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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67화 (16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7)

“으음!”

소식도 참 빠르다.

마치 내가 도착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초대장이 책상 위에 수북했다.

고작 이틀 만에 말이다.

‘모두 무시하면 좋을 것도 없는데…….’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그런 건 없지만, 아버님의 대리로 왔다.

그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초대장을 보내온 가문들의 이름도.

‘가장 이름 있는 가문의 초대만 받아들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길 터.’

적절히 욕 안 먹을 정도로 초대에 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곳 분위기를 익힐 만한 곳이 좋을 텐데.’

실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페컴에게 도와줄 사람을 부탁했을 것이다. 미딩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가?

‘하다못해 그 떠버리라도 있으면 좀 편했을 텐데.’

포플러가 그리울 판이다.

“하아!”

한숨을 쉴 때 인기척이 들렸다.

“공자님…….”

“뭐야? 그 표정이랑 말투는?”

판드가 쭈뼛쭈뼛해 하는 느낌.

“그게…….”

“평상시처럼 해. 우리 친구 먹기로 하지 않았어?”

“그래도…… 제가 어떻게…….”

좀 익숙해졌다 싶을 때 정체를 밝혔었다. 베스타인의 성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그의 천성이 누구의 눈치를 보는 편은 아니라 생각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가 모호할 정도로 편하게 왔으니까. 하지만 후작가의 하인들이 날 대하는 걸 보며, 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네 신분이 노예도 아니고. 직업도 떳떳하고.”

“그건 그렇지만…….”

“내가 더 어색해지니까. 평상시처럼 해.”

“그럼…… 그럴……까?”

유독 끝 어음에 힘을 주는 판드를 보니 웃음부터 나왔다.

“그러지 말고 이거 나 좀 봐.”

“뭔데?”

판드가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예전처럼 돌아오는 걸 보며 웃음만 나왔다.

보면 볼수록 테라와 번천을 반씩 섞어 놓은 느낌이 있었다.

쾌활한 성격에, 보기와는 달리 세심한 면도 있었고, 적당한 승부욕까지.

곁에 두며 말동무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왜 있지 않은가? 이유 없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뭔 초대장이…… 이리 많아?”

“아는 이름 좀 있어?”

“용병 나부랭이가 귀족들을 어찌 알아? 하지만 이 이름은 알겠네.”

판드가 초대장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루니 팔랑카.”

“팔랑카 가문이라면.”

“현재 크라운의 실세 중 한 가문. 나 같은 용병에게도 들리는 이름이니까.”

판드는 루니란 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할 정도의 최측근이면서, 최근 황도 수비대의 대장이라 했다. 그리고…….

“약?”

“응. 각성의 물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먹으면 막 용기가 생기고, 힘이 증강돼.”

“말하는 걸 보니 먹어 본 것 같네?”

판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주 위급할 때만. 상시 복용하면 더 좋다던데, 값이 너무 비싸서.”

“그러니까 먹으면 힘은 물론이고 마인드까지 좋아진다는 거지? 상시 복용하면 더더욱 좋고?”

“응. 그 약을 벨론시 상단이 독점하고 있는데, 벨론시 상단의 최대 지분을 가진 곳이 팔랑카 가문이거든.”

“하!”

기가 막혀 소리가 나왔다.

약?

물론 영물이니, 영초니 하는 귀한 재료, 또는 마나석으로 만든 약이 있긴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용병들은 구매는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런 건 할아버지 같은 권력가의 식탁에 오르거든. 그런 걸 상시 판매? 그런 효능을 가지고 있는 약이?’

치료 물약조차 그 가격이 은화가 아닌 금화 단위인데, 용병들이 그런 걸 산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부작용 같은 건 없어?”

짐작되는 게 있어 묻는 말에 판드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각성 시간이 끝나면 약간 허탈해진다는 것 정도? 그래서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아무리 봐도 이건 마약이다.

‘상상 이상으로 부패했으니 오래 가지 못하겠군.’

흑사회가 아닌 고위 귀족들이 그걸 관리하는데, 다른 것들은 또 어떻겠는가?

‘일단은…….’

초대장 더미를 쳐다봤다.

‘꼭 가 봐야 할 이유는 생겼군.’

* * *

‘헛소문이었어.’

제국의 수도 크라운은 수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언제나 따뜻한 크라운. 풍요한 크라운 등등.

크라운에서는 거지들도 하도 먹어서 배가 나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본 크라운은…….

‘하긴 어디는 이렇지 않을까?’

배가 터지도록 먹고, 속을 게워 내고 또 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루 한 끼 먹는 게 소원인 자들이 있다.

그렇게 빈익빈 부익부는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이곳은 그 정도가 심했다.

“뭐 하러 이곳을 와? 여기는 용병들도 안 와. 일단 악취에 코가 마비되거든.”

판드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옷에 냄새가 배면 빨면 그만이지만, 몸에 밴 냄새를 빼려면 며칠로도 안 돼. 내일 파티에 간다고 했잖아.”

“너무 안 좋군. 이런 지역이 많은가?”

“다 똑같지. 이들 소원이 뭔지 알아?”

“…….”

“귀족가의 노예가 되는 거야. 노예가 되면 그래도 그래도 굶주리지는 않거든.”

“굶지 않기 위해 노예가 된다라…… 그 말은 노예가 되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건가?”

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라운은 노예가 넘쳐나는 곳이거든. 근래 시세가 똥값이야. 전쟁이 없었잖아.”

순간 의아했다.

노예 제도, 그리고 시장도 활성화되었음을 안다. 그런데 전쟁이 없으면 노예도 줄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전쟁하고 무슨 관계인데?”

“아! 넌 북부 출신이라 잘 몰랐구나. 하긴 북부에서는 노예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으니까. 전쟁에 끌려다니는 노예도 없을 것이고.”

“자세히 이야기해 봐. 북부와 남부가 뭔가 다른가?”

“전쟁에 포로들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 하지만 그만큼 전쟁에 동원되는 노예들도 많아.”

“화살 받이?”

“대부분 그렇지. 무기를 쓸 줄 아는 노예는 나름 비싸니 병력으로 이용하고.”

“그래서 전쟁이 없으니 노예를 쓸 곳이 없다?”

“나이 먹은 노예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도 많아. 그런 이들이 바로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는 거고.”

머릿속이 난잡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완전히 물건인 세상.

“한마디로 저들은 제국의 시민이 아니야. 그러니 나라에서 어떠한 지원도 없는 거고.”

계속 이어지는 판드의 말에 속에서 치미는 게 있었다.

내가 무슨 박애주의자 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제국의 수도란 곳은…….

“여기 노예제도 제대로 알고 싶은데.”

판드에게 노예제도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노예의 유효기간은 스스로의 몸값을 갚기 전까지라고 했다. 한마디로 제 능력에 값을 받는다고 한다.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 깊이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마음씨가 좋아서 값을 치러 주는 게 아니다.

그리 노예가 많다는데 24시간 그를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걸 안겨 주고 충실한 노예 역할을 바라는 것이다.

몸값의 이자가 막대하니 거의 공짜로 쓰는 수준.

하지만 희망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 차이.

도망치다가 잡혀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 것보다 몸값을 치르는 게 낫게 여기는 것이다.

몸값을 갚기 전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면 이런 곳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이고.

“검투사라던가 뭔가 재능이 있는 자들은 그래도 꽤 벌어. 특출난 자들은 제국 시민보다 돈은 더 많이 있을 정도로.”

판드는 계속 말했다.

“전쟁에 화살 받이를 쓰이는 걸 알면서도 목숨 걸고 싸우는 노예들도 많아. 왜냐하면, 그 대가가 막대하거든. 살아만 있으면 상당한 빚을 갚고, 오히려 돈을 받을 때도 있으니까.”

“살아나면 약속한 돈은 다 지불하나? 약속을 어기는 놈들도 있지 않아?”

“당연히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 약속은 지켜. 평판도 있을뿐더러, 그게 알려지면 원래 노예들이 믿고 따르겠어?”

이 정도면 돌아가는 구조가 완성되었다고 봐야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사회구조로 말이다.

전쟁이 없는데도 왜 제국이 대륙의 공적 취급받는지 알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조 속에서 희생이 되었을까?

타국 입장에서 제국은 세계에서 사라질 악의 존재 같을 것이다.

―제국은 최강이다. 하지만 전쟁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이런 현실을 알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 터.

‘왜 바꾸지 않으셨을까?’

귀족들에게는 권력을 탐하는 늙은이. 철혈의 피를 가지고 있는 귀족 등 안 좋은 소문이 있으나, 에렌에서, 아니 북부에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이 할아버지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아는 분이다.

할아버지의 모든 언행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나쁘게 말하면 본능적으로 권력을 어찌 취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찌 유지하는지 알고 있는 것.

좋게 말하면 강력한 권력에는 그만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크라운의 사정을 나보다 훨씬 잘 아실 텐데, 아무런 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말이다.

“이크! 가자.”

그때 판드가 급히 말했고, 시선을 돌리니 아이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 특유의 활기 발랄한 모습 따위는 없었다.

마치 시체 같은 형태로, 유령처럼 다가와, 앙상한 팔과 손을 뻗으며 다가올 뿐이었다.

“손대기에는 찝찝하잖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지.”

뭔 소리인가 싶었을 때 손들이 뻗쳐왔다.

먹이를 잡아먹는 연체동물처럼, 절벽에 떨어질 때 우연히 손에 잡힌 잡초처럼.

그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소매를 잡는 그 작은 손들이 그리 강렬하게 느껴졌다.

무슨 소리인지 깨달았다.

누군가에는 이 손이 위협감을 느낄만하다는 것을. 상대가 비록 아이들일지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집단은 사람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다.

게다가 공허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까지.

“저리 안 가!”

판드가 소리치며 아이들을 밀쳐내려 했다.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리둥절한 그 눈빛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 내 눈앞까지 보이는 곳까지의 쓰레기들을 모두 치워라. 그걸 해 내면 누구든 동전 두 개씩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본다. 처음 받는 제안일 것이고, 그게 뭔 소린가 싶을 것이다.

“빨리.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니. 벌려면 움직여야지!”

눈치 빠른 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몰려왔던 애들 이외의 다른 아이들이 다가오며 물었다.

“저희도 동전을 주시나요?”

“준다. 참여한 사람은.”

동냥은 안 된다. 거지는 평생을 가도 거지다. 아이였을 때부터 그 생활이 몸에 배면, 바꿀 수조차 없게 된다.

옆에서 판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려고?”

“일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는데.”

“뭘?”

“연락 하나 해 줘야 할 것 같아.”

크라운이니 규모 있는 길드는 거점 하나는 가지고 있을 터. 당연히 렌의 상단도 거점이 있을 것이다.

상인길드 연합도 있을 테니 연락을 전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그렇게 판드를 보내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 그리고 판단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몰랐다면 몰랐을까. 알았다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사람이니 고민하고 판단했을 뿐.

‘쓸모가 있을 거야. 없으면 있게 만들면 그뿐.’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난 박애주의자는 아니고, 또 동정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노동력이 부족한 락에, 버림받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뿐인 거야!’

그렇게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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