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69화 (169/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9)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 씨는 못 속인다.

하지만 이상하게 견자를 먼저 만나면 이 말이 달라진다.

견자 위에 견부가 있고, 그래서 씨는 못 속인다는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상황이다.

“오냐오냐 키웠더니 자네 보기가 민망하군. 내 아들이 자네와 같은 또래인데도 이리 다르니.”

‘이것 봐라?’

이런 경우에는 서로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일 텐데, 대놓고 사과해 온다.

“호위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오는 길에 도움을 많이 받은 동료이기도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소란을 피운 것 같군요.”

“자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나. 다시 한 번 사과하지.”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더 송구스럽군요.”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뭔가 착각한 것일까?

첫인상은 분명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그 주변이 그랬다.

‘둘 중 하나겠지. 내가 잘못 봤거나!’

아니면 속내를 숨기고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무엇보다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를 소개할 때도 그랬고…….’

대화도 그랬다.

내가 했던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미딩의 흑사회를 장악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무법지대까지 통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문제는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진심이든 뭐든 이리 대하니, 그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지고 있었다.

“자네 부친인 에듀 남작, 아니 백작을 늘 존경해 왔지. 자네는 알지 모르지만 내 대에서 그는 매우 유명했거든.”

이 사람에 대해 알아야 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대화가 끝나는 내내 그에게 끌려다녔다는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렇게 파티가 끝났다.

파티장에 나오며 계속 어두워져 있던 판드에게 한마디 했다.

“한잔하러 가자.”

“이 시간에 하는 데가 있을지 모르겠네.”

“불야성이잖아. 흥청망청한 곳. 마실 곳이 없을까! 왜? 마시기 싫어?”

“아냐. 가자. 비싼 거 사 주는 거냐?”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쾌활하게 되묻는 판드였지만, 속은 속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민감하게 반응했던 건가?’

파티장에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 놈들 한두 명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마다 상대해 줬다면.

‘내 격도 떨어졌을 터.’

그걸 알면서도 그리 반응했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판드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가자! 돈이 대수냐.”

판드는 환호성을 지르며 앞장을 섰다.

* * *

크라운에는 황제가 둘이 있다.

반역이라며 목이 날아갈 소리이지만, 다행히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었던 황제가 다른 상대를 보며 웃고 넘어갔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크라운의 또 다른 황제.

그는 바로 에펠리온 크라운 교구의 주교인 위아펀이었다.

“재고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그런 그가 한 사람, 그것도 한 여자의 앞에서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말하고 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다.”

말의 의미와는 달리 굉장히 담담한 여인의 음성에 위어펀은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묻지 않겠습니다.”

“주교의 뜻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신탁을 어기는 자들이다. 이미 그들은 교인이 아니야. 권력을 탐하는 사람일 뿐. 그대도 크게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교황이시여.”

“그 말은 모든 것을 마무리한 후에 듣도록 하지.”

“네. 성녀님.”

위아펀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고, 감히 여인과 눈을 마주칠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 쳐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시녀처럼 곁에 있던 쥬니스가 있었다.

“지루했지?”

“아닙니다. 성녀님!”

아델리나의 말에 쥬니스는 대답하며 생각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신전에 도착한 후 한 시도 아델리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아니 떨어질 수 없었던 쥬니스는 있는 내내 등골이 서늘한 상태였다.

크라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위아펀이 아델리나에게 복종하는 모습.

그게 어디 복종인가?

어미 개를 따라는 강아지처럼 그건 어떠한 조건이 있는 복종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을 따르듯 아델리나를 따르고 있었다.

“대충 일은 끝났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볼까?”

“무슨…….”

아델리나는 다시 한 번 서늘함을 느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분이 널 살려 두는 이유 말이야.”

“…….”

“설마 네가 여자라서? 흔하게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뭐 그런 것 때문에 널 살려 둔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 거지?”

“아닙니다.”

“맞아. 당신은 영리하니까.”

쥬니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생각 중입니다.”

“으응, 생각하지 않아도 돼.”

“네?”

“생각은 내가 해 주려고. 괜히 고민하다 잘못 짚으면 어떡해? 그래도 정이 들었는데 그리 죽으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어?”

뭔가 아찔해짐을 느끼는 쥬니스는 의도적으로 몸에 힘을 줬다. 그리고 크게 눈을 뜨며 말했다.

“살길을 알려 주십시오.”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면 답이 있지 않을까?”

쥬니스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내용에 관해서였다.

아델리나가 생각하지 말라 했으니, 생각 없이 그냥 그대로 이야기했다.

수십 만의 신도를 거느린 위아펀이 복종하는 존재다. 자신이 머리를 굴려서 어찌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역시 현명해. 그리고 그분이 사람은 잘 보시지.”

다만 궁금한 건 그런 그녀가 왜 로라스를 극존대하는지였다.

락이란 영지의 소영주란 신분?

실버 스워드 보유자?

베스타인 가문이 눈여겨보는 후계자?

모두 그럴듯하지만, 위아펀을 저리 만든 아델리나 입장에서는 정말 별것 아니지 않겠는가?

“이번엔 인복이 없으셨나 보네. 곤란해하시는 걸 보니.”

당사자가 없음에도 저리 꼬박꼬박 존대할 정도로 말이다.

“다행이야. 당신이 살길이 있어서.”

“말씀만 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으응. 최선을 다할 필요 없어. 그냥 소개만 해 주면 될 뿐이야.”

“누굴…….”

“누구겠어? 널 여기에 보낸 놈들이지.”

쥬니스는 다시 한 번 마른 침을 삼켰다.

* * *

황제를 만날 날이 잡혔다.

알현 요청한 지 보름이 넘었음에도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황제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 귀족이 태반이지만, 난 작위 수여를 받으러 오라 초청받은 사람이다.

대리라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는 반드시 있을 터.

“이쯤 되면 확실하군.”

아마란체가 그 이유에 대해 말했다.

“락을 황제파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거야.”

“황제파라 하시면?”

파벌 싸움.

정치에 파벌이 나뉘는 건 당연한 일에 속하지만, 지금 제국의 파벌을 넘어선 극단적 대립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타국은 왕과 귀족으로 나뉘지만 우리는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고 봐야지. 황제와 크라운을 중심으로 한 남부파. 그리고 공작님과 에렌을 중심으로 한 북부파.”

후작의 말은 계속되었고, 나는 어렴풋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을 알게 되었다.

“굳이 대립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할아버님은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황제의 일에 반대하지 않을 텐데요.”

“대립의 이유는 들었나?”

“네. 황제 폐하가 전쟁을 주장한다 들었습니다.”

“그 이유도?”

“태자 시절이 길었다 들었습니다. 그러다 황제에 오른 만큼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법 그럴듯하군.”

후작은 그렇게 내 말에 감정평가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공작님이 그리 반대하시지는 않았을 거야. 국내에 살고 있는 이족(異族)의 반란을 잠재우고, 외부에 그 세를 과시하는 수준이라면 말이지.”

“꼭 전쟁해야 하는 이유가 있군요.”

“루니 백작의 파티를 보고 느꼈던 것이 없는가?”

“사치, 그 이상의 사치를 느꼈습니다.”

“그런 생활이 벌써 십 년이 넘었어. 그걸 위한 재원이 어디서 나올 거라 생각하나?”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었다.

전쟁을 원하는 이유가 말이다.

“사치란 끝이 없지. 경쟁이 붙거든. 남이 하니, 내가 하고, 내가 하니 남도 하는 식이야. 이미 크라운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세금을 거둬. 인두세, 토지세 같은 기본적인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강물에 대한 세금도 받고 있어.”

“황당하군요.”

“어디 황당만 할까? 사치에 모두가 전쟁을 울부짖고 있는 판이야.”

“민심을 돌보지 않습니까?”

“민심이란 게 어디서 어디까지인 건지. 정확히 구분해야 할 걸세. 최소한 크라운의 시민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어!”

“시민들이 말입니까?”

“자신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으니까. 노예들이 있지 않은가!”

……!

“귀족은! 그리고 크라운에 거처를 가지고 노예를 부릴 정도의 시민들은 괜찮아. 문제는 나머지지.”

“…….”

“성 밖으로만 나가도 그런 성난 민심을 읽을 수 있는데! 이자들은, 들을 생각도, 볼 생각도 없어. 이미 뜻 있는 영주들은 크라운에서 꽁무니 뺀 지 오래야. 곧 무너질 거라는 것을 아니까.”

망조가 들었다 생각했는데, 이미 진행 중인 듯싶다.

“락을 황제파로 만들려고 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상징적인 의미지. 북부에도 자신들을 지지하는 귀족이 있다는 것. 그 지역이 와카디아라지만 엄연히 대영주이니까. 어쩌면…….”

후작은 말끝을 흐렸다.

“락이 할아버님과 반목하길 바란다는 뜻입니까?”

“그럴 확률도 있겠지. 에렌의 백분지 일의 힘이더라도 상징적인 의미는 있지 않겠나?”

“이리 부른 이유가 그런 목적이었군요.”

“예측은 예측일 뿐.”

“아닙니다. 알아야 할 이야기였습니다. 그게 예측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몇 가지 대화가 더 이뤄졌다.

크게 중요치 않은 이야기들.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기억해 둬야 했다.

“작위를 받자마자 빠르게 올라가는 게 좋을 거야. 이미 북부와 뜻을 같이한, 최소한 그쪽 성향인 귀족들은 크라운에 서 떠난 지 오래니까.”

후작은 자신도 떠나고 싶지만, 크라운과 북부의 연결 창구이기에 떠나지 못한다는 말로 대화는 끝이 났다.

‘나를, 아버지와 락을 이용하려고 부른 거란 말이지?’

오히려 느긋해졌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를 위해 목숨도 바친다는데, 황제가 호의를 가지고 초대했다면 찝찝할 게 많았다.

‘이렇게 나와 주면야…….’

굳이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마음에 든 게 하나도 없었으니.’

소득이 있다면 판드와 쥬니스. 곧 엮어 낼 정보조직.

‘아델리나도 포함시켜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 * *

거리는 이름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접근조차 하지 말아야 할, 냄새나는 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거리는 ‘거기!’라는 표현으로 불렀던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사람 때문이었다.

‘거기’라는 거리에서, 아무도 불러 주지 않았거나, 애초에 없었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자들을 고용한 자.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심 좋은 총각.

세상 물정 모르는 돈 많은 귀족가의 멍청이 등 많은 이름을 가졌던 그가 요구했던 그 하나였다.

―움직여라! 빌어먹을 등짝을 바닥에 닿게 하지 마라. 일거리가 없으면 길거리라도 쓸고 닦아라.

그 요구에 움직일 수 있는 자 모두 응했다.

그런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모든 이들은 그리 일거리를 주는 사내를 거리의 성자라 표현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