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0)
거리의 성자에 대한 소문은 에펠리온 신전에도 전해졌고, 그 정체.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성자. 특히 그 성자라는 표현은 신전의 전유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크라운의 최대 교단이 바로 이곳인데, 성자라는 호칭을 교인이 아닌 자가 가져간다면, 나름대로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맞습니다. 성자라니요! 말도 안 되는 표현입니다.”
대사제들이 한마디씩 하는 걸 보며 위아펀이 물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원했던 게 있는가?”
“그야…….”
대사제들 몇몇이 당연히 있다. 아니 있을 거라는 뉘앙스로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남이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가장 나이 많은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저희 교인들 중에서도 굶주린 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했지만…….”
“저들은 지원하지 못한 거지. 그리고 저들의 성자가 탄생했고.”
위아펀의 말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우리 교단이 뭐라 해야 할까? 성자라는 표현은 과하니 쓰지 말라 해야 하는가? 그래서 저들을 더 이상 도와주지 말라 해야 하는가?”
“…….”
“별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지금 우리가 모여서 논의해야 할 건. 저들을 위해 어찌 봉사해야 할지야!”
위아펀은 목소리를 높였다.
“타국, 타 종교를 지닌 이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여, 에펠리온 아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야!”
“…….”
“모두 부지엔서 자비 편을 읽고 다시 모이길 바라네!”
위아펀의 말에 사제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가자 위아펀은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성녀께서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아델리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주교가 고생이 많은 것 같네요. 저리 ‘미·숙·한’ 대사제들을 이끌고 오느라.”
위아펀의 머리가 더더욱 지면을 향하자, 아델리나는 손을 살짝 저으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보기 불편합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위아펀이 고개를 들자 아델리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래도 주교께서는 참된 에펠리온 교인이라 마음이 놓이네요.”
“잘 처리했다 생각하시는지.”
“훌륭해요. 자비의 에펠리온 님이시잖아요. 만에 하나 그분을 핍박하려 했다면 용서 못 했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요.”
위아펀은 대화에서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분이라 하시면…· 혹시 알고 계시는 분입니까?”
위아펀은 그 위화감에 대해 물었고.
“그분 다우시네요. 자기 구역도 아니고 남의 구역에서.”
아델리나는 엉뚱해 보이는 대답을 했다.
“대체 뭐가 그분을 자극했을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위아펀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알기가 참 쉬운 분인데. 가끔 불쑥 뭐에 꽂히면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땐 종잡을 수 없는 분이 돼요. 물론 그중 몇 개는 예상 가능하지만.”
아델리나는 위아펀을 보며 물었다.
“어린 사제들이 몇이나 있나요?”
“어린 사제들이라 하시면?”
“성년이 아니 된 자. 어리면 어릴 수록 좋아요.”
“미성년 사제는 백이 되지 않습니다. 저희 교구는 사제의 역할을 쉽게 맡기지 않으니까요. 십육 세 미만의 사제라면 열이 되지 않습니다.”
“그곳을 지원할 때, 그 어린 사제들이 진행하게 하세요.”
“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서품을 받았지만, 그 외의 일은 아무것도…….”
“미숙해도 나쁠 게 없어요. 아니 그게 더 좋겠네요. 그분의 눈에 더 들 테니.”
“대체…….”
위아펀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가 그리하라 했다면 그리하면 될 터.
“준비하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아요.”
“사흘 내로 준비될 것입니다.”
아델리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게 알고 있겠어요.”
그렇게 쥬니스와 함께 회의장을 나오며 아델리나는 생각했다.
‘분명 애들 때문일 테지. 굶주린 아이들…… 그게 그분의 마음을 자극했을 거야.’
이상할 건 조금도 없다.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었다.
자신도, 그리고 자신의 형제자매들도 그렇게 그분을 만났었다. 큰 오라버니만이 유일한 예외였을 뿐.
‘이걸 어떻게 키워 볼까?’
궁리하던 아델리나는 쥬니스를 보며 말했다.
“좀 서둘러야겠군요.”
“네?”
“안내하세요.”
“어디를…….”
“그놈들이요.”
쥬니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말입니까?”
“그분이 바빠질 것 같으니 이런 거라도 제가 미리 해 둬야겠지요.”
“이런 거…….”
쥬니스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델리나가 안내하라고 했었던 곳은 자신의 길드. 그리고 정보 길드 두 곳을 말하는 것이고. 이곳에는 정보 길드밖에 없다.
그런데도 마치 시장 가자고 하는 것 같이 가볍게 이야기하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성녀님. 가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
“제가. 그곳에 가서. 할 게 뭐가 있을까요? 현명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저희 두 사람이요? 히든아이를요?”
“한 명이겠지요. 정면에서 쥬니스 님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은데.”
쥬니스는 대체 뭘…… 할 것인지 물을 뻔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물으면 정말 자신의 생각과 같은 대답을 할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쥬니스는 아델리나와 함께 제국 다섯 손에 든다는 정보조직 히든아이로 향했다.
* * *
거리의 성자.
판드에게 자신이 그렇게 불린다는 말에 별 감흥은 없다.
인간이기에 관심을 갖고, 인간이에게 행한 것에 대해 감흥을 느낀다면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이유였다.
물론 세상사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처음 며칠은 모두가 그저 감사하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했지만, 점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나왔다.
―고작 동전 몇 개에 이 많은 일하라는 게 말이 되오?
―그것 가지고 유세는.
몇몇 이들은 대가를 더 바라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말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동전 한 개라도 더 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선동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어찌 생각하냐고?
이것 역시 별 감흥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달리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
이건 정말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기뻤다.
욕망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앞으로 나갈 희망의 징조이기도 하다. 최소한 난 그렇게 생각했고.
“더 벌고자 한다면!”
더 많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지금은 동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가치가 생기면 또 모르는 일이니까.
‘자력으로 일어나는 건 불가능할까?’
이렇게 먹을 거나 동전 몇 닢을 주는 것 보다, 먹고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의 도움이란 건 잘 안다.
하지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무슨 용 쓰는 재주가 있다고 십만이 넘는 빈민, 노예들을 구제한단 말인가. 게다가 락에서 수만 리 떨어진 타지에서 말이다.
“아저씨!”
뒷골목에 스며드는 햇볕을 쬐며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양갈래 머리를 한 작은 여아. 그리고 그 옆에는 꾀죄죄한 더 작은 남아가 있었다.
“일 다 했냐?”
“네.”
준비해 뒀던 주머니를 하나를 건넸다.
“와!”
그리고 여아가 주머니에 담긴 쿠키를 보며 감탄성을 냈다.
킁킁킁.
그리고 코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얼른 저걸 먹어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 하지만 쿠키는 입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니, 입으로 향하긴 했지만, 자신의 입이 아니다.
“‘아!’ 해.”
“누나 먼저 먹어.”
“아냐. 누나가 먼저 냄새를 맡았으니 먹는 건 너부터 먹어.”
남아의 마른 입술에 쿠키가 비벼져 가루가 떨어진다. 하지만 의외로 남아의 의지는 굳건했다.
손을 뻗어 제 누이의 손목을 잡더니, 힘을 줘 밀었다.
의지가 굳건해서인지 쿠키는 어느새 여아의 입에 들이밀어졌다.
“알았어!”
여아가 그리 말하며 쿠키를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양손으로, 두 개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하아아!”
“우아아아!”
쿠키가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소리를 내는 두 녀석.
“녹았어.”
“그냥 사라졌어!”
사 온 보람이 있다. 기대했던 반응 아닌가?
그러다가 여아가 날 본다. 그리고는 다시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난 먹었다.”
“그래도 하나 드세요.”
“너나 많이 먹어. 집에서 먹던가.”
그 말에도 기어코 내 손에 쿠키 하나를 쥐여 준다. 이걸 누가 줬는지 잊었는가?
그 마음새가 이뻐 입에 넣었다.
락이나 에렌이라면 요리사에게 부탁해, 제대로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만들어 줬을 터였지만. 지금 건 그냥 일반적인 쿠키 맛이다.
하지만 단것이라고는 쉽게 먹어 보지 못했을 이 녀석들에게는 천국의 맛일까?
여아는 환하게 웃으며 제 동생과 두 번째 쿠키를 집었다. 처음 봤을 때…… 지금과는 정반대의 표정이었지만,
―한 조각만. 정말 한 조각이면 되요.
일하다 말고 달려와 애원하던 여아가 말이다.
‘뉘미…….’
이 두 녀석을 보고 있으니 아까 했던 고민을 계속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진중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말이다.
* * *
황제와의 만남이 잡힌 날의 아침.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후작이 배웅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싶었지만, 그 뜻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듀의 장자. 로라스.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네가 로라스인가?”
“네. 폐하.”
황제의 첫인상은 무난했다.
무난하다는 건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거지만, 황제는 그래서는 안 됐다.
황제는 곧 만인지상의 위치 아닌가?
저렇게 특색 없기도 힘들다.
“에듀 남작은 오지 못했다고?”
“폐하의 부르심에 당장이라도 달려오고자 했으나, 오는 도중 풍토병에 걸려 귀환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라도 왔으니 됐지. 루니 백작이 자네를 눈여겨보라더군.”
“영광입니다. 폐하.”
“그래, 루니 백작 말로는 자네가 실버 스워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네. 운이 좋아서 우승했습니다.”
“루니 백작 말로는 락이 근래 강성하다던데.”
“폐하의 선정에 강성하지 않은 영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혓바닥에 기름칠하듯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해 본 적은 없으나, 들었던 기억은 산더미.
무조건 치켜세워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하하, 짐의 은총이 북방까지 미쳤는가?”
“짐이 원래 아랫사람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지.”
“짐이 검을 들면 천하가 발아래 엎드릴 텐데 말이야.”
문제는 이 황제가 적당히, 걸러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자존감이 높은 게 아니라 멍청하다 봐야지.’
그뿐인가?
“루니 백작이 말하기를 북부에는…….”
“루니 백작이 말하기에는 자네가 전선의 경험도 있다고 하던데.”
“루니 백작이…….”
자신의 생각이라고는 없는 것인지, 대화의 두 번 중 한 번은 루니 백작을 언급하고 있었다.//
후작이 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예를 다하느라 굽힌 무릎이 아까워질 정도다.
‘나쁠 것 없지만.’
덕분에 탐색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맡겨도 될 백작위 수여식을 굳이 크라운까지 보낸 이유도 알았고, 또 그가 어떤 꿈을 꾸는지도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속을 읽히는 군주라니.’
게다가 무방비다.
‘루니 백작은 걱정도 되지 않은가? 이런 군주라면 늘 옆을 지켜야 하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들 때 황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 두 개를 건넸다.
“하나는 에듀를 백작에 봉함과 동시에, 와카디아 지역의 대영주의 위치를 공식화한다는 명령서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황제는 히죽 웃었다.
“이리 빠르게 고위귀족이 되는 경우도 드문데. 축하하네. 로라스 백작.”
멍청하게만 생각하고 있다가, 순간 훅 들어온다.
‘뭐지?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