있는 걸 가깝게 보는 마법 도구를 눈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위험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임프리아 군은 도저히 정규 병력이라 보기엔 힘들었다.
부대에 징집병이 포함되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저건 그 수준을 넘어섰다.
늙고, 어리고…… 정상적인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 데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는…… 아니, 장비라고 할 것도 없다.
그래도 살기 위해 몸에 가죽옷이라도 걸치고, 제대로 제련되지 않은 무기라도 들고나오는 게 징집병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게 없다.
체력, 사기 그리고 무기까지.
그들에게는 전쟁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단 하나도 없었다.
“뭔 생각인 거지?”
절로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기 위해 시간을 끌겠다는 수작 아니겠습니까?”
메리어트가 옆에서 헛소리를 계속해 댔다.
“잠시 대기해야겠군.”
“네? 그냥 밀어 버리면 간단할 텐데.”
이 새끼 봐라?
“제게 선봉을 맡겨 주시면 단시간에 쓸어버리겠습니다.”
얼씨구!
겁먹고 있다가 형편없는 적을 보니, 갑자기 전의가 불타오르나 보다.
게다가 자신의 병력을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정예에 속한다. 노예 출신 병력은 전무하고 대부분 정규 병력이다.
귀족들이 이름을 올리기 위해 나한테만 몰린 게 아니고, 그에게도 몰렸다. 루니 백작도 한 손 거들었을 테고.
그렇다고 그에게 선봉을 맡길 생각은 없다.
전쟁에서 지휘관을 잘못 만나는 것도 죄라 하는데,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지 않은가?
“어찌 나오는지, 잠시 지켜보지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뒤로하고 움직였다.
* * *
‘신중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아델리나는 임프리아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분이 엄청난 신위를 보였을 것이고, 자신이 그것을 연출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 나중에 알려지면, 오히려 나를 나쁘게 보실 수도 있어.’
하지만 다시 고민하니 이만큼 완벽한 기회도 없을 것 같았다.
악전고투 끝에 적의 무리를 쓰러트렸다.
이런 것보다는 아군의 위급함을 구원하였다.
‘이게 훨씬 더 극적이야. 그분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로라스가 나중에 자신이 전달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분이다.
물론 적에게는 생각 이상으로 냉혹해질 수도 있는 분이긴 하지만, 적이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답답할 정도로 배려한다.
그분이 그분이셨을 당시, 그 막강한 전력으로도 무림 일통에 걸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렸다는 것이 증거다.
물론 장점도 있다.
위에서부터 말단 무사들까지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자신들을 의미 없이 사용하지 않는 걸 알기에 목숨을 걸고 그분이 내린 명령을 이행했다.
‘여기서는 그때의 광증(狂症)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참모로서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부정적일 수 있는 일은 조금도 하기 싫었다.
‘타이밍만 맞추면 될 것 같은데.’
때만 잘 맞추면 속이지 않고, 나중에 알려져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 방법.
다행히 이곳에는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이 많았다.
‘메리어트라고 했던가?’
능력도 없는 놈이, 욕심만 많은 전형적인 인간.
궁리하던 아델리나는 마침내 결과를 도출해 냈고, 그대로 메리어트를 찾았다.
“성녀님!”
메리어트 남작은 아델리나가 자신의 막사에 방문하자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권했다.
왜 아닐까?
메리어트는 사실 이 전장에서 가장 무게감이 있는 사람은 로라스가 아닌 아델리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에펠리온 교단의 성녀.
성전을 선포하며 성기사와 함께 참전을 선언하여, 황제에게도 점수를 잔뜩 딴 여자다.
“성녀님께서 무슨 이유로 이 누추한 곳까지.”
한없이 공손하면서, 원한다면 간, 쓸개를 다 내어줄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그를 보며 아델리나는 속이 불편해졌다.
‘누추? 전장임에도 이렇게 꾸미고 있는데. 누가 보면, 이자가 총지휘관인 줄 알겠군.’
물론 그런 속내와 달리, 아델리나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으며, 말도 정중했다.
“한번은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군의 실질적 이인자시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성녀님.”
아델리나는 말과는 달리,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공격은 언제 하십니까? 혹시 현묘한 계책이라도 있어서 기다리고 계시는 건지.”
“그런 거 없습니다.”
메리어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로라스 백작님이 지나치게 신중하시더군요. 올 때만 하더라도 단숨에 적을 궤멸할 것 같이 행동하셨으면서 말입니다.”
“…….”
“뭐, 이해는 합니다. 아직, 이런 전쟁에 익숙지 않으실 테니까요.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아델리나 앞에서 자신을 과시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그 표현 방법 중에는 남을 깎아내리는 게 제일 쉽다.
“제가 조언해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두려우신가 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아델리나는 미소를 보여 주며 생각했다.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더한 머저리군.’
어떻게 부추길 것인지 살짝 고민했지만, 직접 보니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원하는 그림이 제대로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