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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65화 (16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5)

“왜 소식이 없어? 지금쯤이면 두 번은 잡고도 남을 시간 아닌가?”

제국 중부지역. 베나 지방에서는 나름대로 강력한 세를 지니고 있는 하이바르 남작은 자신의 기병들에게 연락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추격이 길어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심복의 말에 하이바르 남작은 그게 가당키나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사 열에 기병이 스물이야. 성녀에게는 호위도 변변찮을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도망칠 여력도 없어!”

“그럼…… 혹시 성녀가…… 주교에 비할 만한 성력을 지녔다 들었습니다.”

“분명 그렇지만…… 성력이라면…… 대부분 치유나 남을 보조하는 데 특화되어 있지 않은가.”

하이바르 남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의 말을 의심하며 명령했다.

“추가 병력을 보내. 잡아야 해! 우리 영지가 대영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야! 성녀를 잡기만 한다면!”

“네.”

심복이 급히 나갔고, 그 모습을 보며 하이바르는 초조함에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기사들과 기병 병력을 잃는 경우가 생기면, 베나 지방에서는 최약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옆 영지와의 알력에서 계속 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잡아야 해! 반드시!’

하이바르 남작은 자신의 운명을 몰랐다.

* * *

“그리 떨 필요는 없다.”

그리 말했음에도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을 테지만, 난 정말 그녀를 어찌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여태 분명 도움되는 존재였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굳이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두려움을 가져야 내가 원하는 바를 취할 수 있으니까.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이것 봐라?’

알까?

스스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좌로 굴렀다가 돌아온걸?

‘대담한 건지! 본능적인 건지!’

공포가 아예 없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반은 가식이었다. 무서워하는 연기.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밤 시중도 들 수 있습니다.”

“연기는 잘한다만. 더 깊이 생각해야지. 네 몸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살려만 주시면…….”

“그 연기는 계속 유지하고. 마음에 드네. 아무도 눈치 못 챌 거야.”

“저는 진심으로 충성을.”

터억!

쥬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그시 잡았다.

그녀는 뭔가 각오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잘못 짚었다니까!’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

그녀가 그대로 몸을 튕기며 이를 악물었다.

분근(分筋)과 착골(錯骨)의 수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체내 곳곳에 기운만 심으면 된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옥이겠지.’

사실 독수까지 쓸 생각은 없었다.

긴장감과 함께 그녀를 달고 다닐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적이 늘었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정말 적이 되어 버렸다.

“연기를 끝까지 했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

…….

“네가 기회를 잡지 못하고 포기했으면, 그대로 돌려보냈을 거야.”

몸만 떨 뿐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실오라기 같은 기운이라도 있으면 고통을 버티는 데 써야 했을 테니 말이다.

분근착골(分筋錯骨)에 당하면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정체를 드러냈고, 그런 이상 예전처럼은 대할 수 없어.”

…….

“날 죽이려 온 건 사실이니 이리 고통스럽게 한다고 욕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두 번 풀어 주지는 않을 거야. 이해했지?”

대답하지 못하니 그대로 마혈을 짚었고, 쥬니스는 바닥에 그대로 축 늘어졌다. 폭우라도 맞은 듯 흠뻑 젖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허허, 웃어 주면서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럴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사람이 인과응보. 거래, 상벌 등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건 극소수이고, 그녀는 그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살려 주십시오.”

무공의 수준은 낮으나 정신력은 상당하다.

전신에 힘이 빠졌음에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대로 엎드렸다.

“기억하지? 네 가치를 증명해야 할 거라고.”

“네. 기억합니다.”

“증명해 봐. 두 번 듣지 않을 거라 이야기했다는 거 잊지 말고.”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다만 디존슨이 아닌 그의 부인이 의뢰한 건 의외지만.

“그건 뻔히 짐작되는 이야기였고. 그건 네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제가 소속된 길드가 있습니다.”

“난 암살자 따위는 키우지 않아. 내가 그럴 필요가 있을 거라 보나?”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귀찮은 일을 맡겨 주시면 조금 더 편하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아는 게 많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하신 정보라도 있으면 제가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알아봐 줄 수 있다……는 건.”

“괜찮은 길드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주로 개개인의 뒤를 알아보는 데 특화되어 있지만, 사람을 알면 상황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기에 말했다.

“됐네.”

“네? 무슨…….”

“네 가치. 그걸로 하자.”

“…….”

“그 길드 먹으려면 어찌해야 하지? 돌아가는 길까지 잘 생각해 놔. 그게 네 가치가 될 것이고, 네 가치 이상으로 성과가 있다면 대가도 치를 것이다. 난 상벌이 확실한 사람이니까.”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 이유야 뻔하니 한마디 덧붙였다.

“그때까지 내 옆에 있어야겠지만, 확실하게 목숨을 보장받는 것에 집중해야지.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내 목을 노린 자에게까지 억지로 될 생각은 없는 사람이니까.”

“공자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날 위해 하지 말고, 너 스스로를 위해 해야 하는 게 좋아. 넌 포로와 같은 존재. 몸값을 제대로 지불하기 전까지는 자유는 없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바칠 듯한 비장한 그녀를 100퍼센트 믿지는 않았다.

쥬니스 같은 부류는 딱 믿을 만큼 믿어야 하는 부류다.

‘파락호나 암살자나.’

내게 그 선입견은 크고, 그것을 벗어나려면 뭔가 보여 주거나 장시간 신뢰를 쌓아야 할 터.

‘너무 똑똑해도 곤란한데. 똑똑하면 딴생각을 할 테니.’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크라운으로 향한 지도 석 달이 넘었다.

귀찮은 하루살이들이 몇 번 달라붙은 거 빼고는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그 하루살이들이라도 재미있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함정을 파고 기다렸으면, 제법 스릴도 있었겠지만.

‘독창성이 없어. 독창성이.’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역후는 조금 더 다이내믹한 일을 겪었는데, 여기는 그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니.’

하긴 쥬니스가 특급 암살자인 세상이다.

그녀의 살기를 죽이는 능력은 분명 특출나지만, 그걸로 특급이 되었다는 이해할 수 없다.

‘중원에서는 화장실에서도 며칠을 버티면서 암살하는데.’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유역후도 겪었던 일이다.

자객이 하나 잠입했는데, 무려 이레 동안 버틴 독한 놈이었다.

물론 유역후 엉덩이를 보기도 전에 똥통에 빠져 죽었다. 버틴 독기는 좋았는데 그 독기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죄로 그리 죽었다.

쥬니스가 몰래 물은 적이 있었다. 어찌 자신을 눈치챘냐고.

특별한 비밀도 아니라서 알려 줬다.

다음에는 집적거리던 그놈의 손목 하나 정도는 날리라고. 그 정도는 돼야 믿어 준다고.

여하간 음모술수는 그 세계에 비하면 허술한 세상이었다.

‘이제 슬슬 머리 굴릴 때가 되었을 텐데.’

쥬니스를 보니 평상시와 다름없이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정말 겁먹었나?’

당시에는 겁먹었으나, 시간이 이 정도 흘렀으면 딴짓할 때가 되었는데 조용하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데 말이다.

* * *

“꿀꺽!”

나도 모르게 순간 침이 넘어갔다.

“쥬니스 님의 요리는 늘 훌륭하네요.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같은 여자가 봐도 흠잡을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리고 절로 시선이 가는 외모를 가진 여인.

신분은 어떤가?

그 에펠리온 교단에서도 성녀라 추앙받는 여인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상황이 좋지 않음을 감안해도 원래라면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 사람.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앉아 쉬세요.”

“같은 길을 움직였는데 저만 힘들까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약간의 숨이 섞인 목소리마저도 아름답다.

“정말 괜찮습니다.”

“왜? 성녀님께서 도와주신다는데.”

눈치 없는 새끼!

참지 못하고 그대로 판드에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그러는 네가 도와주던가?”

“말만 해. 뭐 도와줄까?”

무식한 곰. 이런 놈이 어떻게 여태 살아남았는지!

그래도 다행이다.

판드가 오면서 아델리나는 밀려났고, 덕분에 그녀의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뭐 나를 거라도 있어? 물 모자라? 더 길러 올까?”

곰 같은데 쉴 새 없이 떠드는 녀석.

“너도 부담스럽지? 하긴 나도 성녀님이 동행이 되니, 눈치 볼 게 한둘이 아니더라고.”

판드는 용병 주제에 에펠리온의 독실한 신도라 했다. 그리고 여행 내내 정말 성녀(聖女) 대하듯 아델리나를 대했다.

“닥치고, 도와줄 거면 감자 껍질이나 벗기던가.”

정말 입 다물고 옆에 주저앉아 감자를 까는 놈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이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리고 여러모로 날 도와주는 존재인데.

‘멍청한 놈! 성녀? 두 번만 성녀였다가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헙!”

손에 칼을 든 것도 깜빡한 채로 입을 막을 뻔했다. 그 탓에 스스로 입을 찢을 뻔했다.

그럼에도 호들갑 떨 수 없었던 건 아델리나의 시선이 여전히 날 향해 있어서다.

로라스가 그녀를 중요시했었다. 그래서였다.

그녀를 이용하여, 최악의 경우 그녀를 납치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일단 그녀와의 신뢰를 쌓고자 살갑게 굴었었다.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그 힘에 대해 물었던 순간…….

―교화 대상이시군요.

잊을 수가 없다.

그 싸늘한……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었던 그 눈빛을.

―그런데 어떻게 공자의 일행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가슴이 서늘하여 심장을 옥죄는 기운은 분명 냉한 기운이었다.

―나는 용납할 수 없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기분이 동시에 느껴졌다.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제가 지켜보기로 결정했으니.

그때 알았다.

성녀?

이게 정말 성녀라 불리는 여자의 힘인가?

악녀? 아니면 마녀라 불러야 할 힘이 아니고?

그리고 또 깨달았다.

자신이 눈치를 봐야 할 대상은 로라스보다 아델리나라는 것을 말이다.

당연히 그녀를 어찌할 생각 따위는 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판드가 없었다면, 로라스가 죽이기 전에 스스로 말라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탱이…….’

그렇게 쥬니스는 옆에서 우직하게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판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 *

크라운에 도착했다.

“어때? 에렌만큼이나 크지?”

판드가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촌뜨기 수도 구경하는 표정을 바라는 건가?’

확실히 크긴 하다.

에렌에서도 보기 힘든 웅장함이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보다 발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뜻해서 좋군.”

사실은 덥다.

남쪽 지방. 그리고 지금은 여름.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오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이 후덥지근함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

‘천왕성도 남쪽에 있었지?’

그래서일 거다. 의외로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번화가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시야까지 더워졌지만 역시 문제 될 건 없었다.

“이제 내 임무는 끝이 났는데. 어떻게 할까? 크라운이 초행이니 내가 가이드라도 해줄까? 반값에 해 줄게.”

판드가 그리 제안해 왔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두 여자가 있었다.

어떡할까?

잠시 고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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