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5)
제국이 임프리아 왕국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는 건, 그다지 큰 소문이 되지 못해야 했다.
제국과 임프리아 왕국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더 흥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소문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냥 저녁 식사에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을 차지할 만한 대화의 수준을 넘어서, 진지하게 이번 전쟁에 관해 ‘토론’이라는 것이 일어날 정도의 소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이 전쟁에 대해 은밀하게 입소문을 내려 했던 루니를 비롯한 귀족들은 신이 났다.
자신들이 소문을 내려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호응을 불러일으킬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평화가 너무 길어 이런 전쟁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간 출셋길이 막혀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선 것이다. 등등 그들은 소문 확산의 이유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다.
자신의 업적을. 그리고 앞으로 얻을 이득을 곱씹는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이리 호응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일을 좀 더 크게 벌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귀족 하나의 말에 다른 귀족이 받았다.
“아쉬울 정도입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규모를 늘리시지요.”
하나같이 고무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루니는 미소를 지었다.
일이 커질수록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귀족들의 숫자는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우둔하지 않았다.
애초에 임프리아에 한정하여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베스타인 공작 때문이었다.
전쟁 반대파인 베스타인 공작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한 제국 내 부정적 인식을 가라앉히고, 전쟁의 승리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그렇게 계속 승리하다 보면 북부든, 남부든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날 터.
그쯤 되면 공작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계산.
압도적으로, 화려하게 이겨 달란 주문도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점점 크게. 그렇게 눈덩이 굴러가듯 막을 수 없게 커지게 되면!’
루니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그리되면 현재 황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재물이 들어올 것이다.
‘제국의 번영기라 불렸던 그 시기. 하지만 그건 곧 전쟁의 역사 아니었던가!’
그렇게 재물을. 그리고 자신들의 사람이 요직을 채우는 순간.
최종 목표인 그 자리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하늘이 날 돕고 있어. 게다가 그 아이 혼자 내려온 덕분에 일이 더 수월해지지 않았는가.’
로라스 진 베스타인.
크라운의 귀족들은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아니 들었어도 기억하지 못할 이름.
하지만 자신은 안다.
북부에 자신의 사람을 심기 위해 오랫동안 눈여겨본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에듀 남작.
정보 길드로부터 락의 발전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로라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두루두루 잘된 거지. 게다가 말귀도 잘 알아듣지 않는가.’
로라스가 많은 귀족과 접촉하여 모종의 거래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나쁠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에듀와는 달리 로라스는 욕망이 커 보였다. 그리고 클수록 자신이 이용하기에는 좋았다.
다만 의뭉스러운 건 노예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거리의 성자’라는 명성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았다.
‘설마 놈 역시 최종적인 목표는 거기인가? 아니지.’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했다.
노예 따위의 마음을 얻어서 뭐 하겠는가?
그리고 계획이 성공하면 노예의 숫자는 지금의 수 배 이상 늘 텐데 말이다.
‘아직 치기란 게 남아 있을지도.’
로라스는 북부의 무인이니 영웅이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여하간 흥미롭단 말이야.’
루니는 그냥 즐기기로 했다. 지금 최고의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 * *
누군가에게 최고의 상황을 만들어 준 장본인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대충 다 끝난 것 같네요.”
렌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아델리나 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할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탄 사이 아닌가요. 앞으로도 공치사할 필요는 없어요.”
아델리나의 말에도 렌은 활짝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문이 부풀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어떻게든 한 다리 걸치고 싶은 귀족이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 한 줄 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거금을 지불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고.
“그때 말한 숫자, 실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골머리를 앓던 숫자의 부담감을 벗어났다.
“웃는 걸 보면 더 늘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곧바로 들리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소영주님, 그건…….”
로라스는 자리에 앉고는 웃었다.
“믿고 맡겼으니 지켜볼 뿐. 난 내 욕심을 말한 것뿐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목을 끌게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욕심에 눈이 멀었다면서? 지금처럼 광풍이 불 때는 내 몫만 보장하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그렇긴 하겠군요.”
“그보다는 이제 정말 싸워야 할 것에 신경 써야 할 텐데.”
로라스가 그리 말하며 슬쩍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아쉬웠다. 그녀가 선수를 쳐서 정보 길드를 꿀꺽한 건 말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편에 선 건 확실한 듯했지만, 상황은 늘 변할 수 있는 법. 아직 백 퍼센트 아델리나를 신뢰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준비는 해 뒀습니다. 로라스 백작님.”
로라스의 시선을 받은 아델리나는 준비했다는 듯, 종이 한 뭉치를 책상 위로 올렸다.
그리고 로라스는 손을 뻗어 그걸 살폈다.
수많은 보고서 전부 임프리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라가 아니군.”
엉망이었다. 대체 어떻게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렌이 한마디 했다.
“돈의 힘이죠. 끊임없이 돈을 흘러나오니 그들을 건드릴 이유도 없고. 악의 축이다 뭐다 하더라도 각 나라의 최상부는 그곳을 건드릴 생각은 없을 겁니다.”
“렌, 그대도 엮인 게 있나?”
“저희 상단과는 영역이 떨어져 있습니다. 웬만하면 엮일 생각도 없고요.”
렌은 그리 대답하며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어마어마한 비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니만큼 외부 조력자도 많이 생길 겁니다.”
“대놓고 나서기는 힘들 텐데?”
“그렇겠지요.”
“그럼 용병으로 전쟁을 치르겠는데?”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주변 용병들은 전부 그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용병뿐만이 아니라 마적단부터 방랑자들까지.”
“으음.”
“그나마 에펠리온 교단에서 성기사들을 파견하여 성전으로 선포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병력까지 위장하여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많은 비밀이 있는 곳이니까요.”
렌이 아델리나를 보며 하는 말에, 로라스도 그녀를 보며 말했다.
“또 감사해야겠군요. 아델리나 님.”
“예측 가능한 범위입니다. 보고서 뒤쪽에 예상 숫자가 있을 겁니다.”
로라스는 종이 뭉치 뒤쪽을 뒤지다가 소리를 냈다.
“예측 가능한 범위지만 숫자는 아니고 알려진 것만큼 쉬운 적들은 아닐 것 같군요.”
“승패에 영향은 없을 겁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로라스는 말끝을 흘리며 생각했다.
‘이런 곳은 머리들만 잡으면 쉽게 승부가 난다. 하지만 황제파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원하고 있으니.’
임프리아의 악당 이미지, 실제로 그런 곳이기도 했지만, 로라스는 될 수 있으면 많은 피는 흘리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자신의 싸움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서로 이용하고는 있지만, 정말 그 필요가 없었다면 이리 이용당할 마음은 없었다.
“당연히 승패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때 아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어찌 이기느냐? 그리고 이긴 후에 어찌 보이느냐?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어요?”
“…….”
“로라스 백작님. 제게 군사 직을 맡겨 주시겠어요?”
“아델리나 님. 그 말씀은…….”
이번만큼은 로라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 직을 맡겠다는 건 자신도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저도 참전합니다.”
“아델리나 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장은 겪지 않으면 모릅니다. 막연히 생각하는 것, 그 수십 배 이상으로 비참한 곳입니다.”
로라스는 말려 봤지만 아델리나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성전이라 선포했습니다. 제가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로라스 백작님.”
“성기사들로만으로 구색을 갖추는 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전쟁 아닌가요? 구색만이라면 ‘성전’이라는 거창한 단어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로라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최소한 자신의 앞에서는 저리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델리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지 않은가.
“두고 보시다가 아니겠다 싶으면 언제든 내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제 뜻대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하아! 하아!”
짧고 굵은 숨소리를 연달아 내며,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떤 놈들이지?’
사실 어느 정도 해답은 가지고 있는 의문이었다.
용병단은 물론이고 개인 용병들까지 끊임없이 임프리아로 몰려드는 참이다.
그리고 그 용병들을 노리는 강도들도 많았다. 자신처럼 홀로 다니는 용병들을 말이다.
아마도 이놈들도 그런 놈들일 확률이 높다.
규모나 실력으로 봐서는 작은 용병단 정도는 털 수 있을 놈들이지만.
‘이것도 네놈들 운명이겠지.’
자신을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탐색전도 없이, 단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공격하는 큰 실수를 말이다.
‘덕분에 난 몸도 풀고…….’
사내는 일어나 쓰러진 자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렇지 않아도 가진 돈이 다 떨어져 가는 판이다.
떠날 때만 하더라도 정말 큰돈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 하나 없이 대륙을 떠도느라 돈을 많이 썼다.
팔자 좋은 유람이었다면, 그래도 돈은 많이 남았겠으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여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써야 했고, 그리되다 보니, 그 큰돈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여하간 돈 되는 것들을 수거한 사내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 놈들이었지만, 그건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았다. 그러니 이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값이라 치기로 마음먹었다.
“잘 쓰마.”
사내는 봉분까지 만들어 준 무덤을 향해 한마디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덕분인지, 탓인지 오늘은 제대로 된 숙소에서 머무르고, 제대로 쉴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가면서 사내는 생각했다.
‘진작 이쪽으로 왔어야 했는데.’
임프리아는 구린내 가득한 나라다. 그리고 자신이 쫓는 놈도 구린내 가득한 놈이다.
괜한 시간을 썼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지금 이리 생각하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라는 걸.
그리 헤매고 탐문하고 추적해서 자신이 쫓던 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모르고 이곳에 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사내는 주머니 속에서 쓴 내 나는 풀을 꺼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맛은 더럽게 쓰지만 미미한 각성 효과를 내는 풀이다. 지금처럼 힘들 때는 제법 도움이 된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람 사는 곳이 보였다.
임프리아는 그 악명과 어울리지 않는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잘 발전된 도시를 보는 듯한 느낌.
하긴 그냥 악인이 아닌 돈을 가진 악인들이다. 대부분 자신을 위해 돈 쓰는 것은 아끼지 않을 터였다.
사내는 제일 거대한 여관을 찾았다.
원래라면 돈을 아끼기 위해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되겠으나, 어차피 자신의 여정은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는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니만큼 얻어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놈의 정보를 얻으면 족하다.
그런데 말이다.
“제국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그런 애송이를 대장으로 보낸다니.”
“그게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라던데.”
쫓는 놈에 대한 정보가 아닌. 늘 가슴에 품고, 그리워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을 먼저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불쌍하구먼. 필승이라 생각하며 올 테지만…… 무덤이 될 텐데.”
이건 또 뭔 소린가?
사내, 번천은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