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2)
시간은 좀 지났으나, 정리할 게 꽤나 많이 있을 텐데 말이다.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공자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델리나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 이제 공자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요.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소문이 빠르다.
자신의 일도 정신없었을 텐데.
“축하드려요. 그런데…….
그때 옆에서 쥬니스 입을 열더니 뭔가를 찾는 듯했다.
“판드를 찾습니까?”
“네…….”
“여기 머무르다가 불편하다고 하여 따로 숙소를 옮겼는데…….”
그녀에게 알려 줘야 하나 싶다. 빠져나가면 골치 아픈데 말이다.
그때 아델리나가 말했다.
“쥬니스 님이 크라운을 잘 아시더라고요. 금방 찾을 테니 판드 님이 계신 곳을 알려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이 말이 꼭 이제 혼자 움직이게 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렸다.
아델리나를 봤다. 옛날처럼 사술을 쓰는 느낌은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지.’
크게 신뢰할 이유도 없는데. 또 신수 때문에 내게 깜찍하게 수작까지 걸었던 그녀가 밉지 않다. 그리고 그녀 말을 따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까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쥬니스를 보며 말했다.
“판드는 여행자의 거리에서 가장 큰 건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쥬니스는 반갑다는 내색을 보이다, 이내 아델리나의 눈치를 슬쩍 봤다.
“볼일 다 보시면 신전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아델리나 님.”
마치 주종 관계를 보는 듯한 상황은 착각이 아니니라.
좋다고 나가는 쥬니스를 보며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쥬니스가 아델리나 님을 많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쥬니스 님도 에펠리온의 신도이시라.”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 아님을 나도 알고, 아마 아델리나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시간이 꽤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정리를 빠르게 하셨군요.”
“여기 주교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무난하게 처리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론이 나올 모양이다.
“말씀하시지요.”
“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요. 그리고 그게 로라스 백작님과 관계가 있는 일 같아서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저와요? 저는 에펠리온의 신도가…… 아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혹시 ‘네라페’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네라페?
순간 떠올랐다.
“들어가지시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아델리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이야기는 길어질 것이다.
네라페는 디존슨 백작부인의 이름이었다.
* * *
‘차분하게.’
몇 번이나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
하지만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오는 내내 그랬었다.
‘그럴 리는 없으실 테지만.’
모르실 거다. 절대 모르실 거다.
알 수 있을 방법이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확신이 들었다.
알았다면 어찌 지금 저 위치에 계시겠는가.
실버 스워드?
알아보던 중 미딩에서 열린 실버 스워드 대회의 우승자라는 걸 엄청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서 재밌어도 했다.
지도 대련이라면 모를까? 대회에 참가하실 분은 아닌데 말이다.
여하간 그런 이유로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조마조마했다.
‘알아서는 안 돼!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했다.
사욕(私慾)이라 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 사욕 때문에 이리 조마조마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욕심내도 되지 않은가?
새로운 세상이며 새로운 인생이다. 못 할 것도 없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잠시 정신을 뺏겼다.
“교단의 일을 알아보다가 정보 길드를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보 길드를 파악하는 중 그 이름과 로라스 백작님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생각하시는 표정.
나도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피가 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족 관계일진데, 조카를 암살 의뢰하는 백모가 많지는 않을 터이니.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니 말이다.
계속 침묵하는 그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정확히는 루니 백작이 왜 로라스 백작님의 부친을 크라운까지 초대하였는지도 말입니다.”
이런 정보들을 이용하여 이분과의 관계를 성립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신뢰를 살 수 있는 발판만 가질 수 있다면 족하다.
신뢰를 사는 법?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아는 것을 전부 말했다.
그게 최선이다.
나름대로 계산이라는 걸 한다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본능적으로 사시는 분이니까.
내 진심을 안다면 절대 내치지 않으실 테니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끌려다니는 분 아니던가.
이 상황에서도 어린아이들 때문에 노예와 빈민들의 일에 나서 거리의 성자가 되지 않으셨는가.
그 어느 때든 하고 싶은 걸 한다. 가끔은 그런 게 자신들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뭐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큰오라버니를 제외하고는 자신들 모두가 그런 성격 때문에 이분에게 구원받았으니까.
“그 정보 길드라는 곳. 신뢰할 수 있는 곳입니까?”
“가장 큰 조직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에 대한 것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걸 전부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로라스 백작님도 절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할까요?”
“물 한잔 대접하고 성찬을 대접받는군요.”
당장이라도 정체를 밝히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이 세계에는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체가 발각되면 할 수가 없게 된다.
아시게 되면 혼자 비밀리에.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는 사모조차 허락치 않으실 터.
이분은 로라스로 있어야지. 절대 유역후가 되어서는 안 됐다.
* * *
“으음.”
굉장히 많은 정보를 받았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
‘무슨 생각이지?’
뚫어지게 날 보고 있는 아델리나.
크라운까지 동행하긴 했지만, 특별한 호의를 베풀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인가?’
잘됐다 싶다.
락에서는 몰랐는데 오면서 종교가 이 세계에 굉장한 영항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크라운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도 확인했다.
‘믿음으로 안정화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터.’
내게 호의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후 이야기하기도 편하리라.
여하간 그녀가 전해 준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황제의 의도였다.
‘상징적 의미라…….’
북부의.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자인 내가 자신들의 편에 서서 움직이는 걸 보여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백작 작위를 받고 난 후, 루니 백작이 황제의 의지라며 부탁을 가장한 요구가 바로 이거였다.
―‘임프리아’라고 들어 봤지? 거기를 제압할 생각이야. 그거면 폐하를 만족시킬 수 있고, 자네의 명성은 물론이고 영지도 하사받게 될 테니까.
루니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한 대립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나를 끌어들여 할아버지에게 시위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포함한 더 큰 목표가 있었다.
아델리나가 말했다.
“여론을 모으려고 할 겁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소국일지라 하더라도, 일단 승전의 소식은 언제나 국민의 지지를 받기 좋으니까요.”
“사실이라면…… 좋은 정보군요. 감사합니다. 아델리나 님.”
“백작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씀하시지요.”
“저를 왜 이렇게 도와주시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건 도움도 아닙니다.”
“…….”
“백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저의 영향력은 크고, 또 할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으음, 뭔가 선기를 빼앗긴 느낌.
생각해 보면 그 ‘히든아이’라는 길드 역시 뺏긴 것도 같다.
원래 쥬니스를 이용하여 내가 장악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먼저 손을 썼으니까.
‘물론 장악하지 못하고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나…… 그것만으로도 능력은 인정해야지.’
옅은 미소와 함께, 날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날 이용하기 위해 사술이라도 쓰면 웃어넘기기라도 할 텐데. 저 눈빛에는 그 어떤 잡스러운 힘도 없다. 진정한 호의만이 가득할 뿐.
떠보기로 했다.
“이리 큰 도움을 주시니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실 크라운이나 이쪽 정계에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백작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까요. 백작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면 됩니다.”
정말 아델리나에 대한 정보를 필요할 때 같다.
‘아니…… 뭔 의도가 있다면…….’
일단은 받아들인 후 나중을 지켜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때 대처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때 아델리나가 말했다.
“제게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도든 백작님에게는 어떠한 해도 가지 않을 겁니다. 그거 하나만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받는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것을 알 뿐.”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그렇게 시작할까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의심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머리 굴리는 사람이 아니다.
뜻을 품었으면 행하고. 문제가 생기면 대처하면 될 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 * *
렌이 도착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실제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합니다.”
저 세계에 있는 말이, 이 세계에도 존재하나 보다.
“소영주님, 이번 일 만큼은 정말 반대하고 싶습니다.”
“힘들까?”
“힘든 정도면 제가 소영주님의 의견에 이리 반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 모든 게 소영주님의 의지로부터 시작한 것이니까요.”
냉정한 표정. 하지만 말투는 완곡했다.
“하지만 노예들…… 그것도 그 숫자면…… 황제 폐하의 의지라고 하더라도 쉽게 진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단순하게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돈이 듭니다.”
“아이들만 이동시키면…….”
“고아들은 모르겠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내 돈 써 가면서 원수 만드실 생각입니까?”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천륜을 끊어 놓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역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꼭 해야겠다면?”
“…….”
“내가 무슨 성인이라서가 아니야. 락의 절대적인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노예들 중 상당수는 제국에 불만이 많을 터. 하지만 락은 제국의 한 부분입니다. 누군가 꼬투리를 잡으려면…… 정치적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게 무서웠다면 애초에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영주님과는 상의하셨습니까?”
“소식은 전했지.”
“영주님께서는…….”
“아직 답을 받지는 못했지. 하지만 허락하실 거야.”
아버지는 나보다 더할 분이다.
제 몸값을 치러야 할 포로는 있을지언정, 노예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렌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대로 가도 락은 번영할 겁니다. 그건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는 겁니까?”
“내가 현실을 모르진 않아. 혼자 안 되니 너를 부른 것이고. 가능한 한 현실적인 방안. 그거면 족하다.”
“예상보다는 적은 숫자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래야겠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이렇게 마무리하지.”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어.”
“또 무슨…….”
“전쟁하러 가야 할 것 같아. 그것 역시 준비해야 하는데 이쪽 실무자들은 신뢰가 가지 않아.”
너무 많은 일을 맡겼나 싶다. 표정이 저리 굳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필요하면 해야겠지요. 사람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적 여유는 있으니까. 전쟁은 우리 돈으로 하는 게 아니지만, 보급에 관련된 건 전부 자네의 재량에 맡길 거야.”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리는 걸 보니 상인은 상인이다.
“그건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내일모레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