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6)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때는 오랜 용병 생활로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을까?
낮에는 같이 땀을 흘리고, 밤이면 어울려 술 한 병을 같이 나눠 마시던 동료들 생각에 외로웠다.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주군이 곁에 없으니 우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확실한 길이 보이지 않은가?
홀로 머무를 때는 포스를 수련했으며, 사람들과 마차라도 탈라치면 에르자일이 선물로 준 마법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덕분에 실력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내려오기 전, 처리했던 강도단이 그 증거였다.
원거리 무기를 든 놈들을 상대로 선수를 빼앗겼음에도 말끔하게 처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다.
“왕이 대단한 마법사를 초빙했다더군.”
“마법사?”
“그래, 단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한 적이 없던 전설의 용병 마법사라고 하더군.”
“그런 마법사가 있나?”
“있대. 데려오는 데도 수천 금과 함께, 전리품도 일정 부분 나눠 줘야 하는 계약을 맺을 정도라던데.”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다친다.”
쉬기 위해 들른 여관에서 들리는 그들의 대화는 번천의 육감을 일깨웠다.
위화감? 위기감? 뭔가 계속 걸렸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감각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애송이는 대체 누구래?”
“모르지. 또 어디 잘난 귀족가의 자제가 공적을 세우겠답시고 덤비는 걸지도.”
“그건 아닐걸.”
“뭐 아는 거 있어?”
“알고 자시고, 제국이 선전포고까지 하며 거창하게 꾸미고 있는데, 정말 애송이를 보낼 리가 있겠어?”
“으음, 일리가 있네.”
이곳에서도.“
“내 듣자니 그 에르페유의 제자라더군.”
“에르페유…… 그 권신?”
“그뿐만이 아니라. 헤르메스의 제자라는 소문도 있어.”
“그게 말이 되나? 마검사라도 돼? 어떻게 두 사람의 제자가 일 수 있어?”
저곳에서도.
곧 임프리아를 침략해 올 침략군의 대장에 대한 소식이 공간에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애송이가 아니라는 거지.”
“미딩의 실버 스워드 대회의 우승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지도.”
확실해졌다.
임프리아를 공격해 오는 제국군의 지휘관이 ‘로라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지?’
번천은 순간 고민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로라스에게 달려가 그의 옆을 지키고 싶었다. 어떻게 락에 있던 분이 이곳까지 와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궁금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당장 해야 할 게 있었다. 그리 찾아 헤매던 원수가 코앞이었다.
‘혹시 임프리아가 초빙해 왔던 마법사가 그놈이 아닐까?’
그러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고.
―잘은 모르지만 불쌍하구먼. 필승이라 생각하며 올 테지만…… 무덤이 될 텐데.
그리고 떠드는 사내의 말도 생각났다.
‘뭔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 옛날에도 뛰어난 마법사였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대단해져 있겠는가?
번천은 나온 음식을 먹으며, 그 말을 한 사내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더 확실히 알아야 했다. 대체 무슨 함정인지 알아봐야 했다.
한참 후.
사내를 포함한 일행이 일어섰고, 번천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은밀하게 그들의 뒤를 밟았다.
* * *
“숫자를 줄이지.”
“네?”
“병력 말이야.”
“어떻게 줄입니까?”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두 번이나 되묻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돈을 대는 귀족들이 많다지?”
“네. 다행히도 보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걸로 상당한 이득도 보고 있고요.”
판드는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이동에는 돈이 많이 듭니다. 상단의 이득 분은 혹시 부족 할 예산을 보충하는 데에.”
“아니, 그건 렌 자네 몫이야. 어느 정도는 자네 상단도 이득 돼야 일할 맛이 나지 않겠어?”
“그럼 병력을 늘린다는 건.”
“정규병 숫자가 많지는 않다고 들었어.”
판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참전하겠다고 밝힌 귀족들 대부분 징집병과 용병들로 채우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지 말라 해. 차라리 노예를 사서 보내라 해.”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그리 계획한 거 아니었습니까.”
“정규병 숫자를 줄이는 대신 노예 숫자를 늘리라는 거야.”
판드는 흠칫하며 말했다.
“소영주님. 전부 노예로 채우면 정작 전쟁할 병력이 없습니다. 이미 그 숫자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한 부분이 아니었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숫자는 내가 직접 거론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무슨?”
“굳이 그만한 숫자가 필요 없겠더라는. 그리고 에펠리온 교단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하니.”
“하지만 소영주님. 노예들을 이동…….”
“그 단어가 좀 거슬려. 사람들이라 하지.”
“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일단은 그쪽으로 끌고 가고 이동시키는 데 병사가 필요합니다. 싸우려고 데려가는 병사 수보다 그들을 통솔하는 데 필요한 숫자 말입니다.”
통제에 필요한 규율은 군대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집단이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규율은 강제성을 띤다.
판드는 그 강제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숫자를 말하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내가 말하는 건 실제 전투 병력의 숫자를 줄이자는 거야. 그 대신 돈으로 받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에게 덧붙였다. 그는 상인이지 전쟁의 군사는 아니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알아듣지는 못하니 답답한 부분이 있다.
“렌 님.”
“네. 아델리나 님.”
“로라스 백작님의 말씀은 통제에 필요한 숫자는 유지하고, 실제 전투 병력을 줄이자는 거에요. 그 숫자 역시 이미 논의된 바이나 생각이 달라지신 듯하네요.”
다행히 아델리나는 단번에 알아들은 것 같다.
‘내가 그리 설명을 그렇게 어렵게 설명했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아델리나가 날 보며 물었다.
“실제 전투 병력을 너무 줄여도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노예, 아니 사람들에 관심이 없다지만, 눈 가리고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 따지고 들면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아무리 교단의 힘을 빌려도 덮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필요한 인원은 골라 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왜 수많은 귀족이 이 전쟁에 나서려 합니까?”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데다, 이 전쟁은 이제 성전이 되었으니까요.”
“돈과 물자를 쓰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나서는 것일 테고.”
“그건 전쟁 경험이 없어서, 쉽게 나서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승리가 확실한 전쟁이라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주는 위압감은 쉽게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늘 야망을 품은 자는 있기 마련이지요. 특히 몰락해 가는 귀족가는 돈이 없어서, 이럴 때 나설 수 없으니까요.”
“돈 대신 몸으로 때우라는 말이지요?”
“그런 귀족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돈 없이 입신양명하려고 제 자신을 단련시킨 자들 말입니다.”
아델리나는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은혜를 입히는 거군요. 그에 대한 주도권은 로라스 백작님이 가지고 계시니까요.”
그녀는 정확히 이해했다.
하기 싫지만, 기왕 하기로 한 전쟁. 이득은 극대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망해 가는 나라도 사람은 늘 있는 법.
기왕이면 쓸 만한 인재를 골라, 내 편을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쓸 만한 이들을 모아서, 진짜 전투에서 패하면 굉장히 곤란해지실 겁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분명 그랬지만 솔직히 질 자신이 없다.
임프리아가 어떤 곳인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받았으니까. 병력의 숫자를 줄여 정예화시키는 것을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 선발한 인원들에게 골고루 전공을 나눠 줄 수 있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리해야겠지요. 사람을 어떤 식으로 선별해야 할까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다음을 묻는 아델리나.
“쓸 만한 사람들도 좋지만, 아무래도 힘 있는 자들도 필요하겠지요. 그래야 원래의 목적인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것에 도움받을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렌 님과 잘 상의하여 인원을 선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입속의 혀처럼 무슨 생각만 하면 알아서 척척 움직여 준다.
그녀와는 언젠가 정말 터놓고 이야기해 봐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 * *
“와아아아아아!”
대체 뭐가 좋다고 저리 환호성을 지르는 것일까?
아니 진심으로 나오는 걸까?
크라운에서 좀 잘나간다는 귀족들이라면 한 손, 아니 한 손가락이라도 걸친 전쟁이니 사람들을 동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쟁은 그만큼 화려해야 하니까.
당연히 출전 전 예식이 있었고, 황제가 뭐라 떠들어 대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고.
‘이들인가?’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
이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별되었는지 대충 들었고, 개개인의 신상에 대한 간략한 보고도 받았다.
제법 눈빛이 살아 있긴 한데, 확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대부분 젊은 만큼 바로 써먹기보다는, 일단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할 터.
여하간 그렇게 임프리아를 제압하기 위한 군을 끌고 출발했다.
많다.
원래 계획이었던 오천의 병력이 만에 가깝게 늘어난 상태이니까.
확실히 돈을 바닥에 버리는 수준의 낭비이지만, 그럴수록 내가 원하는 것이 더 확고해지니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건 다 문제가 아닌데 말이지.’
문제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다.
정규 병력을 줄이고 그 자리를 노예 병사들로 대치했다.
이들은 징집병보다 더 좋지 않다.
징집병들은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라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게 없다.
노예근성에 찌들었고, 영양 상태는 좋지 못했으며, 그 탓에 너무 무기력해져 있다.
이대로 두고만 볼 생각은 없다. 이런 이들을 락에 데려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토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전쟁 이외의 방법으로 이들을 고칠 방법도 있었을 터.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손봐야 한다는 뜻이지.’
잔인…… 아니 무감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게 되었고, 그걸 되돌리려면 혹독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전부 그런 과정이 필요한 이들이 아니길 바랄 뿐.’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행군은 순조로웠고 그렇게 사흘이 지나 평야에 들어섰다.
“전군 정지.”
군을 정지시켰다.
“로라스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메리어트 남작이 옆에서 물어왔다.
이자는 크라운에서 부관이랍시고 붙여 준 자지만, 정확히는 루니 백작의 사람으로 감시자라 봐도 좋다.
이만한 일을 벌이고 자신의 사람 하나 보내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긴 하다.
그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군기가 좋지 않다.”
“네? 갑자기 무슨…….”
“아국의 영역이라지만 너무 빠져 있다. 전원 전투 행군 태세!”
“그게 무슨 명령이신지…….”
그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되물었다.
“부관이라는 자가 그것도 모르나!”
그런 그를 향해 성냈고, 그는 당황하면서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루니 백작이 아무나 보냈을 리는 없고, 나름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을 보냈을 테지만 답은 없다.
‘전투 행군 태세’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는 지금 내가 만들어 낸 단어니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낸 건 뜯어고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군관이라는 자가 그런 것도 모르나!”
“머리는 형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가!”
당연히 메리어트만이 아닌 다른 간부들도 깨지는 건 당연지사.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