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4)
“그냥 지나가는…….”
“그냥 지나가는 무리가 손에 무기를 들고 달릴까?”
“아…….”
눈앞의 인마는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적?’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적은 아니다. 복장은 분명 그러했지만, 아니다. 그러기에 각자의 간격이 너무나도 일정했다.
훈련받은 군이다.
‘주의를 끌고 어찌해 보겠다는 건가? 아니면 방수를 끌어들인 건가?’
아니면 쥬시스와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무리인가?
또 아니면?
굳어 있는 표정의 아델리나를 쳐다봤다. 어쩌면 그녀를 노리는 놈들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신분은 교단의 후계자. 충분히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호위 하나 없이 움직이고 있지 않던가?
아니 고민은 나중이고 일단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기다릴 이유가 없다. 기다리면 말이 가진 힘을 십분 활용할 수 없다. 혼자라면 뭔 짓을 하는지 두고 봐도 되겠지만, 혹 덩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상태.
이점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뒤로 달려!”
판드나 쥬시스는, 달려오는 놈들의 한 번 몰려들면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숨어. 정리하고 돌아갈 때까지!”
“혼자 어쩌려고!”
“걱정하지 말고. 이럇!”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달렸다. 말이 없다면 모를까? 전원이 기마인데 빠져나가는 놈이 생기면, 일행의 안전에 위험이 될지도 모른다.
‘누구냐? 너희들은?’
커터를 들었다.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공간을 터져 나가는 가운데 또렷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달려나가는데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아델리나가 맞겠군!’
무슨 일에 휩쓸린 걸까?
의문이 가득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하아앗!”
집단전. 특히 기마전은 미딩 이후로 처음.
‘연습 상대로 이만한 이들을 구하는 것도 없지 않은가?’
경지가 깊어질수록, 그리고 위치가 높아질수록, 직접적으로 몸을 쓰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몸 쓰는 일은 테라나 번천 등이 다 처리했고, 외부 일은 오리시암이 전부 가져가 버렸다.
‘할아버지와의 대련도 그래서 기뻤지.’
배운 무공을 써먹고 싶은 치기를 가질 나이는 아니나, 나의 본질은 무인.
몸을 쓰고 싶은 욕구는 식욕에 준한다.
그런데 이런 부담 없는 실전은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이놈!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뭐야!”
카아아앙!
참으로 멍청한 놈이 아닌가!
대화를 하려면 그 명백한 적의를 지우고 덤벼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왜 우리에게 검을 겨눴는지는 궁금하지조차 않다. 그런 거야 일단 싸우고 난 후에!
이유를 아는 건 입 한두 개면 충분하다.
그런 흥분감으로 인해 커터에 힘이 너무 들어간 듯하다.
찢어지는 철음과 함께 선두에 선 놈의 검을 박살 냄과 동시에 갈랐다.
“이놈!”
기세 좋게 달려오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지 놈들의 기색에서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이놈, 저놈 하기 전에 제 목숨은 잘 간직해야 할 텐데 말이다.
“으악!”
또 한 놈을 말에서 떨어트리니 놈들은 그제야 제대로 덤비기 시작했다.
“일단 떨어트려!”
누군가의 고함.
“팔 하나 자르고 봐! 그러면 편하잖아!”
원래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져야 하는 법.
떨어트리란 놈을 떨어트렸고, 자르란 놈의 팔을 떨어트렸다.
땀 냄새와 혈향이 섞여 콧속을 찌르기 시작했고, 기합과 비명이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실전인 건 둘째치고, 상대하는 데 부담이 없어서였을까?
손속이 생각 이상으로 무정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멈출 생각이 없다.
경지는 점점 올라가는데 그간 너무 기운을 억눌렀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 중 내 뒤로 빠져나갈 것을 걱정했는데, 이제 놈들은 왔던 길로 도망치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숫자라도 많으면 모를까!’
적의 숫자는 삼십여 명.
내게 집단으로 인식되기에는 부족한 숫자. 놈들의 숫자가 최소 백이 넘었다면 무심함은 없었을 테지만.
개천지보 팔보 지세계(地世界).
아는 것은 익숙함이다.
쉬이이익!
내 어깨 위를 스쳐 지나가는 창도.
쌔애애애앵!
머리 위로 떨어지는 철퇴도.
히이이이잉!
격렬하게 몸을 부딪쳐 오는 훈련 잘된 전마의 움직임도.
‘모든 것이 보이니!’
알아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서 지루해진다.
순간 모든 흥이 가셔 버렸다.
그저 기계적으로 적의 창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려 철퇴를 막고, 그 상태로 끌어 내려 고약한 말 머리로 향하게 했을 뿐.
“아앗!”
서로의 무기가 꼬여 크게 흔들리는 두 놈을 죽이지 않았다.
아니까! 그리고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아는 건 이들이 내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못함을 알았다는 것이고. 의미가 없어졌다는 건 이들을 죽이던, 살리던 내 일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원을 낙마시켰고. 그중 끝까지 달려드는 놈들을 베었다.
현재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생긴.
이놈들이 왜 우리를 노렸는지에 대해 알아볼 때였다.
* * *
‘미친…….’
아멜리에는 눈앞의 펼쳐진 광경에 절로 욕이 나왔다.
자신들 보고 도망치라고 했을 때 뭔가 위기가 있을 줄 알았다.
‘군이었지?’
아멜리에도 나타난 기마들이 마적 따위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 했다.
만에 하나 로라스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차피 누가 죽이든 그만 죽으면 자신의 의뢰는 끝이 났으니까.
그런데 보라.
‘대체 왜 뒤로 도망치라고 한 거지?’
조금의 인정도 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누구에게? 자신들에게? 왜?
아멜리에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을까?’ 하는 걱정.
‘아니야. 그럴 리가! 어떠한 시도조차 한 것도 없다! 그건 지나친 우려야!’
아멜리에는 눈앞의 이 광경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삼십 명? 그것도 기병들을 홀로?’
그녀의 상식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베테랑 기사라 하더라도, 홀로 기병 서른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다. 게다가 원거리 공격도 아닌 근거리 직접 격돌로 전멸시켰다는 건.
‘마스터?’
아멜리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것들이 정말!’
누굴 죽이려고 이런 의뢰를 줬단 말인가?
그녀는 오히려 이게 자신을 죽이려는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빠져야 해!’
아멜리에는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뒤도 보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고 말에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마치 얼음 칼이 등을 훑는 것 같은 서늘함인데, 전신에 순식간에 땀이 쏟아졌다.
“연기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도중에 포기하면 내가 널 살려 둘 이유가 없잖아.”
‘대체 어떻게?’
분명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그가 있던 자리에서, 자신이 있던 거리까지는 말로 달려와도 최소 서른 호흡은 지나야 할 터였다.
그런데…….
“쓸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도망치면 그 가치를 포기하는 거야.”
“…….”
“잘 생각해야지. 네 가치를 증명해. 그래서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목숨을 보전해.”
쥬시스, 아멜리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선택지는 존재치 않았다.
* * *
“그래서 쫓기고 있는 것입니까?”
예상이 맞았다.
그들은 아델리나를 노리고 있었다.
아델리나는 그들의 입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고 실토했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은 걸 보니 예상은 하고 있었던 듯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로라스 공자도 이 일에 휘말리게 했으면 안 됐는데. 죄송합니다. 공자.”
그녀는 대답 대신 먼저 사과를 해 왔다.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헤어져야 공자께서 안전하실 겁니다.”
아델리나는 예의가 있고, 도리를 아는 아이다. 상황이 굉장히 위급해 보임에도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나를 우려해 헤어지고자 한다.
‘저 기품은 성녀로 키워지면서 배운 것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타고난 거지.’
여하간 이제 와서 그녀와 동행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켜 줄 힘이 없으면 몰라도, 아니 알았어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격이란 게 있다. 무엇보다 가슴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기억이며, 또 다른 인격인 유역후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곽아를 닮은 아이 아니던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사정을 이야기하면 좀 더 수월할 텐데 말입니다.”
다만 알고 싶을 뿐이다. 어찌 된 사정인지 말이다.
“하아…….”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고백하듯이 말했다.
사정은 간단했다.
에펠리온 교단 후계자인 성녀 아델리나.
그녀는 분명 신탁으로 위치가 정해졌지만, 십수 대에 걸쳐 에펠리온 교단은 교황은 모두 남자였다.
그리고 현재 후계자들도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가 남자였다.
별거 아닌 차이지만, 그 차이가 후계자들끼리의 다툼에서 가장 먼저 제거당해야 할 자로 꼽혔다.
이유?
그런 건 필요 없다.
후계자들은 상대를 하나씩 제거해야 했고, 그중에서 가장 눈엣가시 같은.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성별을 지닌 아델리나가 자연스레 목표가 된 것뿐.
“크라운이 교구 중 가장 세가 크고, 저를 지지해 주는 주교님이 계십니다.”
수많은 암살 시도에 결국 그녀는 크라운으로 피신을 결정했다.
상황을 파악했으니 이제 대책이다.
‘별거 있나!’
안전하게 그녀를 호위해서 크라운까지 가면 간단한 문제.
내가 호위를 하겠다고 하니 그녀는 고마워하면서도, 걱정을 금치 못했다.
“공자, 하지만…….”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적은 아델리나 님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저 때문에 곤란할 수도 있어 걱정하는데요.”
“그게 무슨…….”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도 은근 많은 편이라.”
보지도 않은 쥬시스가 뻘쭘해하는 게 느껴진다.
‘너는 나중에 따로 면담하고.’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네. 말씀하세요.”
“에펠리온 교단이 국내에서 세가 제일 크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왜…….”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일단 더 이상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영지의 영주는 어느 후계자를 지지하는지 모르지만, 곧 벗어날 테니.”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교인인데 감히 성녀라 불리는 아델리나 님을 직접적으로 해할 귀족들은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아델리나 님도 여기까지 피신할 수 있으셨을 테고. 이후는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그녀를 다시 한 번 안심시키며 생각했다.
“종교라…….”
그것도 세가 제일 큰 종교.
세는 제일 약한 것 같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후계자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지.’
킹 메이커도 되었는데, 교황 메이커가 못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종교도 사업이다.’
벼락 맞을 소리지만, 그게 사실이다.
‘배교나 오두미교의 교세가 그리 불같이 확장되었는데. 이거 잘하면…….’
아직 이렇다 할 계획이 선 건 아니고, 섰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할 방법이 생각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만한 사업이 있을까?
‘우선은 안전하게 크라운을 가야겠지.’
지금 당장 할 일은 그게 아니었다.
시선을 돌렸고. 쥬시스가 몸을 부르르 떤다.
‘일단 확실한 것부터 처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