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73화 (173/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3)

‘대체 어쩌실 생각이신 건지…….’

돌아오는 길에 렌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소영주는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락의 발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건 흑사회, 특히 무법지대를 장악한 방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늘 산맥 개발과 영지전 때는 또 어떠했는가?

하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락의 원주민들을 훈련시킨 건 둘째로 치고, 아카데미 사업은 깜짝 놀랐다.

‘평민들에게도 공평한 기회’라는 이상향을 가진 소영주.

진심으로 존경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가도 너무 나갔다.

십만 노예 이동은 정말 너무 나간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고민을 잔뜩 안은 렌이 밖으로 나올 때였다.

“렌 님이시지요?”

에펠리온의 신관으로 보이는 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신분을 물어 왔다.

“그렇습니다만…….”

“주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주교시라면…… 위아펀 님이 말입니까?”

“네. 뵙기를 청하십니다.”

“저를 어찌 알고…….”

순간 렌은 정신을 차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라운에서 에펠리온 교의 위세는 막대하다. 그런 교단에서 상인인 자신을 찾은 이유가 뭐겠는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옆에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크라운에서 저렇게 대놓고 사기를 칠 수 있는 담 큰 자가 있을까?

“영광입니다.”

렌은 호위병들과 마차에 올랐다.

만약에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바깥을 수시로 살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마차는 대로변을 따라 그대로 신전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이리로.”

렌은 안내받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을 믿지는 않으나, 신을 믿는 교도다.

웃긴 말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사업에 필요한 사람들이 교도이니, 자신이 교도가 되었을 뿐이다.

주로 에펠리온 교도이지만, 또 때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교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전 내부로 들어오니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웅장함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다. 정말 신이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내하던 신관이 무릎 꿇으며 하는 말에 흠칫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 꿇었다.

꿇으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자의적으로 꿇은 건지,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꿇은 건지 말이다.

“그대가 렌인가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무릎을 꿇은 건 자의라는 것을.

“네. 그렇습니다.”

“잘 왔어요. 기다렸습니다.”

계속 전해지는 목소리에 렌은 멍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상인의 본능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게 만들었다.

‘에펠리온 교단에서 성녀라 하면…… 아델리나 제1 후계자…… 하지만 후계 중 제일 세력이 약한…….’

렌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정보를 조합했고, 이내 자신이 이 후계 싸움에 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상대가 먼저 말하기 전에 판단해야 했다.

이게 득일지 실일지. 이걸 대충이라도 빨리 결정해야, 협상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단 한마디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로라스 백작님이 믿고 일을 맡기는 분이라 들었어요.”

“네? 아! 네…….”

“그래서 이리 초대했어요. 그대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렌은 다시 고민해야 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잠시 후.

렌은 자신이 이렇게 에펠리온 교의 성녀와 단둘이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마녀가 아니니.”

렌은 그 말에 더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렌이라고 합니다. 성녀께서 저를 이리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말씀드렸잖아요. 로라스 백작님이 믿고 일을 맡기시는 분이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델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지력이 대단하시네요. 역시 백작님의 사람답습니다.”

렌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의지?’

그러다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거짓말 같았다. 옥죄이던 숨구멍이 뻥 트이는 기분. 이제야 제대로 아델리나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속내를 들키기 전에 아델리나가 물었다.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요?”

“그게 무슨…….”

“전쟁해야 하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고. 역시 노예 문제인가요?”

……!

“그리 보실 필요 없어요. 그분을 모셨던 시간은 제가 한참 오래되었으니.”

“.......”

“아! 이건 그분에게는 비밀이에요. 반드시 지켜 줄 거라 믿어요.”

“네…….”

“표정을 보니 제 생각이 맞는군요. 백작님이 노예를 전부 구원하겠다고 하시던가요?”

“그게…….”

“그분의 믿음을 샀으나,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고 있군요. 헷갈려 하는 걸 보니.”

렌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뭘 헷갈려 한다는 뜻입니까?”

“왜 그분이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해 못 하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렌은 혼란을 느꼈다.

‘뭐지? 이 여자는?’

자신보다 더 오래 로라스를 모셨다고 했다. 하지만 락에서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에펠리온의 교단이 락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데다 자신이 로라스를 이해 못 한다고 탓하고 있었다. 그래도 락에서는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델리나가 말했다.

“아마도 시작은 작았을 거예요. 눈앞의 일. 아마도 가족의 일이겠지요. 부친이 락의 영주이니 아마 락의 발전까지 자신의 일로 여기셨을 거예요.”

“…….”

“아마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거예요. 어려워 보였을지 모르지만, 보이는 것만큼 어렵게 진행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겠지요. 맞나요?”

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하늘 산맥에 나타난 게이트부터 몬스터 웨이브. 그리고 이어진 영지전까지.

락의 위기라고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태는 의외로 금방 수습되었었다.

아니, 수습이라 표현해서는 안 됐다. 그런 위기가 끝날 때마다 락은 유·무형적으로 발전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북부와 남부의 대립. 황제파는 로라스 님을 이용하려 하고 있지요. 그런 와중에 그분은 노예를 구원하려 하고 있어요.”

“그렇긴 하지만…… 현실적인 방안을 받아들이시겠다고…….”

“그 현실적인 방안이란 걸 곧이곧대로 듣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게…….”

“그분의 기준은 일반적인 기준과는 달라요. 혹시 현실적인 방안이라 해서 노예 수백을 사서 락으로 빼돌리려고 했나요?”

렌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렇게 하고, 추후에 조금씩 노예를 빼돌리면 납득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훌륭해요. 보통 사람의 현실적인 답안이에요. 하지만……!”

아델리나는 렌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분의 기준에서 현실적인 방안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래서 오늘 그대와 함께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해 보려고 해요.”

꿀꺽.

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회의’라는 걸 시작했다.

주로 말하는 쪽은 아델리나였고, 렌은 듣는 쪽이었다.

렌은 주로 감탄과…… 자신의 분야에서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아델리나가 최종적인 숫자를 말하자, 렌은 조심스레 말했다.

“계획은 가능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반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돼야 그분은 납득하실 겁니다.”

“막히신 분이 아닙니다. 잘 설명 드리면…….”

렌이 말하려는 걸 아델리나가 잘랐다.

“렌 님.”

“네. 성녀님.”

아델리나는 렌을 직시하며 천천히,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분을 모시려면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

“그분의 모든 것을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그분은 변덕마저도 격이 이뤄진 상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정 시간 쌓이게 되면 품이 되고, 그것은 곧 격을 이루게 됩니다.”

렌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의도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그렇게 격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어느 순간 실없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가 깃들게 됩니다. 그분의 격은 이미 정점에 이르렀으니까요.”

“…….”

“내키는 대로 하셔도 가진 격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렌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교단의 성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모든 걸 간단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로라스’라는 신에 관해서.

지나친 비약이지만, 최소한 그리 생각하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성전(聖傳)이 될 것입니다.”

그녀는 이걸 정말 종교적인 일로 만들어 버렸다.

* * *

“소식이 없다니요!”

디존슨의 부인 네라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뭡니까! 확실하다 하지 않았나요?”

그녀 앞에 보고하는 사내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시도조차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겁니까!”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절대 그럴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야지요! 선금으로 준 돈이 얼마입니까! 혹시, 돈만 받고 모른 체하려는 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생겨 일이 정지되었다는 것만!”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로 말입니까!”

“그게…….”

사내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줬던 돈을 돌려받았습니다.”

“위약금까지?”

“아닙니다. 그리고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은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 선금만 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대체 무슨 정보를 더 어떻게 줘야 한답니까? 애초에 그 정도 역량도 없는 곳에 맡긴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게…….”

사내도 환장할 지경이었다.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곳에 맡겼다고 자부했다. 계약의 중요성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히든아이다. 정보 길드로서는 손에 꼽는 곳이다.

“이거, 혹시 배신한 건 아니겠지요? 이쪽의 의뢰를 미끼 삼아 저쪽으로 붙었다거나 하는…….”

사내는 급히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자신의 가치를 끝장내는 일일 테니까요.”

“그럼 대체 무슨 이유랍니까! 그걸 알아야 대처하지 않겠습니까?”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빨리 움직이셔야 할 거예요. 락의 그 촌뜨기들이 날이 갈수록 명성이 높아지고 있어요. 쥐뿔도 없는 것들이.”

네라페는 이를 지그시 깨물며 두 눈을 치켜떴다.

그녀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 부부들처럼 권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근래 락이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와카디아 촌구석에서 그래 봤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별 볼 일 없는 곳에 사람이 몰렸다. 사람이 몰린다는 건 힘이 몰리고 있다는 방증.

나라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라스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데, 그 부모까지?

그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 부부를 깎아내리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마저도 역효과가 나는 것 같았다.

‘이번 일이 잘되면 그들도 처리하려 했는데.’

일가의 비극.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 아니겠냐 말이다.

물론 시아버지인 공작의 눈을 피해 일을 벌이는 건 쉽지 않다. 로라스도 그 때문에 에렌 안에서는 손을 쓰지 못했다.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때 나라페에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거면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 거야.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럴 거야.’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