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74화 (17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4)

“으음.”

흥미로운 제안이다.

“네 생각인가?”

“그게…….”

렌은 신전에 다녀온 걸 말했고.

“성녀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반문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야. 나에 대해 뭐라 하던가?”

“소영주님을 굉장히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렌을 보고 있으니 의문이 들었다.

판드와 쥬니스 그랬지만, 어느새 렌도 구워삶은 것 같다.

‘그 사술만으로는 이리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녀의 힘은 정신계 마법이 아니다. 내게 처음 그 사술을 썼을 때 확인했던 적이 있다. 나도 나름대로 고위 마법사 아닌가.

‘그건 마치…….’

심각히 생각하니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지나친 생각이지.’

이 세계에, 저쪽 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사술이 있을 확률은, 지금 나 같은 존재가 있을 확률 아닐까?

“그리고 이번 계획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렌이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에펠리온 교에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녀의 상황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 않나?”

“이번 기회에 성녀님도 상황을 반등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주교의 직접적인 말도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라…….”

좋지 못한 상황이라 알고 있었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보다.

“그래서 렌, 당신은 가능하다 보는 거지?”

“네. 어차피 중요한 건 여론 아니겠습니까? 황제파가 원하는 건 당연한 승리가 아닌 그것일 테니까요. 에펠리온 교단이 밀어준다면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 있는 렌의 대답.

렌과 아델리나가 협력하여 만든 작품은 확실히 그럴듯했다.

황제와 루니가 부탁한 전쟁은 ‘임프리아’라고 불리는 왕국의 점령이다.

임프리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어찌 유지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가는 왕국이다. 시스템이 어찌 돌아가는지 둘째로 치고 일단 그게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작은 왕국.

수많은 내전으로 나라 같지 않은 그곳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길 테니 각설하고, 중요한 건 대륙 그 어떤 나라도 그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법지대의 국가판인데 그 어떤 나라가 그곳을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그 나라가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나라에서 피신해 온 범죄자들이 쓰는 검은돈. 그리고 쓸모없는 땅에, 국경 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황제는 그곳을 점령함으로 대륙 악인들의 거처를 소탕했다는 명성과 마르리타와 고르곤 두 나라의 국경과 맞닿음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루니 백작은 수도의 삼천의 병력과 남부 귀족들로부터 이천의 병력을 모아 내게 맡긴다고 했다.

총 오천의 병력.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거기에 오천의 병력 중 이천이 기병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임프리아 따위를 점령하는 데 그만한 규모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다.

보급도 어렵지 않다. 자국 내 영지와 영지의 이동 수준.

한마디로 질 수 없는 전쟁.

제국군의 화려하게 선보이고 완벽하게 적을 제압함으로, 국내의 이목과 민심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려 하는 황제파 계획의 시작.

그런 전쟁의 임무가 내게 맡겨졌다.

베스타인이라는 성을 지닌 북부의 지휘관이라는 상징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렌, 아마도 아델리나의 머릿속에 나왔을 듯한 제안도 여기서 시작했다.

귀족들로부터 제공받는 병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신 노예로 대체시키자는 것.

그리고 임프리아를 점령 후, 노예들 일부는 사망 처리하고, 또 전후 처리 인원으로 처리한 후, 락으로 빼돌리자는 것이다.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성녀님이 말씀하시길 허술한 부분은 에펠리온 교단의 교세로 덮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기사 일부를 파견하여 성전(聖傳)으로 포장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하셨습니다.”

‘성전이라…….’

보통 사람 머리에서 나올 계획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목적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서 황제의 이름을 드높이기만 하면 된다.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그럴 수만 있다면 돈도 안 되는 노예 따위는 기꺼이 제공해 줄 것이고. 수상함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는?”

“루니 백작이 보급은 충분히 약속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화려하게! 압도적으로 제압만 하면 재원을 아끼지 않겠다 하더군.”

“그럼, 제가 그 돈으로 최대한 빼돌려 보겠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자신 있게 말하던 렌이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서야 본전 생각이 나나 보다.

그걸 탓할 생각은 없다.

그는 상인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니까.

“얼마나 빼돌릴 수 있겠나?”

“이 년 동안, 최대 삼만입니다.”

긴 시간에 예상보다는 많지 않은 숫자다.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렌이 말을 덧붙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눈에 띄지는 않아야 하니까요. 이게 제가 계산해 낸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

“이것도 에펠리온 교단이 따로 빼돌린 숫자를 포함한 겁니다. 소영주님…… 그 이상은 제 능력 밖입니다.”

조마조마한 목소리.

그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다. 남 돕자고 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능력의 한계를 끌어내는 것으로 족하다.

“모든 게 끝나면 또 돈을 벌어야겠군.”

“네?”

“자네 손실을 보충해 주려면 말이야.”

“아! 아닙니다. 소영주님.”

계획을 승인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빼돌릴 노예들은…….”

“나이 어린 자. 노동력을 가진 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을 다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체력 약한 자들은 어차피 이번 탈주 작전을 버텨 낼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를 구하려는 것이지 시체를 빼돌리려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산가족을 만들지 않겠다고 한 건 자네였어.”

“……맡겨 주십시오. 최대한 잡음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나친 부담을 주기는 싫지만 렌,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싶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 돌아가는 렌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정치’라는 걸 해야 할 때였다.

* * *

‘내가 어찌 된 거지?’

제레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대륙 제일의 정보 길드로 키우기 위해 앞만을 보며 달려왔다. 그리고 곧 그 열매가 눈에 보일 참이었다.

하지만 그 열매가 익기도 전에 자신이 따서 던져 버렸다.

에렌의 유력한 귀족에게 계약의 종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바로 그 조치 탓에 에렌에서 얼마 있지도 않은 조직이 박살 날 예정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어찌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무슨 저주라도 걸렸나?’

그럴 리가 없다. 최근 성녀님을 만나면서 충만한 느낌을 받지 않았는가?

그건 축복이지 저주가 아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자신이 에펠리온을 믿긴 하지만, 광신도처럼 무작정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독실한 교인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제레미는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에펠리온의 거대한 석상이 보였다.

‘신의 뜻? 그런 게 정말 있나?’

제레미가 다시 의심을 던질 때였다.

“와 계셨군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제레미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성녀님.”

“빨리 오셨네요.”

“성녀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레미의 말에 아델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분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데 성녀님.”

“말씀하세요.”

“제가 좀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

“그게…… 제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게 있는데…… 성녀님을 만난 후로 자꾸 어긋난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십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건…….”

“믿으세요. 믿고 또 믿으세요. 그러면 원하는 걸 손에 쥐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무엇을 걱정하나요? 제가 이리 도와 드리는데.”

순간 제레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고, 축소되다가, 어느 순간 초점을 잃었다.

“의심은 버리고, 걱정은 거두세요. 모든 것이 뜻대로 될 것이니.”

“네. 성녀님을 믿습니다.”

대답하는 제레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한 듯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델리나는 생각했다.

‘잘 버티네.’

방심했을 때 파고들지 않았다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긴 이 정도나 됐으니 히든아이를 만들어 냈겠지.’

여하간 통제하기 까다롭다. 그래서 그를 하루 간격으로 신전으로 불러 허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레 후면 전혼대법의 작업이 끝난다.

‘배워 두길 잘했지. 사부님은 이런 대법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했다. 거부감만 버리면 이만큼 훌륭한 수단도 없다.

제레미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러면 그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제 능력은 그대로 발휘하되,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지루하고, 귀찮은 작업이긴 했지만, 매일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고.

‘다 만들어진 조직을 통째로 흡수하려면 이것도 싸게 먹히는 것이지. 그분을 보좌하려면 정보의 통제는 필수적이니까.’

물론 정보량에 관해서라면 자신도 뒤질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전국에서 이런저런 일이 본단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모두가 쓸모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정보 속에서 흐름을 찾는 건 자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 편승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건 쉬운 일이었고 말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로를 이쪽으로 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에펠리온’이라는 종교.

최고의 조직을 별 힘도 쓰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은가.

덕분에 찾아야 할 그분도 찾았고, 또 이리 보좌할 수도 있고 말이다.

“제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 제레미가 아델리나에게 그리 물어 왔고.

“해 주셨으니 받아야 할 차례지요.”

그녀의 대답에 제레미 눈동자의 초점이 조금 돌아왔다.

“무엇을…….”

“에렌에 ‘고스트’라는 조직이 있다더군요.”

제레미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고스트. 왜 모르겠는가?

에렌 흑사회의 수장 중 하나였던 미카이와 잘 협력하여 세력을 구축해 나다가, 그 조직 때문에 모든 것이 끝장나지 않았었냐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녀님께서는 어찌…….”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에펠리온 님의 아래에 있습니다. 그곳에도 길 잃은 양이 있지요.”

“아!”

제레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믿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거기에도 자신과 같은 이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울타리로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보듬어 살피면 그것도 에펠리온 님의 축복.”

아델리나의 그 말에 제레미는 솟구치던 의혹이 사라졌다. 어찌 가도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이런 충실한 삶의 만족감과 함께 개인적인 목표까지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제레미가 환한 표정으로 석상을 보며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며, 아델리나는 생각했다.

‘이게 잘 먹히긴 하는군. 기본적인 조직은 구축되었고. 또 뭘 해야 하지?’

그 옛날 자신은 정보 조직을 관리했다. 하지만 그분을 위한 큰 그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그렸었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자신보다 잘 그려서 맡겼을 뿐이지,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도 훌륭한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