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0)
노상에서 먹는 건 뭔가 재미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음식의 질은 실내에서 먹는 것보다 나을 확률이 매우 적다.
대체 뭘 넣었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그마저도 건더기는 보이지 않는 희멀건 스프.
오늘 얻어먹었던 빵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빵.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고깃덩이.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것도 소위 일등석 손님에게만 제공되는 요리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싸가지고 온 음식을 먹었다.
온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차가운 음식들.
하지만 사람들은 먹었고, 그것에 웃고, 떠들었고, 즐겼다.
그 광경이 보기가 너무 좋았다.
나는 따뜻한 음식을 먹고, 뭔가 대단한 위치에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그런 위선은 아니다.
실제로 락의 토벌 시기 때도 나를 비롯한 아버님도 딱딱한 빵에 굳은 우유 덩어리. 미지근한 물 한 잔에도 즐거웠던 시기가 있었으니.
그렇게 식사가 끝나니 잠자리를 준비하는 사람, 따로 모여서 술 한잔 마시려는 사람 등, 분주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젊은 손님, 한 판 안 하려우?”
마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묘하게 흔든다.
도박을 하자는 거다.
도박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마부들. 그리고 몇몇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주사위나 카드로 하는 도박이다.
“잘 못 합니다.”
내 대답에 쉰쯤 되어 보이는 마부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는 잘해서 하나. 심심하니 그냥 운이나 시험해 보는 거지. 그리고 신기한 게 처음 하는 사람들은 도신이 붙어서 늘 따거든.”
내가 어지간히 호구로 보였나 보다.
하긴 오면서 별말 하지 않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소소하게 뜯어가는 돈을 다 지불하긴 했다.
저 유혹이 무슨 악의가 있다면 화는 났겠으나, 어제 봤을 때 그들의 실력, 그리고 판돈을 보고 그런 생각은 접었다.
주사위는 정말 운으로 점수가 나왔으며, 카드는 조금 똑똑한 사람들이 돈을 따는 식이다. 오가는 돈의 총량이 금화 한 개를 넘지 않고 말이다.
‘그래도 잃은 사람은 동전 몇 닢에도 속이 쓰린 법이니.’
가만히 있으면 계속 권할 것 같아, 몸을 일으켜 주변을 움직였다.
주변에서는 십여 명의 용병들이 각자의 마차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님들도 불침번을 서긴 하지만, 경계의 주축은 역시 이 용병들이다.
모두 각자 다른 소속이거나, 소속을 두지 않은 개인 용병들이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집단인 듯이 자연스레 역할을 나누며 제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술과 도박은 그들의 삶의 일부인데도 저녁에 그들이 도박을 하거나, 거나하게 술판을 차린 건 보지 못했다.
뭐 허리에 찬 주머니 주향이 풍겨 나오긴 했지만, 홀로 몇 모금씩 마시는 건, 오히려 활력소가 될 터.
모두 절제를 아는 용병들이다. 이런 여객 마차 호송에 큰돈을 받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마차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네.”
마차로 둥근 원을 그린 가상의 선을 나간다고 생각했는지, 한 용병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내가 탄 마차에서 고용한 용병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느낌의 서른 중반의 사내.
“하도 마차에서만 있다 보니. 몸이나 좀 풀려고 합니다. 시야 밖으로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정한 규칙을 깰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저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일 테니 말이다.
‘이게 저들의 밥벌이 아닌가.’
가정을 꾸렸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존중해 줘야 할 부분이었다.
“검은 안 차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을 푼다는 말에 그는 호기심을 보였다.
“맨손 체조 같은 거지요.”
“하긴 이럴 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좋지. 판드라고 하네.”
“테라라고 합니다.”
에렌에 있을 때, 고용한 용병들이니 혹시라도 본명을 밝혔을 때 소란이 있을까 하여 테라의 이름을 빌렸다.
“몸은 좋은 것 같은데? 그냥 맨손 체로로 만들어질 몸은 아니잖아. 검은 좀 다루나?”
“호신용으로 조금 연습은 했습니다.”
그 대답에 판드는 심심했는지. 아니면 호의였는지 재미있는 제안을 해 왔다.
“호신용이라? 내가 호신용으로 조금 가르쳐 줄까?”
* * *
“으음…….”
나직이 숨을 뱉으며 베스타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남부 일 군단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함께 검토하고 있던 레빙스턴은, 공작의 한숨에 듣고는 물었다.
“주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란데일 너무 빨리 갔어.”
“…….”
“일국을 넘어, 천하의 운영을 맡길 만한 녀석이었는데. 그리 허무하게 갈 줄은 예상 못 했지.”
레빙스턴은 할 말이 없었다.
아란데일.
에렌의 4대 기둥이라 불리면서도, 에렌의 군사.
몇 년 전 그는 죽었다.
전장에서 죽었거나 무슨 사건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집에 있다가 일어나지 못했다.
과로사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에렌은 이미 안정화 된 지 한참되었고, 일할 인재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전체적인 방향만 검토하면 되는 사람. 그런데도 그냥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레빙스턴은 기억했다.
아란데일의 죽음이 알려졌던 날.
베스타인 공작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있다가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진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
사람들은 주군을 보며 역시 냉혈한, 철혈의 사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자신은 안다. 주군이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먹는 건 의무라고까지 하던 주군이었다.
그때 베스타인이 툭 던지듯이 말을 이었다.
“잘 먹어. 잘 쉬고. 자질구레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에 대한 염려에 레빙스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늙으셨는가!’
절대 저런 식으로 속내를 내보이는 분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레빙스턴은 안타까웠다.
“하나하나 챙길 이유는 없지. 내가 자네를 부려 먹는 것처럼 말이야.”
저 말에 호응을 하면 정말 주군의 늙음을 인정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레빙스턴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일 군단의 지휘 체계는 이대로 확정하실 생각입니까?”
그 물음에 베스타인이 반문했다.
“다른 생각이 있나?”
“논란이 많을 것 같습니다. 특히 군사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왜? 누가 불만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감히 누가 주군의 명령에 이견을 제시하겠습니까?”
레빙스턴은 급히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경험이 없는 그를 자로 중요 보직으로 승진시키다 보니 염려가 조금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염려를 하는가 말이야. 아니 그 전에 자네도 그리 생각해?”
“아닙니다. 다만 비아나 백작이 조금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란데일이 죽은 후 그가 임시로 그 지위를 맡고 있었으니까요.”
“멍청한 놈!”
순간 베스타인이 낮은 목소리로 욕을 했다.
“제 능력에 과분한 자리라는 걸 알아야지. 부군단장도 능력보다는 큰 실수 없이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 와 올라간 것을 왜 몰라!”
“…….”
“이제야 권력에 욕심이라도 생기나 보지?”
순간 레빙스턴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비아나 백작이 부군단장직을 내려놓고 영지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는 군인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그 자리에 올렸던 것이고.”
“그랬었지. 하지만 그도 늙었지. 딸자식 걱정할 나이 아니야?”
“…….”
“왜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레빙스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그 딸이 대공자의 안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런다는 건 주군이 대공자를 내세우려는 게 아니란 뜻인가?’
레빙스턴은 슬쩍 베스타인을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아란데일도 없는 상황에서 군의 주축을 맡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베스타인의 말에 레빙스턴은 대답했다.
“몇몇 무리가…… 앞을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군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주군. 하지만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 그러니…….”
“후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자네도 그러나?”
“저야…….”
레빙스턴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생각 안 합니다. 주군께서 은퇴하실 때 저도 모두 내려놓을 생각이니까요.”
베스타인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욕심도 없나? 아란데일과 자네가 만든 군이야. 다른 놈을 믿을 수 있겠어?”
“죽을 때까지 여기서? 그럴 생각 없습니다. 주군이 은퇴하시는 날. 저도 평화롭게,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 겁니다.”
“그런 말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쉰도 안 된 사람이.”
“놀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야 잘 놀지 않겠습니까?”
“허허. 안 하던 말을 하는 걸 보면……. 그건 안 돼. 늙었다는 증거 아닌가?”
“그러니 지침 정도는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주군과 저희가 만든 에렌입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
“린델…… 그 아이는 똑똑합니다. 젊었을 적 제 아비를 쏙 빼닮았지요. 하지만 실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사단급에서 실무를 익히는 아이를 바로 군단의 군사로 임명하셨습니다.”
“…….”
“대공자와 연관이 있지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란데일이 대공자를 탐탁지 않아 했으니, 린델도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베스타인이 입을 열었다.
“아란데일이 첫째를 탐탁지 않아 했나?”
순간 레빙스턴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란데일을 생각하다가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다.
“물었네. 레빙스턴.”
공작의 말에 레빙스턴은 말했다.
“아란데일이라고 해도 후계 문제에 감히 나설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문제는 오롯이 주군이 결정하실 문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누굴 좋아했는가?”
“제가 말씀드릴 문제는…….”
“누구!”
베스타인의 단호한 한마디에 레빙스턴은 입을 열었다.
“아란데일이 속으로 누굴 지지했는지 정말 알지 못합니다. 주군.”
“그래도 매일 붙어 있던 사이였을 터. 짐작은 하겠지. 누구였나? 에듀였나?”
“……에듀 경을 좋아는 했습니다. 누구든 그를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그가 에렌을 떠났을 때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는 에듀 경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주군 옆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베스타인은 아란데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 녀석이었지. 아란데일은, 그럼 나머지 놈들 중 누구였지?”
“카르이샤를 우호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또. 누가 있는가?”
레빙스턴은 나직이 대답했다.
“로라스였습니다. 그의 능력을 떠나서, 가장 주군과 닮았다고 했었습니다.”
“으음…….”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할 말 한 것뿐이야. 우리 가문이, 그리고 에렌이! 계속 지금처럼 되려면 준비는 해야 할 터.”
베스타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린델을 올린 이유도 그런 이유이기도 하고. 그 아이는 중임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으며, 정치적으로 빚을 지거나, 지운 적이 없는 아이.”
“아!”
“후계 싸움이네 뭐네 하면서 진흙탕이 될 때도, 군은 언제나 그대로여야 할 테니까.”
베스타인은 레빙스턴을 직시하며 말했다.
“일 군단을 재편한 후 자네를 일 군단장에 앉힐 생각이야.”
……!
“자네의 이 군단은 몇몇 녀석들에 나눠 줘 볼 생각이고!”
“주군! 지금 이 군단은…….”
“알아. 정예부대가 많지. 자네가 만든 부대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래야 큰놈과 균형이 맞아.”
레빙스턴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더 말을 하면 후계 싸움에 얽힐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 이번 개편 작업에 자네에게 아무 일도 맡기지 않은 이유도 알았으면 좋겠고.”
“명심하겠습니다.”
“일하자고.”
“네.”
레빙스턴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며, 베스타인은 생각했다.
‘정에 얽매여서는 지금 황실 꼴이 날 뿐이지. 죽기 전까지 권력은 하나로 정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