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8)
고민했고, 판단했으며, 결정했으면 나서야 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움직이지 않으면, ‘좋은’이라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규모가 어떻게 되지?”
“규모?”
“노예들의 숫자. 얼마나 될까?”
돌아오면서 판드에게 물었다.
“글쎄…… 전부 합치면 십만은 넘어가지.”
십만이라…….
그 숫자에 순간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건 감당하기 힘든 숫자다.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할 힘이 부족하다.
“어쩌려고?”
“노예의 이동은 자유로운가?”
“불가능하지. 자유민이 되면 또 모를까?”
“버림받았다면서.”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내 걸 남에게 줄 사람이 있어? 뭐, 있기야 하겠지만 많지는 않을걸.”
판드는 천성이 좋은 편이다. 용병치고 물렁물렁한 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예를 물건 취급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관리하는 사람이 있나?”
“알아볼 수는 있지. 그런데 정말 어쩌려고?”
“데려가려고.”
“어디로? 북부로? 하지만 북부는 노예제도가…….”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서.”
순간 판드가 입을 딱 벌리는 게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
“알아볼 수 있나?”
“어렵지는 않아…… 거리에 줍지 않은 동전 같은 노예…… 사람일지라도 가치가 있으니…… 관리하는 사람은 있어.”
“찾아. 그리고 자유의 값을 알아봐.”
“몇 명이나…….”
판드의 물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많지 않음을 알았다.
‘렌이 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무슨 성인도 아니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내가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숫자만, 그리만 하면 된다. 분명 그럼 된다.
‘그 숫자가 몇인데?’
“뉘미!”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알량한 숫자를 생각하는 순간 내 격이 떨어짐을 느꼈다.
‘나 로라스다. 그분들의 아들. 그리고…….’
유역후다.
제왕은 원하는 것을 얻을 뿐.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 * *
‘화려하군.’
루니의 성을 처음 본 순간 든 생각은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사치의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팔란카 가문의 문양인 코요테의 대가리를 조형물로 성문 위에 박아 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느 미친놈이 그걸 금으로 만들어.’
분명 제법 그럴듯하게 보이긴 했다. 금빛이 원래 사람을 홀리지 않는가?
‘하지만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인데.’
‘루니’라는 자의 수준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에 이런 걸 조언할 자조차 곁에 없다는 거겠지?’
주변 사람이 멍청하거나, 아니면 현명한 자를 곁에 두지 않는 성격일지도 몰랐다.
성내로 계속 들어가면서도 기가 막혔다.
벽을 금과 은으로 도배하다시피 했고, 외부 바닥마저도 대리석과 카펫을 깔아 뒀다.
“후원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집사인지 시종인지 모를 중년 사내의 안내를 받아 후원을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 사치의 끝을 보았다.
알록달록한 수많은 꽃과 어른 키만 한 작은 나무들로 작은 숲을 만들어둔 것까지는 좋았다.
“와!”
뭐라 감상하기 전에 따라온 판드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에렌 광장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저거 금 맞나? 도금인가…….”
후원 중앙에 분수대가 있었다.
그것도 황금으로 치장한 분수대가 말이다.
분수대는 유지하기 위해서 한두 푼 들어가는 기구가 아니다.
물을 뿜어내기 위해 꽤 많은 마정석이 필요하기에, 에렌에서도 주민들을 위해 여름에만 가동시키는 정도다.
안내하던 사내가 자랑스럽게 옆에서 말했다.
“저희 성의 자랑이지요. 밤에는 갖은 색깔의 빛의 향연까지 겹쳐지면 환상적입니다.”
‘이러니 약에 손댔겠지.’
외부가 이런데 내부는 또 어떻겠는가?
이만한 사치를 감당하려면 한두 푼 벌어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러니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댔을 것이다.
‘이걸 황제가 모르는 건가?’
더 웃긴 건 수도에 이런 성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설마 황성이 이보다 더 화려한 건 아니겠지?’
상상력을 동원해도 이보다 더 사치스러울 수는 없을 터.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의아할 정도다.
‘심복 중의 심복이라 했지?’
다 그렇게 시작한다. 심복이라 이것저것 봐주고, 무시하고, 배려해 줬다가 이 꼴이 되는 것이다.
멍청한 황제라는 할아버지의 평가는 부족하다.
황족이란 아무리 멍청해도 제 밥그릇. 그러니까 권력은 놓지 않는 법인데, 꼴을 보니.
‘망조군.’
이 상황에서 침략의 야욕까지 있다 하니 답이 나오질 않는다.
내성 파티장으로 들어가니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빨리 왔음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보통 파티장에는 신분 높은 귀족이 입장했을 때, 시종들이 누가 왔다고 알린다.
신분 높음에서 난 탈락이지만.
“하늘 산맥의 수호자이며, 와카디아 지방의 대영주이자 락의 영주인 에듀 진 베스타인의 대리자. 로라스 진 베스타인 경 입장 합니다.”
의아한 일이다.
아버지가 직접 오셨다면 모를까.
아니, 당신이 직접 오셨다 하더라도 불릴 만한 신분은 아닐 터인데, 나를?
실수는 아니다.
하늘 산맥의 수호자, 와카디아 지방의 대영주의 호칭 따위는 미리 준비해 뒀다는 말이다.
여하간 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왜 이런 관심을 갖는 거지?’
임명식에 참여한 귀족들은 나뿐만 아닐 테고…… 또한 여기에는 고위 귀족들이 즐비하다.
크라운의 실세라 불리며, 제국의 재정담당관 루니 백작의 파티에서 말이다.
그 탓에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기까지 하다.
“저거 그냥 먹어도 되나?”
파티장 한쪽에 진열되어 있는 요리들을 보며, 군침을 흘리는 판드가 아니었다면 기분까지 나빠졌을지 모르겠다.
“먹으라고 갖다 두었을 텐데. 먹어. 아니, 먹자.”
내가 언제부터 사람들의 눈에 신경 썼다고. 예민해지니 별게 다 거슬리는 것 같다.
‘그나저나…… 참, 이것도 대단하다면 참 대단한 것 같군.’
사치는 음식에도 이어져 있었다.
“이런 건 뭘로 만드는 거냐?”
“글쎄.”
에렌에서 나름대로 미식이라면 미식을 한 사람인데, 여기에 차려진 음식은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맛이…… 참…… 그냥 녹는 맛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괜찮기는 하네.”
“비싸겠지?”
“아마?”
비싸서 맛있는 건지, 맛있어서 비싼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비쌀 것이라는 것이다.
‘뭔 말도 안 되는 표현이냐.’
그만큼 퀄리티가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먹어 보려고 할 때였다.
“제국 재정대신이시며, 황제 폐하의 길잡이이고, 팔랑카의 가문의 가주. 샤이닝 로드의 마법사…….”
나를 소개했던 시종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는 끝날 줄 몰랐다. 하지만 지루하다거나, 불만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파티의 주최자이자 제국의 실세인 루니 백작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였으니까.
그가 움직이는 곳 앞으로 길이 만들어졌고,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기 위해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드와 이 요리, 저 요리를 맛볼 때였다.
“공자.”
시종 차림을 한 사내가 하나가 와서 말을 걸었다.
“뭔가?”
“주인 나리께서 찾으십니다.”
“누구?”
시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의 끝에는 루니 백작이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봐야겠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시종의 안내를 받았다.
“로라스 진 베스타인.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시게. 락의 후계여.”
흔히 오가는 인사가 오갔다. 하지만 말이다.
“락의 발전은 놀랍더군. 어찌 계획을 세웠는지 말이야.”
“언제 한 번 방문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버님께서도 환영하실 겁니다.”
“자네의 계획 아니었던가?”
“…….”
“궁금한 게 많아. 미딩과의 관계도 좋다지?”
이자!
날 알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정확하고 명확하게 말이다.
“그냥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는 정도입니다.”
“좋아. 자네가 이리 신중한 사람일 줄 알았어.”
대체 뭐가 좋다는 건가?
그 전에 날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서로의 속내를 그렇게 탐색하고 있을 때였다.
“너 뭐야!”
파티장 한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 * *
“죄송합니다.”
“호위 용병이라고 했나? 기사도 아닌 병 따위가 파티장 안까지 들어와도 되는 건가?”
“그건 제 고용주가.”
“그러면 조용히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지. 그렇게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처먹어야겠어?”
욕을 하는 이는 취한 청년이었고, 그에 당하는 이는 판드였다.
“죄송합니다. 공자. 제가 실수를.”
“원 용병 따위가. 에이! 수준 떨어지게!”
얼굴이 붉어지는 판드.
“얼른 꺼지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계속된 모욕에 판드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고, 그렇게 몇 걸음 움직이다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
“로라스…… 아니 공자…… 그게…….”
“어디 보기 흉한 유령이라도 봤어? 왜 이리 떨어?”
“떨기는…….”
창피해하는. 그리고 당황스러워하는 판드를 보며 웃어 줬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보기 흉한 걸 봤으면 눈을 감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 더러운 건 피하는 게 상책이거든.”
“로라스!”
판드가 놀라 말했고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가자. 볼일 다 봤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데리고 나오려 할 때였다.
“지금 날 보고 하는 이야기인가?”
판드에게 시비를 걸었던 청년이 얼굴을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
술 냄새가 여기까지 확 풍겨왔고, 그의 곁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말리려는 제스쳐를 취했다.
“누굴 가리킨 적은 없지만, 뭔가 찔리는 게 있다면 평상시 자신의 언행을 돌보면 그뿐.”
말 못 할 것도 없었다.
천지 구분 못 하는 애송이 따위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다.
사정?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에렌에서도 테라를 데리고 다니던 시절에 흔하게 겪었던 일이기도 하니까. 그나마 테라는 아이언 센터의 후광이라도 있었지만, 판드는 그런 것도 없다.
그러니 이리 크게 모욕을 당했던 것일 터.
“뭐라!”
청년은 화가 난 듯 소리치자, 파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가끔 궁금하다.
이런 놈들은 대체 어떻게 자라 왔기에 이리 안하무인처럼 굴 수 있는 것인지가 말이다.
역겹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서는 귀족들이 없었다. 모두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거기나, 여기나.’
유역후 기억에도 눈앞의 청년처럼. 그리고 귀족 같은 놈들이 늘 존재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듯이, 아래에도 없는 법이란 사실을 말이다.
“지금 그 말의 뜻은 뭐지? 로라스라 했던가?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알고 이렇게 나서느냐! 뭐 이런 말을 하려고?”
“이…….”
정말 그런 말을 하려 했나 보다.
“어째, 하나 같이 그만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이놈!”
붉다 못해 터질 듯한 놈이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거 빼고 덤비려고? 하려면 제대로 해. 결투를 신청하던가. 그럼 기꺼이 상대해 주지.”
스르르릉.
놈이 검을 반쯤 뽑았을 때 시종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했다.
귓속말이지만 나는 들었다.
“공자, 주인 나리께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인 나리께서 직접 초대하신 손님이십니다.”
흠칫하는 놈. 그리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표정의 루니가 보였다.
‘루니의 아들인가?’
짜증이 솟구쳤다.
대개 이런 놈의 아비라면, 제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놈들이다.
앞으로 매우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