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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66화 (16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6)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마란체 후작님.”

“어서 오게.”

아마렌체 후작의 첫인상은 문무를 겸비한 듯한 신사였다.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오른쪽으로 넘긴 머리. 좌우 균형이 완벽히 관리된 콧수염까지.

아마란체 후작은 할아버지가 소개해 준 귀족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황성으로 가는 것도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이 말은 페컴이 해 준 말이고.

황제의 초대를 받아 크라운에 왔다지만, 따로 알현을 청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유력 귀족들이 크라운에 살지 않으면서도 저택을 마련하여 관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당연히 할아버지도 여기에 저택을 보유 중이다.

하지만 거기가 아닌 아마란체 후작에게 보낸 이유가 있을 터.

“공작님께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네. 그분 입에서 귀애한다는 단어를 듣기 쉽지가 않은데, 자네를 향해서는 그 말씀을 하시더군.”

“저도 할아버님께 들었습니다. 크라운에서 가장 의지하고 믿을 만한 분이니, 언행에 늘 예를 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셨군. 이곳이 내 집이라 생각하고, 며칠 동안은 황도의 분위기를 익히게. 요청한 사람들의 방도 준비됐을 걸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좀 쉬고 저녁에 다시 만나지.”

“네. 후작님.”

그렇게 인사를 하고 집사에게 침실을 안내받았다.

“이걸 전부 우리가 쓰는 건가?”

눈앞의 삼 층짜리 작은 건물을 보며 물었고, 집사는 대답했다.

“네. 주인님께서 별관 하나를 전부 내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일행분이 오갈 때 부담 없을 거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세심하시군.”

“일하는 사람은 손님분마다 한 분씩 배정해 뒀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걸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돈 주머니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배려에 감사하네. 이건 혹시 따로 들어갈 일이 쓰면 되고.”

“감사합니다. 공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꽤 많은 양을 담았지만, 후작가의 집사답게 공손히 받고, 품에 넣을 뿐 시시콜콜한 말을 붙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은 주교님을 뵙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공자의 도움에 감사드리고 다시 찾아 뵈어도 괜찮을까요?”

“언제든지요. 아니 꼭 한번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요.”

아델리나의 물음에 그리 답했다.

“그런데 공자.”

“네.”

“괜찮으시면 쥬니스 님을 제가 고용해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물음에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오면서 친해지기도 했고, 이곳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쥬니스 님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쥬니스를 그녀에게 붙이면 도망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델리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오면서 둘이 꽤나 붙어 있는 걸 봤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 문제다. 뭣보다 여기서 도망치면 잡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델리나 님. 보통 관례상 특별한 이유 없이는 기존의 의뢰인과의 계약이 먼저입니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로라스 공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은 제 의사인데 저는 이번 일을 끝나면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갈 계획이기 때문에…….”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내게 벗어나고 싶어 할 쥬니스가 아델리나의 의뢰를 거절하는 진귀한 광경을 볼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다.

‘그녀에게 아델리나를 호위하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찌 말을 돌려서 아델리나를 포기하게 만들까 고민할 때.

“꼭 쥬니스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로라스 공자, 부탁드리겠습니다.”

날 직시하는 아델리나의 눈빛을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깜빡했군.’

워낙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아델리나가 어떤 사람이었던지 말이다.

프라일의 신수를 탐냈었던 그때. 자신에게 깜찍하게도 사술까지 부리지 않았던가?

‘쫓기는 상황이라고 그 깜찍함이 사라졌을 리 없을 테고.’

어쩌면 쥬니스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녀 역시 성녀인 만큼 신성 마법을 잘 다룰 터.

‘이리 생각하면 여태 친해서 서로 붙어 있던 게 아니라, 염려하고 감시했었던 건가?’

왜 그녀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대신 맡아 주겠다면 말이다.

“쥬니스가 바쁜 사람이라. 다른 사람과 계약하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쥬니스 님을 좋아하니 꽉 잡고 있을 거니까요.”

혹시나 해서 한 말에, 돌아온 대답은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과 같았다.

“그럼 아쉽지만 그렇게 해야겠군요.”

“공자, 저는!”

쥬니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잘 도와주고 다시 돌아오세요. 제가 다시 고용할 때는 많은 돈을 주고 재고용할 테니 말입니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고, 사정을 모르는 판드는 멋모르고 좋아했다.

“좋지, 좋아. 아쉽네. 나도 아델리나 님 호위를 맡는 게 좋지만. 우리 공자님이 워낙 날 놓아주려 하시지 않으니.”

그리고 그런 판드의 뒷통수를 한 대 후려갈겨야 할지 잠시 고민이 들었다.

* * *

아마렌체 후작과의 저녁 식사.

커다란 식탁에 시중드는 이 없이 그와 나, 둘만 앉아 있으니 황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식사는 훌륭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을 거라 생각하네만, 여기 중앙 귀족들은 에렌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들의 권력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짐작이 갑니다.”

”북부와 남부 귀족들의 반목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네만. 문제는 우리 제국의 영향력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어.“에렌에서는 듣기 힘든 이야기가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전대 황제 메사체의 사망 이후부터였다.

오랜 세월 태자로 있었던 황제는 의욕적으로 많은 사업을 벌여 나갔다. 문제는 그 사업들 중 이렇다 할 성과가 있었던 게 없었다.

의욕이 있던 만큼 망했을 때의 대미지도 컸다.

스케일은 또 왜 이리 컸던지, 작은 사업이라고 해도 한 지방의 일 년 예산을 썼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외교에서도 문제였다.

자신의 제국을 믿었던 것일까?

기존 동맹을 너무 무시했고, 말도 안 되는 조공을 요구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좋지 않던 관계의 나라는 품겠다고, 막대한 예산을 지출했다.

한마디로 관계 좋았던 국가들을 쥐어짜고, 좋지 않았던 국가에게 퍼 주는 병신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평범하다고 했지만…… 그냥 모자른 게다. 전대 황제가 권력을 이양하지 못하고, 죽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켰던 이유이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냉정한 평가가 떠올랐다.

“제일 큰 문제는 황제가 공작님에게 경쟁심을 가졌다는 거지.”

“그게…… 말이 됩니까? 그는 황제입니다.”

아무리 승부욕이 동하더라도 황제는 그 누구와도 경쟁해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가 지금보다 수 배의 세력을 지녀도. ‘제국의 일인자’라는 뜻이다.

왕이 신하와 권력을 다툰다는 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군.’

할아버지가 어떠한 욕심도 없다는 게 확실해도 황제는 결국 반목하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한 이유를 짐작하겠다.’

그리고 왜 후작에게 먼저 보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말 한마디에 북부와 남부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근래 타국의 도발이 심해지니 황제의 참을성도 사라지고 있지.”

후작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자네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전해졌으니, 수여식 이전에 자네를 따로 부를 수도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몇 명이나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습니까?”

“스물 정도일 거야. 크게 신경 쓸 사람은 없네. 그저 황제 앞에서만 조심하면 돼.”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다음부터 이러면 제가 쥬니스 님을 보기가 참 불편해질 것 같습니다.”

아델리나의 말에 쥬니스는 흠칫했다.

“알 만한 분이 상황을 잘 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그녀의 시선이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큰 걱정은 마세요. 쥬니스 님이 몰라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전 상벌이 분명한 사람이에요. 공을 세우세요. 안전은 물론 암살자 따위가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테니.”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쥬니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이 위화감은?’

아델리나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진즉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제가 무슨 공을…….”

쥬니스가 용기 내어 물었을 때 아델리나는 말했다.

“그건 알아서 해야겠지요. 하지만 제 옆에 있으면 그럴 기회가 생길 거예요. 공자님을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세요.”

‘아!’

순간 쥬니스는 깨달았다.

기질.

사람이 자연스레 흘리는 그 기운은 그 사람 그 자체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순식간에 그 기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기질이 달라진 순간은 바로 로라스로부터 떨어진 그 순간 이후부터라는 것이다.

‘왜?’

쥬니스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한눈에 반하는 뭐…… 그런 것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아델리나가 로라스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의 기질과 없을 때의 기질이 달라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계속 걸어 도착한 곳은 예상대로 에펠리온 신전이었다.

‘여기가 지지하는 곳이라고 했지?’

수많은 교구들. 그리고 몇 명의 후계자들 중 유일하게 아델리나를 지지한다는 교구. 그런데 말이다.

“성녀님을 뵈옵니다.”

마치 원래 자신의 집이었던 것처럼 신전 최상석에 앉는 아델리나. 그리고 마치 도착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두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대며 맞이하는 사람들.

문제는 그중에 주교의 옷을 입은 노인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교단의 후계자. 성녀라 하지만 교단에서 주교의 힘은 막강한 편이다.

마치 교황을 상대로 하는 것 같은 예는 갖추지 않는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크라운이다. 세계의 모든 주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 어쩌면 교단 서열 이인자라 해도 무방할 자리가 크라운 교구의 주교가 아델리나 앞에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예상보다 조금 늦었다.”

음정의 고저가 없는 아델리나의 목소리.

“주교만 남고 모두 나가라.”

그리고 단 한마디에 그 수 많은 사람이 시선을 바닥에 깔고 뒷걸음질 쳤다.

“일은?”

아델리나의 질문에 주교가 대답했다.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슬쩍 쥬니스를 쳐다봤다. 저건 누군데 아직도 버티고 있냐는 눈빛으로.

“내 몸종이 될 아이다.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하도록.”

쥬니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리고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지금…… 내가 잘못 듣고 있는 건 아니지?’

그리고 쥬니스는 자신이. 그리고 로라스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계자 다툼에서 최약세.

다른 후계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위태로운 성녀.

이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아델리나였다. 하지만…….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까운 인재들 아닙니까?”

“그래서 줬잖아.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네 번의 암살 시도를 받았지. 그 탓에 소중한 분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도 있었고. 더 이상은 없어.”

주교의 물음에 싸늘하게 대답하는 아델리나.

쫓기고 있어?

누가?

누구에게?

자신들은 정말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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