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7)
“헉헉헉!”
“우리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미친 거 아냐? 아직 임프리아는커녕 국경도 안 왔는데 이게 뭔 짓이냐고!”
대부분 병사들이 오뉴월 강아지처럼 숨을 헐떡이며 불만을 터트렸다.
전투 행군 태세.
그 괴상한 이름이 붙은 이상한 명령은 별거 아니었다.
아니 별거 있다.
사람을 지치게 그리고 힘들게 만들고 있으니까.
왜 자신들이 스스로 식량과 식수 그리고 무장까지 전부 들고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뿐이던가! 가끔은 마치 적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스럽게 움직여야 하기도 했다.
적진이라면 눈곱 정도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은 제국의 산이요, 물이고, 사람이었다.
“미친놈이 분명해!”
“애송이잖아. 얼마나 뽐내고 싶었겠어, 기회 잡았다 싶은 거지.”
“위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저런 전쟁 경험도 없는 애송이를 대장으로 삼다니!”
“전쟁 경험이 없는 건 아니라던데. 영지전에서 승리를 거뒀대.”
“영지전? 그게 전쟁이냐?”
날이 갈수록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많아졌고, 음성은 높아져 갔다.
힘든 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이야 썩어 빠진 정신을 개조한다고 치지만, 우리는 지금 뭐 하는 거야!”
“멀쩡한 말을 두고 걸으라니! 지휘관은 심신이 안정돼야 좋은 지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가?”
귀족들, 그러니까 간부 위치에 있는 자들의 불만도 높아져 갔다.
“실버 스워드 대회 우승자라던데.”
“그게 전쟁하고 뭔 상관인데, 전쟁 혼자 하나?”
“혼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마스터뿐이야. 그마저도 대규모 전투면 제한적이기도 하고.”
“‘마스터’라는 소문도 있어.”
“미쳤나? 마스터면 진즉 우리도 알았겠지. 마스터가 옆집의 누구 이름도 아니고.”
“아냐, 정말이야. 일단 지켜봐. 뭔 다른 생각이 있겠지.”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신중한 사람은 늘 있는 법.
그들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 순응하고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점점 할 만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가지고 있는 식량이 줄어듦에 따라 짐이 가벼워진 것이다.
하지만……!
“개인마다 다시 보급품을 채운다. 국경 근처 도시인 주포그까지 더 이상의 보급은 없으니, 소대별로 보급은 충분히 챙기도록.”
새로운 명령 그리고 국경까지 이 행군 태세가 계속될 거라는 말에 병사들과 간부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정말 미친 거 아냐!”
“가기 전에 다 죽겠다!”
“주적은 임프리아가 아닌 간부야!”
병사들은 대놓고 그리 말하기 시작했고, 간부들 역시 자신들의 지휘관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못 타는 건 둘째로 치고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갈아 치워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방법 있어?”
“모르지, 가다가 날벼락이라도 떨어져 뒈지기라도 하면.”
“그래, 그런 사건 사고는 많잖아. 역병, 낙마 그런 사고로 죽는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군에서는 불만을 넘어선 적의(敵意)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는 전혀 다른 부대가 하나 있었다.
군에 속하지 않은 전투 집단.
“성녀님.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에펠리온 교단에서 나온 성기사단이었다.
현재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성기사단장 온스가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경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온스 경.”
“불만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봐도 이런 진군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런 진군이요?”
“불필요하게 힘을 빼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네. 교단에 귀의하기 전에 저도 전쟁에 몇 번이나 참여했던 기사, 이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로라스 백작님에게 경고하자는 건가요.”
“자칫하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귀족들도 많으니 사고로 처리할 수도 있고요.”
“으음…….”
“교에 그리고 성녀님에게 중요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희가 보호라도…….”
“하하하하.”
그때 아델리나가 소리 내어 웃으니, 성기사단장 온스는 당황했다.
“성녀님. 갑자기 왜…….”
“보호요? 저희가 로라스 백작님을요?”
“저희가 지근거리에서 경호한다면, 혹시 모를 사고를 억제할 수 있고, 대처 역시 용의할 테니까요.”
아델리나는 소리만 지운 웃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봤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녀님…… 하지만 자칫 우리도 엮이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로라스 백작님은 그걸 기다리고 계시는 걸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델리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이며 온스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으음…….’
그러고는 로라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한 번에 모두 처리하시려는 건가.’
아무 생각 없이 말과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히 전쟁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변수로 인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건,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개인의 무력을 떠나서 전장에서는 ‘무신’ 그 자체라고 불렸던 분이다.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지켜볼 뿐 그리고 이후 그분의 뜻을 널리 알리기만 하면 된다.
성전이라는 틀을 가져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델리나는 즐거워졌다.
그분이 어찌 이 상황을 처리할지 지켜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을 터였다.
물론 그냥 지켜볼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씨앗은 충분히 뿌려 둔 상태였다.
* * *
“간부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메리어트 남작이 계속 같은 보고를 해 오고 있었다.
무시하라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하긴 일을 이리 벌였는데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하기도 할 터이다.
“백작님, 불만이 정말 심합니다. 무슨 조치를 취하심이…….”
“남작.”
“네. 백작님.”
“누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
“누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대표적인 놈들이 있을 거 아냐!”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부분…….”
“그런데 왜 덤비는 놈이 없지?”
“네?”
“네? 네? 하지 말고! 청각이 좋지 못하나?”
“아닙니다!”
“불만이 가득하고 폭발할 지경이라며! 그런데 왜 덤비는 놈들이 없냐고.”
놈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질문이 어렵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감히, 누가 백작님에게 덤비겠습니까?”
그리고 간신히 내놓는 답에 반문했다.
“방금과는 말이 다르잖아. 불만이 폭발한다면서.”
“그건…….”
“덜 힘든 거야. 신경 쓰지 마.”
“백작님!”
손을 저어서 말을 멈추게 했다.
‘정말 노예근성에 너무 찌들었군.’
‘전투 행군’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해 가면서 이리 고생시키는 이유는 하나다.
체력 단련?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이런 무식한 방법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쌔고 샜다.
내가 원한 건, 이들이 감정을 갖기를 원했다. 지금도 불만만 가질 뿐 행동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대부분이 노예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감정이 죽으면 사람이 아니었고, 이 와중에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건 분노다.
그게 폭발하길 원했다.
감정이 생겨야 움직이고, 움직여야 희망이라는 게 생길 터.
난 노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귀찮잖아.’
일일이, 언제 하나하나 붙잡고 내 의도를 설명하고, 희망을 품게 한단 말인가.
한 번에 터트리고 한 번에 수습한다.
수습하는 것도 간단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도 덤벼들어야 쓸 수 있는데 말이다.
‘방법을 바꿔야 하나?’
불만은 있으나, 딱 불만만 가지면 곤란하다. 그러면 안 가진 것만 못하다.
‘으음!’
기다리려고 했는데, 국경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남작!”
“네, 백작님.”
“중대장급 간부들을 모두 집합시키게.”
“알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먹혔다고 생각한 걸까?
좋아라, 나가는 그를 보니 고개가 절로 흔들어졌다. 이유를 알면 기함을 할 텐데 말이다.
* * *
“이게 말이 됩니까!”
“가뜩이나 힘든데…… 휴식 시간도 줄이겠다니요!”
“휴식 시간이 문제가 아니야. 이리 움직이려면 먹어야 하잖아! 그런데…….”
병사들의 아우성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말도 안 되는, 힘든 행군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집결지까지 도착하는 게, 다른 부대보다 늦으면 배급의 양을 줄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빨리 도착하면 되는 거다. 휴식 시간을 뺏길 이유도 없다. 뭐가 걱정인가!”
하지만 그들의 중대장 까미유는 단호했고.
“여태 우리는 낙오도 없이 잘해 왔지 않나. 남들보다 안 뒤처지면 된다. 그럼 충분한 음식과 휴식 시간이 보장된다. 무엇보다 그 우스꽝스러운 전투 행군이라는 걸 안 해도 되잖아! 난 그걸로 만족하는데.”
그럴듯하게 설득이란 걸 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문제가 없다고, 전혀! 어쩌면 이건 우리에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빌어먹게도 말이지.”
“그러니 우린 그 어떤 부대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그것만 생각한다!”
입을 여는 병사는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자신과 그리고 전우는 건장한 편이었고, 또 부대장인 까미유는 현명한 지휘관이었다.
“모두 해산. 딴생각하지 말고 자라. 우리 부대는 이제부터 먼저 도착하고, 먼저 먹고, 먼저 쉴 것이니까.”
힘이 들 때마다 짐을 나눠서 져 줄 줄 알았고, 힘이 되는 말로 자신들을 이끌 줄도 아는 이였으니까.
병사들의 침묵을 뒤로하고 까미유는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까메유!”
“까미유.”
비슷한 이름의 놀랍도록 같은 생김새.
이상할 거 없다. 둘은 쌍둥이 형제였으니까.
“반응은 어때?”
“예상대로 난리가 났지.”
까미유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럴수록 우리에게는 기회라는 거 알지?”
“눈에 들 수 있으니까.”
두 형제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서로 묻고 답할 필요는 없다. 이 쌍둥이 형제는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이번에 반드시 대대장까지 가야 한다.”
“물론이지. 교단에서 밀어주는 건데.”
두 사람은 에펠리온의 신도다.
그리고 그들은 영광스럽게도 성녀를 알현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임무를 받았다.
그들은 그것을 해냄으로 군에서도, 그리고 교단에서도 영향력을 얻길 원했다. 그래야 몰락한 자신들의 가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의지는 적극적으로 병사들을 격려하게 만들었으며, 중대장의 임무를 훌륭하게 이행하게 했다.
지옥 같은 행군에서도 그들은 선두를 다퉜다.
그래서 누구보다 풍부하게 보급품을 받았으며,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그들 형제만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죽겠다.”
“대체 왜! 이 짓거리를 하는 거야?”
끌려왔다 생각하는 이들.
“집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이런 곳까지 끌려와서 뭐 하는 건지.”
중간 간부의 위치를 차지하는 귀족가의 사람들.
이 전쟁에 어떻게든 이름을 올리고 싶은 귀족 가문들은 사람을 보내야 했고, 그들 대부분은 서자 아니면 후계 후보에도 들지 못하는 먼 핏줄들을 보냈다.
전쟁에 자신이나, 귀한 후계를 보낼 수는 없기에 말이다.
대부분 버림받은 자들이나 그래도 귀족이라는 명분으로 편하게 생활해 왔던 자들이, 열악한 현재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만무했다.
게다가…….
“크라운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잖아!”
“주인님이 좀 때리긴 했어도, 밥은 제때 줬는데.”
“맞아, 밥은 제때 먹여줘야지.”
노예 병사들의 불만은 극에 치달았다.
그건 버림받았던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적게 먹더라도 편안했었는데.”
“그러게. 괜히 따라나선 것 같아.”
“도망칠까?”
“갈 데는 있고?”
“국경을 넘으려면 통행증이 필요한데.”
“산에 들어가서 산적이라도 하면 되지. 지금보다야 낫지 않겠어?”
“기다려 봐, 간부들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더라고. 지휘관에게 단체로 항의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로라스의 군은 국경에 도착하기 전부터 삐꺽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