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1)
‘백작이라.’
황제의 집무실을 나오면서 찝찝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원래 남작위를 받을 거라는 말은 들었었다. 하지만 뜬금 없는 백작이라니.
―루니 백작이 따로 말 할거라네.
어쩌면 이건 황제의 의지가 아닌 루니 백작의 뜻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걸로 나를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들은 그럴 거라 생각할 수 있겠다 싶다.
영지도 없는 허울뿐인 백작이라지만 그 지위는 어디 가지 않는다.
신분제도가 확실한 제국에서 지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타국에서도 제국의 백작이라는 타이틀은 여러모로 유리하다.
하지만 너무 뜬금이 없다.
‘뭐라 말할 것인지.’
황제에게 얻을 건 없다.
그는 루니 백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렇게 루니 백작을 만났다.
“어서 오게. 로라스. 아니, 이제 같은 백작이니 예의를 다해야 하나?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백작님. 그런데…… 백작님이 저를 추천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네 같은 인재는 중앙으로 진출해야 하지 않겠나?”
“과찬이십니다.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이 지위는 감당치 못할 것 같습니다.”
“이미 받은 작위를 되돌릴 수는 없다네. 그리고 지나친 겸양은 좋지 않아.”
대화하는 내내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황제를 띄우듯 말했던 것처럼, 그는 시종일관 나를 띄우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황제가 아니다.
그럴수록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의미 없는, 그리고 실체가 없는 대화가 끊임없이 오갔다.
지루하다.
하지만 기다렸다.
돌고 돌겠지만 결국.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한번 맡아볼 수 있겠나?”
이렇게 본론을 꺼내게 될 터이니.
“제가 말입니까?”
물론 그 본론이 썩 내키는 내용은 아니었다.
“크라운에는 저 말고도 훌륭한 지휘관과 기사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을 수 있는 무장들은 전부 국경에 있으니, 바로 손쓰기가 힘들어.”
“하지만…….”
“그게 폐하의 속뜻이시지. 백작위는 그에 따른 보상의 하나라고 봐도 좋아.”
“…….”
“이번 일을 훌륭하게 완수한다면 다른 상도 반드시 있을 거야. 영지 없는 백작은 있을 수 없다고 할까?”
대가로 영지까지 주겠다는 말이다.
작정하고 계획한 일이니, 회피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단순히 그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자기네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하기에는 베팅이 너무 크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오래는 주지 못해. 부디 폐하를 실망시키지 말게.”
우둔한 황제일지라도 그 이름값은 가볍지 않다. 현 상황에서 그걸 무시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대하겠네.”
그렇게 루니 백작과의 만남을 끝냈다. 후작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들의 의도가 확실하게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후작가에 도착하니 손님이 와 있었다.
“공자님.”
“아델리나 님.”
아델리나와 쥬니스였다.
* * *
히든아이.
정보 조직치고는 규모가 매우 작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 정보의 질은 다른 정보 길드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의 정보원은 한 단체의 장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반적인 정보원들은 없다는 뜻이다.
규모가 작은 조직의 또 다른 장점은 비밀 유지가 비교적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런 장점을 바탕으로 히든아이는 정보 길드 중에서 한 손에 손꼽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얼마 전 하나의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의 암살.
히든아이는 정보 길드지, 암살 길드는 아니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웬만한 암살 길드보다는 자신들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었다.
자신들 규모 정도 되면 그 어떠한 분야든 인맥이 있기 마련이고, 그중에는 당연히 암살 길드도 있었다.
이용하기도 편하다.
암살 길드는 정보 길드를 이용하는 최대 고객.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데스 오브 사일런스에 맡겼다. 반드시 완료해 줘야 한다는 압박과 함께.
이번 일로 사일런스에 빚을 지겠지만, 실보다 득이 많은 거래다.
성공만 하면 차기 에렌의 영주에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러면 제국 내 한 손이 아닌 단 하나의 정보 길드도 가능하다.
이게 바로 히든아이의 수장. 제레미의 계획.
그런데 이 의뢰가 끝나지 않고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의뢰 대상이 크라운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에 제레미는 불길함을 느꼈다.
데스 오브 사일런스가 일에 소홀히 한 건 아니다.
작전 네임. 나이트 플라워.
사일런스 길드에서 이 이름은 가벼운 이름이 아니니까.
결과에 대한 재촉이 계속 전달되었지만, 제레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릴 때 나이트 플라워가 접촉을 원했다.
그 정도 급의 암살자에, 이만한 의뢰면 접촉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불길함은 제레미를 신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다.
대리인을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엿듣기로 한 건 말이다.
펍 스트리트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밤손님의 술집은 그런 장소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사방에 최소 세 개 이상의 골목이 존재하고, 두더지 소굴처럼 지하 통로도 많은 곳.
문제가 생기면 자신 하나 유령처럼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나이트 플라워는 암살자로서는 뛰어나지만, 가진 무력은 크지 못하다.’
자신도 궁금할 정도로 나이트 플라워는 가진 실력에 비해, 암살 성공률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밤손님의 술집은 물론이고, 주변 가게에까지 자신들의 사람을 배치했다.
약속 시간이 되었고.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섰다.
……!
제레미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하나가 ‘나이트 플라워’라는 건 금방 알아챘다. 다른 한 명은 자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성녀님!’
깨끗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레미 역시 에펠리온의 교도.
순간 나가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보고 있노라면 나가서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털썩.
그리고 그런 느낌은 자신만이 가진 게 아닌 듯했다.
“성녀님의 존안을 뵙게 되다니.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녀님! 제게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제 임무도 잊고 나가서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수하들.
어찌 보면 꼴불견일지도 모른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마치 어미 소를 찾는 어린 소처럼, 어린 여인 앞에서 사랑과 축복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성스럽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교도가 아니더라도 저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털썩. 털썩.
밖에서 보고 있던, 자신이 준비한 사람들이 아닌 자들도 안으로 들어와 그녀 앞에 무릎 꿇었다.
제레미는 그 와중에 주변을 살폈다.
자신처럼 제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열이 채 되지 않았다.
타 종교인이던가, 무신교이던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부분 그녀 앞에 무릎 꿇음으로 자신이 눈에 뜨인다는 것이었다.
잠깐의 고민. 그리고 빠른 판단.
제레미 역시 그녀 앞에 무릎 꿇기 위해 발에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그대는 왜 오지 않는가요?”
성녀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 * *
‘미친…….’
사실 예상은 했다. 역시나가 역시나일 뿐.
그래도 무슨 계획은 있을 줄 알았다.
홀로 히든아이를 상대하는 일이다.
‘나오지나 말던가!’
사실 히든아이에게 연락하면서도 그들이 나오지 않길 바랐다. 그냥 모른 척하길 바랐다.
‘하긴 나오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오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만에 하나 아델리나의 이목을 속이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비빌 구석을 제공해 주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희망은 사라졌다.
‘애초에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됐던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이트 플라워’란 네임은 어디서 도박해서 획득한 호칭이 아니다. 그런 자신이 옴짝달싹 못 하는데 다른 이들이야.
‘정보 길드라면서! 그러면 예측했어야지!’
처음에는 그래도 희망을 가졌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이 그들의 사람이란 건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희망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하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을 보라.
몇몇은 놀란 눈치였지만, 몇몇은 아델리나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성녀’라는 존재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결과는 같다.
알아봤든, 그렇지 않든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건 말이다.
‘저건 정말 말도 안 돼!’
보름 넘게 그녀 옆에서 있었음에도 저 존재감은 도저히 적응되질 않았다.
대체 무슨 힘인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사람을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드는 힘.
마냥 신성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대다수가 아델리나 앞에 무릎 꿇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있었다.
무척이나 평범하게 보이는 사내.
이상했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둘러보았던 그녀가 그를 콕 짚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사내는 주춤거렸지만 이내 그녀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몸을 떨기 시작하는 사내.
그런 그를 보며 아델리나가 말했다.
“무슨 땀을 그리 흘리세요. 마음 놓으세요. 해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게 무슨 마법 주문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저는…….”
사내는 땀을 눈에 띌 정도로 흘리며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회개하세요.”
“…….”
“그분 앞에서는 모두가 길 잃은 어린양일 뿐일지니.”
“…….”
“회개하세요! 그럼 편해집니다.”
그 순간 사내의 무릎이 꿇렸다.
“모두 내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회개는 진실해야 하니까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사내의 말에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모두 물러가랏!”
두 손을 모으고, 조심스레 사라지는 사내들.
‘설마? 이 사람이…….’
어떠한 특색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러한 케이스.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지?’
로라스는 상황에 대해 유추라도 했지만, 아델리나는 아니다.
그저 동행이었을 뿐인데 자신의 정체를 알았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 더 은밀할 수도 있는 히든아이의 수장을 알아보았다.
아델리나가 말했다.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러면 당신이 죽어요.”
사내의 고개가 들렸고, 아델리나가 계속 말했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그걸 막기 위해서일 뿐. 의심하지 마세요.”
“그게…….”
“알아요. 하지만 정말 죽어요. 믿을 수 있나요?”
“믿……습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광경이란 말인가?
분명 서로 처음 말을 섞어 본 관계일진데, 광신도와 교주를 보는 듯한 이 모습은.
“막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모든 걸 제게 맡기세요. 믿을 수 있나요?”
“믿습니다!”
아까보다는 더 확신하는 목소리.
“때가 되면 연락이 갈 겁니다. 그 전까지는 자중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세요.”
사내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였다.
무슨 일인가 싶을 때 아델리나가 휘청였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도망칠 기회예요.”
엉뚱한 대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다.
이게 정말 기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