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1)
이 뜻밖의 제안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할 때, 발드가 계속 말했다.
“검술을 호신용으로 배우는 건 좋지. 하지만 그런 호신용 검술은 실전에서 힘을 못 쓰는 경우가 많거든.”
“…….”
“그러니 원하면 몇 수 가르쳐 줄 수도 있다는 거지.”
“으음, 저는 사실 아이언 센터 출신입니다.”
재미있었지만 그를 기만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저 눈을 보니 내게 호의를 가지고 말하는 거다. 그래서 적당히 떨어트리려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다.“
“아이언 센터?”
“아시지요?”
“물론이지. 하하하! 여기서 동문을 다 만나는구먼.”
일이 이상하게 흘러들어간다.
‘매년 센터생을 스무 명 안팎으로 받는 거 아니었어? 이자가 센터생이라고 하기엔…….’
아이언 센터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센터에 찾아온다. 그 많은 수를 다 받아들일 수 없으니 시험을 통해서, 자질이 뛰어난 이십여 명의 사람들만 센터생이 된다 했다.
‘아! 지부 출신인가? 아니, 그래도 좀 미진한 구석이 많은데.’
각 지방에 있는 센터 지부가 몇 군데 있지만, 그래도 경쟁률은 높다 들었는데 말이다.
그때 발드가 또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는 어떤 분에게 배웠나?”
“…….”
“난 운이 무척 좋았지. 난 중급 제자분에게 들었거든. 혹시 포플러라고 들어봤어?”
순간 ‘누구!’라고 되물을 뻔했다.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포플러는 분명 뛰어난 무인이 될 터이지만, 아직은 누구를 가르칠 만한 뭔가가 안 되는데 말이다.
“중급반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분이라고 하더군.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는데도, 한 수, 한 수가 압도적이더군.”
이제 아련한 눈빛까지 하며 포플러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발드. 그러고는 날 보며 말한다.
“뭐, 이런 운은 아무나 가지는 거 아니니 부러워하지는 말고. 나도 그때 내 평생 운을 다 썼다 생각하니까.”
발드는 급기야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대신 평생을 두고두고 써먹을 한 수를 배웠지.”
그리고는 다시 날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일단 뽑혔으니 운이 좋은 거 아니겠나?”
대체 무슨 이야긴가 싶었다. 하지만 그와 계속 대화를, 아니 일방적으로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언 센터에서 정식 수련생이 아닌, 대중을 위해 무료 무술 강의를 한다는 것을.
비록 사흘짜리 짧은 강의지만, 그 강의는 누군가에게 큰 기회였고, 실제로 큰 깨달음을 얻고 칼밥을 먹고 사는 실력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눈앞의 발드처럼 말이다.
“원래는 사흘이지만, 포플러 님은 따로 나중에 며칠 더 가르쳐 주시기도 했지. 에렌에 있을 때 펍에서 자주 봤었거든.”
알 만하다. 그리고 포플러가 왜 따로 발드의 움직임을 봐 줬는지도 알 것 같다.
‘판박이잖아! 악의 없는 성격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자기 자랑 좋아하는 것까지.’
당시 포플러를 싫어하지 않았듯이, 눈앞의 발드도 싫지 않았다. 귀찮긴 하지만 그는 분명 호의를 품은 거니까.
“그럼 간단하게 한 수 배워 볼까요?”
마음을 바꿔 먹은 것도 그 때문이다.
눈치가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본성이 선해 보였고, 여태 묵묵히 호위 용병으로, 제 할 일을 해 왔던 것도 큰 점수를 주고 싶다.
‘게다가 포플러에게 배운 게…… 평생 써먹을 절기라 하지 않는가.’
무공에 스승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무공에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 재능을 알지 못하고 죽는 이들은 오죽 많겠는가.
‘내가 누군가에는 기연이 되어 주는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정말 몸을 풀려고 했었고, 맨손체조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훨씬 재미도 있으리라.
“여기! 진검이지만 너무 겁먹지는 말고. 조절을 잘하면 다치지는 않으니까.”
그가 내민 철검을 잡았고, 그렇게 비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지도 대련이지.’
여하간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다.
무공.
자신을 지키거나, 그 반대이거나 뭐가 됐든 자신이 가진 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무공의 본질이란 아마 그런 걸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인간의 역사에서 무공은 발전해 왔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술(術)의 본질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한 거다.
검에 한정하여 설명하면, 자신의 손과 검의 길이 그 이상을 뻗어 나지 못할 것이고, 선에서 시작하여 면. 그리고 공간으로 이어지는 3차원적이 움직임이 전부일 뿐이다.
“제법 하는데!”
발드가 잔뜩 흥분하여 더더욱 검에 속도와 힘을 싣기 시작했다.
‘크게 보면 결국 찌르고, 베는 게 전부 아닌가?’
상대의 무공이 높던, 낮던, 상대가 어떤 검을 익혔는지 알던, 모르던 문제 될 게 없다.
유역후 나이 마흔쯤이었을까?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 누구에게도 초식에 밀려 본 적이 없었다.
무공 초식이란 어설프게 변초를 익힐 바에, 실초만 주야장천 파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철저하게 효율만 중요시한다면 그렇다.
변(變), 환(幻), 허(虛) 등으로 설명되는 무리와 초식 등은, 진(眞), 실(實) 등으로 이뤄진 무리가 완벽하게 이뤘을 때 배워도 늦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걸로 봤을 때 발드의 수준은 나쁘지 않았다.
어설픈 변초보다 자신이 가진 힘. 그리고 힘을 이용한 직선을 이용한 공격이 주를 이뤘다.
‘이 수준에서는 나름 강자라 불릴 만하겠지만.’
이미 이 수준을 벗어난 무인이라면, 발드는 매우 손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다.
“와! 정말 제대로 익혔구나. 완전 호신용이야. 이렇게 방어적인 검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신나게 휘두를 수 있게 해 줬더니, 호신용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기왕 기연이 되어 주기로 한 거.’
슬쩍 그의 빈틈을 노렸다. 아니, 그런 척했다.
순발력은 좋은 듯했다. 순간순간 움찔움찔하는 것이, 자신의 허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지기 시작했다.
‘체력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힘 조절도 못 하고 강맹하게, 신나게 휘두른 것 치고, 꽤 오래 버텼다.
여하간 그를 상대로 몸은 제대로 풀었다.
‘꽤 쓸만한데?’
수준이 낮으니 오히려 예상이 안 되고, 그 불규칙함에 힘 조절이 까다로운 느낌이다.
물론 내력을 사용하면, 일정량을 꾸준히 사용하면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그렇게 되면 내게 남는 게 없다.
‘내게도 남는 게 있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발드에게 해 주는 지도 대련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겠어.’
계속 그의 기연이 되어 주기로 했다. 아마 마차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그는 한 단계 발전할 테고.
‘나도 거친 날 것의 느낌으로 감각을 쌓을 수 있을 테고 말이지.’
* * *
도시와 도시 사이에 놓이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길을 관도라 한다. 그렇게 대부분 관리된다고 하지만 관리를 못 하는 곳도 있는 법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마물들도 날뛰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어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냐.’
너무나도 평온한 길이다.
여객 마차들이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해도, 벌써 열흘째인데 작은 이벤트도 없다.
‘궁금했는데 말이지.’
마물이야 락에서 지긋지긋하게 봤다. 하지만 다른 곳의 마물은 본 적이 많지 않다.
애초에 여객마차를 이용한 이유도 각 지방의 특성을 알기 위함이고, 그 특성 중에 하나는 출현하는 마물도 포함된다.
하늘 산맥의 마물들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럴 때 그런 마물들을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언제 경험해 볼 것인가?
‘그렇다고 위험한 길로 가 보자고 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알면 기겁할 생각일 터.
그때 마차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아직 점심때도 아닌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보통 ‘혹시’는 ‘역시’가 되는 법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혹시’에서 그대로 끝나 버렸다.
선두에 가던 마차의 바퀴가 어디에 걸렸는지, 잠시 수리해야 한다고 했다.
‘보기는 보겠지.’
아쉽지만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제 헤어져야겠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발드가 말을 건넸다.
맞다. 정말 마물 한 마리, 마적이나 산적 한 명 보지를 못하고 여객마차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이리 수월하게 온 것도 처음인데. 운이 정말 좋았어.”
그래, 발드 입장에서는 엄청 운이 좋았을 것이다. 기연 만났지, 오면서 그 흔한 레지온 한 마리 보지를 못했으니.
그래서 결정했다.
남은 일정은 여객마차가 아닌 말을 구해서 따로 움직이기로.
“발드 씨.”
“응?”
“크라운 가 본 적이 있습니까?”
“가 보기야 했지. 수도잖아.”
“절 안내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날 고용하겠다는 거야?”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발드는 손에 놓인 금화 다섯 개를 보며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인가 보네. 그런데…… 이건…….”
“길은 발드 씨가 안내하는 대신 일정은 제가 정하는 조건입니다. 그거면 충분하겠지요?”
“충분하지. 두 달이 넘게 걸리는 곳이긴 하지만 이 정도 금액이면…….”
발드는 거금에 놀라는 눈을 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크라운으로 갈 거면 다른 여객 마차가 있어. 사실 따로 가는 것보다 그게 제일 안전해. 여객마차 호위가 사실 별로 돈이 안 되지만, 받는 이유도 그런 이유도 있고. 어차피 갈 거 돈 받고 가는 기분이랄까?”
거금이라고 하면서도 내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합격이다.
“좋긴 한데 좀 지루해서 말이지요. 의뢰는 받아들이는 겁니까?”
“고용주의 뜻대로 해야지. 하지만 방향은 내가 잡는 거야.”
그렇게 발드를 고용했고, 그는 말했다.
“그럼 고용주. 그래도 하루 이틀은 여기서 쉬어야겠지?”
“하루 정도는. 침대가 그립긴 하니까요.”
“좋아, 그럼 내가 아는 여관이 있어. 거기서 오늘 쉬도록 하지.”
중부도시 라비에는 에렌과 크라운을 잇는 중간역 같은 느낌의 도시. 또한, 동부로 가는 대로를 가지고 있어, 여객 마차는 물론이고, 용병들, 상단들로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발드는 라비에를 잘 알고 있는 듯, 거침없이 번화가를 걷더니 하나의 여관으로 안내했다.
럭키라는 이름을 가진 여관은 크지도 않았고, 시설이 썩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괜찮지? 보기엔 이래도 깨끗한 곳이야. 음식 퀄리티도 좋고. 가격이 살짝 비싸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지.”
발드의 목소리에는 왠지 자부심까지 묻어났다. 물론, 내 기준에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노숙보다야.’
운치고 나발이고, 지붕 있는 곳에서 바닥이 아닌 침상 위에서 자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실제로 시설이 안 좋지만, 청결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뭘로 세탁을 하는지 모르지만 청량한 느낌이 잠이 솔솔 올 것 같다.
짐을 풀기도 전에 그냥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언제 손을 쓸 생각이지?’
인내심이 대단한 놈이다.
에렌에서 출발했을 때 만해도 종종 기척을 느꼈는데.
‘사전 조사가 기네. 신중한 건지, 실력이 뛰어난 건지.’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높다. 디존슨 답지 않게 이번에는 제대로 사람을 구한 거라 봐야 했다.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 중에 섞여 들어서 기회를 노리는 건가 생각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느긋한 가운데서도 약간의 활력소가 되고 있긴 하지만, 이쯤 되니 귀찮은 마음도 든다.
‘어차피 이제 발드와 둘만 움직이면.’
몸을 숨기기는 힘들 것이다.
‘애를 쓰긴 쓴다만.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텐데.’
뭐, 굳이 내가 그런 놈을 걱정할 건 없을 테고.
눈을 감았다.
놈으로 인해 오랜만에 긴장감이라는 걸 느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