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8)
식사 시간이다.
전장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빵과 따뜻한 스튜, 거기에 약간의 요리와 와인까지.
이 정도면 정말 진수성찬이다.
“입에는 좀 맞으시는지요.”
물론 요리와 와인은 군의 보급품이 아닌, 아델리나가 가져온 것이다.
“훌륭합니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의문은 커져 간다.
나한테 반한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녀가 날 대하는 걸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치 웃어른 공경하는 느낌도 든다. 마치 선생을 좋아하는 여학생 같은…….
‘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메리어트입니다. 백작님.”
들어오란 말을 하기도 전에 들어오는 메리어트, 표정을 보니 죽을상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백작님, 당장 중대별로 움직이고 진군을 멈춰야 합니다.”
“이유는?”
“탈영병이 조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중대별로 한두 명씩은 사라져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메리어트는 다급히 말했다.
“탈영입니다. 로라스 백작님!”
“예상했던 일입니다. 호들갑 떨 필요 없습니다.”
“호들갑이라니요. 이런 중대한 일에……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메리어트는 루니 백작이 심어 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별로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다.
전형적인 귀족.
강자에 기생하는 그저 그런 놈들.
메리어트는 그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자가 저딴 식으로 말하는 건 불편하다.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메리어트 주춤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지금 군기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군기를 걱정하면 모범을 보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병사들과 함께 행군하는 것도 군기를 끌어 올리는 법이지요. 어떻습니까? 동참하는 게?”
놈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한다.
하긴, 저 물결치는 뱃살을 보면 겁먹을 만도 하다.
“저는…… 지병이 있어서…… 아시지 않습니까?”
모른다고 답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리 알아서 나갈 테니 말이다.
그가 나간 후 판드가 물었다.
“괜찮겠어?”
“뭐가?”
“탈영병.”
“예측한 일이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전쟁에서 쪽수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아델리나가 끼어들었다.
“옥석을 가리시려는 거겠지요.”
그녀는 매우 정확한 지적을 했지만, 판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말했다.
“그래도 쪽수가…….”
“그만큼 중요한 게 의지이지요.”
그녀는 슬쩍, 날 보며 말을 이었다.
“전쟁의 목적이 싸워 이기는 것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판드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건 알지만…….”
우물쭈물하며 대답하면서 판드는 날 보며 물었다.
“여기서 탈영해 봤자, 결국 돌아갈 곳은 한군데뿐일 텐데……. 완벽한 해방은 아니잖아.”
그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의지 하나 없는 이들까지 억지로 도와줄 정도의 성인(聖人)은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성인으로서 시작한 일도 아니고.”
“탈영을 유도했다는 거야?”
“유도까지는 아니고…… 도움이 필요한 자, 현재의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 기회를 갖고 싶어 하는 자만 데려가고 싶다? 그 정도일까?”
“…….”
“내가 무슨 엄청난 사람이라 세상의 모든 이를 구원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사람 그리고 날 필요로 하는 사람만 돌보는 것도 벅찬 일이니까.”
“으음…….”
“탈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최소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건 생각하지 마, 다 자기 복이니까.”
“걱정돼서…… 병력이 줄어들면 전쟁이 힘들어질 테니.”
“어차피 많은 숫자는 필요치 않는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말 나온 김에 잠시 생각했다.
이 전쟁을 승리로 가져가려면 어느 정도의 숫자가 필요한지 말이다.
‘임프리아가 소문 그대로라면…… 천이면 충분하고도 남으려나?’
이건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수천 단위의 전쟁이라면 그리고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먹자고!”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다.
* * *
“까미유! 백작님을 이리 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까메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눈을 빛내는 두 젊은 청년.
이들은, 현재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대장들이었다.
다른 놈들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고, 명령 때문에 죽을상을 하며 움직일 때.
이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했고, 명령이 아닌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래서 매번 선두로 집결지에 도착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의 부대 역시 군율이 살아 있고, 사기가 높았다.
기껍다.
애초에 이번 행군은 옥석을 가리는 게 목적이었고, 이들은 찾아낸 옥 중에서 가장 빛나는 옥이었다.
“늘 선두를 다툰다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쌍둥이라는 것도 은근히 관심이 갔다. 뭔가 독특하다고 할까?
서로 동시에 대답하고, 그 뜻도 대동소이하고 말이다.
“훌륭하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해 준다면, 둘 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저 좋아하는 표정까지도 똑같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령이라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자,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그들을 돌려보낸 이후, 계속 봐 왔던 이들을 불렀다.
많지는 않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몰락한 가문의 사람들이다.
이뤄야 할 것들이 있으면 절실해지고, 절실해져야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맞는다. 그리고 난 그런 이들만 데리고 전장에 나설 예정이다.
마침내, 임프리아와 맞닿은 국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눈여겨본 이들을 승진시켰다.
소대장은 중대장으로, 중대장은 대대장으로.
반발?
당연히 많았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승진이라 했다. 아직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파격적이라고도 했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
어중이떠중이들을 전부 데리고 전장에 나설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전공?
그런 건 이제부터 만들어 줄 것이다.
고작 임프리아 따위를 상대하는 데, 전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오겠나?
쓸 만한 이들에게 그리고 내 사람으로 만들 사람에게 줄 전공도 부족하다.
깔끔하게 무시했지만, 감히 나서는 놈이 없었다.
이런 놈들이니, 내 눈에 띄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들이박는 놈이 있었다면, 놈에게도 관심을 주었을 테지만.
그런 놈은, 단 한 놈도 없었다.
솔직히 기대했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능력을 지닌 놈들이 튀어나오길 말이다.
하긴, 그런 놈들이 있었다면 전투 행군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을 때 튀어나왔겠지만.
여하간 온실 속 화초처럼, 세상 걱정 없는 돼지처럼, 그리 살아왔던 이들에게 줄 관심 따위는 없었다.
그런 놈들이 지휘관이 되면 죽어 나가는 건 병사들뿐이다.
지휘관.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라는 걸, 조금도 모르는 놈들에게 지휘를 맡기는 건 죄악이다.
부대 편성을 시작했다.
잘 싸우는 녀석, 통솔력이 있는 녀석, 전장을 볼 줄 아는 녀석들을 분류했다.
눈에 든 녀석들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전쟁의 규모가 작아 충분히 원하는 구성을 갖출 수 있었다.
나머지 놈들?
후방에서 대기시키다가, 전장에 참여했다는 이름 몇 자 올려 주는 게 끝이다.
그리 준비를 끝내니 임프리아가 어찌 대응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궁금하면 확인하면 되는 거였다.
* * *
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헉헉헉!
그 공간을 헐떡이는 숨소리가 비집고 터져 나왔다.
‘반드시 알려야 해.’
번천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가득했다.
그날, 여관에서 들었던 대화.
반쯤은 진지하게 그리고 또 반쯤은 그냥 궁금했었다. 대체 무슨 함정을 팠기에, 그리 자신만만했던 것인지 말이다.
시간은 좀 걸리고, 가진 돈도 몽땅 쓰긴 했지만, 알아냈다. 그리고 발각되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
주군에게 그리고 영지의 기사들에게 수련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생명의 위협 따위는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정체불명의 용병들.
그때 확신했다.
자신이 그리 쫓아 헤매던 놈이 이번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그 함정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에르자일 님도 함께 오셨을까? 그래야 할 텐데!’
번천은 로라스가 마법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서 고위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건 그 수준을 넘어섰다.
에르자일이 있어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있어도 완벽하게 대응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엄청나고 막강한 위력의 마법 트랩이었다.
임프리아는 이번 전쟁에 이겨도 남는 게 없을 것이다. 그 마법 트랩을 만드는 데 국력을 모두 쏟아부었을 테니까.
두두두두두.
뒤에서 자신을 쫓는 말발굽 소리가, 자신의 말이 내는 소리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쳤는데, 이리 뒤를 잡힐 수 있는지 말이다.
‘싸워야 하나?’
아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이 일을 알리는 게 우선이다.
주군이라 하더라도 절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사이 추적자들은 자신과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렇게 자신의 등 뒤에 언제 칼이 날아와 박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도 달렸다.
운이 좋다면! 하늘이 돕는다면!
함정을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는 전할 수 있을 터.
순간 옆구리에 예기를 느꼈고.
쌔애애애앵!
날카로운 파공음이 뒤를 따랐다.
적의 석궁 사정거리에 닿았나 보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시간상 제국 군은 국경은 넘었을 거라고 판단되었다. 그리고 국경은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더 달릴 수가 없었다.
달리는 말이라 명중률은 떨어지나, 결국 맞게 될 것이고 치명상이라도 입는다면 빠져나갈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질 터.
번천은 달리면서 말 머리를 돌렸다.
“후앗!”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그에 반비례하여 기합을 크게 질렀다.
말머리를 돌리긴 했지만, 사실 그냥 도망치는 것보다는 크게 차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하도 달리다 보니 하체 상황이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쫓기기만 하다 보니 기력이 좋지 못했다.
포스, 마나 양쪽 모두가 말이다.
“죽을 자리를 향해 오는군.”
그나마 다행인 건, 추적자들 중 하나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는 것.
몸은 지쳤음에도 감각은 최고조로 올라 있다는 생각이다.
‘이대로 당하지는 않는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건 알지만, 희망은 잃지 않았다.
그만한 자격은 되지 않나?
락에서의 가르침, 수련, 깨달음.
그 과정만 몇 번이었다.
놈들의 실력 그리고 그 숫자가 많음이지, 개개인의 실력은 자신이 유리할 터.
‘그렇다면!’
죽을 정도로, 어쩌면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테지만, 살을 주고 뼈를 취하면 된다. 그렇게 놈들의 숫자를 줄이면, 또다시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전투는 벌어졌고.
“흐아앗!”
번천은 자신의 자신감을 그리고 방법을 증명해 냈다.
최소한의 방어를 하며 일격으로 적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아직 그 경지가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포스만큼은 아니었다.
하늘 산맥에서 있던 기연은, 그의 포스만큼은 무지막지하게 높여 놓았고, 좋은 스승들 밑에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터어어엉!
적의 공격에, 그의 몸 곳곳에서 강렬한 충돌음이 들렸지만, 번천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장비 역시 도움을 주었다. 속에 입고 있는 얇은 가죽 갑옷은 에르자일이 선물해 준 마법 갑옷이었다.
물론 타격의 전부를 방호해 주지는 못하나,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을 타격을, 죽을지도 모르는 공격으로 바꿔 줄 수는 있었다.
“우아아아!”
그렇게 번천은 미친 듯이 싸웠다.
콰아아아아앙!
강렬한 충격파가, 등에 전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