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9)
“으으으…….”
디존슨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의 붉은 실선.
‘어떤 놈이!’
서늘함과 동시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누가 감히! 그것도 성내에서 자신에게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느냔 말이다.
‘이 정도의 암살자가 있던가?’
아니 그보다 흔적만 남기고 죽이지 않고 돌아간 건 무엇인가?
공포, 분노에 이어 궁금함이 일었다.
“거기 누구 아무도 없느냐!”
그러다 디존슨은 크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외침에 가장 먼저 달려온 디존슨의 부인이었다.
“목에 그건 뭐예요!”
그리고 디존슨의 목의 흔적을 보며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암살자야. 암살자가 어제 침입했어.”
“그게 무슨……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르니 알아봐야지. 당장 사람들을 불러. 어제 늦게 잤고, 오늘은 일찍 일어났지. 어쩌면 아직 성내를 빠져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어.”
디존슨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잡아야 해! 반드시 잡아서!”
“어떻게 잡으려고요?”
“응?”
“암살자가 침입해서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래서 겁이 나니 어떻게든 찾아라! 지금 이러려고요?”
“찾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어떻게요!”
디존슨 백작 부인의 외침에 디존슨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분노와 흥분 때문에 소리치긴 했지만, 이미 사라진 자객을 어디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신 차려요. 동네방네 소문낼 일이라도 있어요? 암살자가 침입해서 겁먹었다고?”
“무슨 말이 그래!”
“상황이 딱 그리 보일 거 아니에요! 상황이!”
“…….”
“새로운 후계 발표 때문에 어수선한 상황이에요. 이럴 때 강한 리더쉽을 보여야 할 당신이 겁먹었다는 소문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판단하에 디존슨이 물었다.
“그럼 어쩌자고?”
“모른 척해야죠.”
“그냥 넘어가자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하되 당사자에게는 경고를 확실히 해야죠!”
“당사자? 누구?”
“지금 상황에서 누구겠어요? 감히 에렌에서 암살자를 당신에게 보낼 자가!”
“에듀는 그럴 놈이 아니야!”
“누가 들으면 우애 좋은 형제인 줄 알겠어요?”
비아냥 섞인 그녀의 말에 디존슨은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수는 없는 놈이야. 차라리 그런 놈이었다면!”
디존슨은 정말 에듀가 그랬다면 그를 상대하는 게 정말 편할 거라 생각했다.
“하여간 그놈은 아니야!”
“그걸 누가 몰라요!”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디존슨의 역정에 그녀는 대답했다.
“에듀가 아닌 당사자겠죠.”
“로라스?”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어요?”
“로라스. 그놈은…….”
“이렇게 적과 아군을 구별 못 하니, 여태 아버님께 후계자 위치를 보장받지 못한 거 아니에요!”
“…….”
“이상한 생각 안 들어요? 당신의 돈줄이 막히고, 사람을 잃고, 평판이 안 좋아졌을 때 항상 누군가 있었는지 몰라요?”
“그 애송이 놈이 어떻게…….”
백작부인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송이가 아니라 당신과 동등한 후계 후보라는 걸 자각하라고요! 그리고 아버님이 어떤 분인데, 당신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자를 후계 후보로 올렸다고 생각해요?”
디존슨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맞아 떨어졌다. 사실 의구심은 가지고 있었다.
특히 와카디아 지역의 영지전에서 락이 승리를 거두고, 미카이가 행방불명됐을 때 그 의구심은 더욱 짙어졌었다.
이렇게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정도로 모든 게 이해되었다.
“이놈이 감히…….”
디존슨인 욕지거리를 내뱉자, 백작부인이 말했다.
“이미 손을 써 놨으니 당신은 잠자코 지켜봐요. 오늘 일은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고요.”
“손을 써 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디존슨의 재차 물었으나, 백작부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알면 날뛸 테니까.’
그녀는 디존슨이 한심했다.
자신의 남편이지만 그 배경을 가지고 여전히 이 정도의 위치밖에 차지하고 있지 못함을 이해 못 했다.
거기에 새로운 경쟁자?
인정할 수 없었다.
암살자를 찾았고, 의뢰를 맡겼다.
디존슨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로라스가 베스타인이라는 성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러 터진 성격이라 적을 견제하고, 쫓아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과거 에듀를 깨끗이 죽여 버렸다면 오늘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또 로라스가 어렸을 때 죽여 버렸다면?
‘알량한 자존심인지, 되지도 않는 도덕심인지.’
약과 도박으로 조카를 타락시키려고 했던 남편이다. 그게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있을까?
여하간 그래서 암살자를 찾고 보낸 것이다.
‘그나저나…… 이놈들이 양쪽의 의뢰를 다 받은 건 아니겠지? 이리 솜씨 좋은 놈들이 또 있었단 말인가?’
남편을 저리 만들 정도의 암살자. 자신이 구한 암살 길드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의 실력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지!’
백작부인은 슬쩍 디존슨을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신 같은 동반자를 뒀음에 말이다.
* * *
관도를 따라 크라운으로 향한 지 삼 일째.
“좋네.”
에렌에서 크라운까지 말을 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도 3개월은 넘게 걸린다.
떠날 때 호위 병력을 붙인다, 시종이 필요하다 말이 많았다.
―의전처럼 불필요한 것도 없지만, 또 어느 때는 이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너는 개인의 자격으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니.
아버지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굳이 거절한 이유는.
‘이게 언제만의 혼자 갖는 시간이냐.’
내가 두 분의 아들이고, 이제는 만 명에 가까운 락의 소영주였으며, 누군가의 주군, 친구 등 수많은 관계로 얽혀 있다는 건 잘 안다.
너무나도 급격한 변화에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건 방에 혼자 있고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르다고 생각한 쪽으로 움직이기를 몇 년째.
이번 시간은 생각의 폭을 넓게, 그리고 길게 볼 기회가 될 것이다.
‘궁금도 하고.’
락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렌은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대도시. 하지만 에렌이 제국의 모든 문화를 가진 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기를 바랐다.
‘노잣돈 두둑하고,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으니 느긋하고.’
굳이 말을 타지 않고 여객용 마차를 이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마차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서 멍하게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좀 안쓰러웠던 걸까?
“젊은이! 이것 좀 먹어 보겠는가!”
이틀을 같이 앉아 있었으면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노파가 흰 천에 쌓인 뭔가를 건넸다.
코앞까지 들이미는 걸 재빨리 손으로 받고 보니. 딱딱한 촉감이 먼저 느껴졌다. 그리고 천 틈으로 검갈색이 섞인 물체가 보였다.
빵이다.
그리 맛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건 언제까지 내 기준.
곰팡이가 피지 않고, 빵의 결이 나름 촘촘한 보면 제법 잘 구운 빵에 속한다.
솔직히 이 빵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호의라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한 가치는 되었다.
“감사합니다.”
몸을 쓴 것도 아니고, 여행이 주는 특유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상황이라, 허기는 조금도 지지 않았지만, 감사를 표했다.
‘원래 이런 거에 당하는 법인데.’
그러다 뜬금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일행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데 타인이 주는 음식물은 받는 게 아니다.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있다지만, 생면부지에 어쩌면 또 한패일지도 모르는 거니까.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강호초출 대부분이 이렇게 어영부영, 설마설마하면서 상황에 끌려가다, 당하는 법이니까.
‘물론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한 입 베어 씹으니 입안이 까칠까칠한 게 식감은 좋지 않으며, 밀가루 비린내가 조금은 났다. 여기서 빵의 고소함을 느끼려면 씹고 또 씹어야 했다.
‘나름 거칠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맛이 정말 없다.
아니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면서 입맛이 많이 변했다.
미식가.
‘좋으면 좋은 거라 할 수 있지만…….’
뭐든 맛있게 먹는 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다그닥, 덜컥. 다그닥. 덜컥.
그렇게 말발굽 소리와 마차에서 나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여객마차 행렬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서 움직이던 마차가 일시에 정지됐다. 창문을 내다보니 커다란 공터가 보인다. 공터의 흔적을 보니 여객 마차들이 늘 야영을 하던 지역인 듯했다.
‘이건 좀 불편하네.’
마차 한 대로 움직이면 뭐든 빠르겠으나, 열두 대의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다. 거기에 사내들만 모여 있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 성격이 제각기인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뭐든 공동으로 하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럼에도 여객 마차들이 이리 뭉쳐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용 절감이다.
아무래도 마차를 호위하는 용병들의 고용도 그렇고, 승객들은 각자 다른 마차의 자릿세를 냈지만, 행선지를 맞춰서 다른 마차로 이동하기도 한다.
오면서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민심을 살필 때는 재미있지만, 이 시간 때가 되면 귀찮아지는 게 사실이다.
“모두 모이시오!”
마차의 주인이자 마부인 중년인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모이자 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우리 마차가 경계를 설 차례요. 알아서 순번들 정하고 정확한 시간에 경계를 서야 할 거요.”
그때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손을 들며 물었다.
“저기 여자들도 서나요?”
“같은 자릿세를 냈소. 거동이 불편한 환자, 열 살 이하 애들을 빼고는 모두 동일하오.”
여자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는 몰랐는데…… 용병들도 고용하는 마차라고 해서 이런 건 안 할 줄 알았는데.”
여자의 외모는 남자들이 반할 만큼의 수준은 되었는데, 마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일등석 표를 샀어야지. 그들의 자릿세에는 이런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런 거였나?’
어쩐지 자리도 남들보다 크고, 마부가 옆 좌석에도 부르고 하긴 했었다.
그때 뚫어지게 날 쳐다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 없다.’
불침번이 뭐 어려울 것 있느냐마는 귀찮은 건 사실이고, 애초에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내 권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양보하자면.’
슬쩍 옆을 돌아봤는데.
……?
노파가 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빵 한 조각을 나눠 주는 호의를 베풀었던 노파. 이틀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다가 갑자기 빵을 나눠 줬던 건 의아하기는 했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건데.’
아무래도 아이처럼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을 보니, 뻔할 뻔 자였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뭐,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었다.
뭔가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나이든 자의 투정 정도라 생각하면 이런 것도 나름대로 여행에서 벌어지는 추억 같은 것도 될 터.
‘너무 오래간만이잖아. 혹시가 역시나 되는 일은.’
기쁜 마음으로 양보 해주기로 했다.
“할멈, 할멈 순번은 내가 설 테니 불침번은 그냥 빠지세요.”
“어이쿠! 그럴 필요는 없는데.”
정말이냐고 물어보고, 그러냐 하면서 말을 바꿀 수는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가 재미있었으니까.
“그냥 양보해 줄 때 그리 하세요. 아까 얻어먹은 거 갚는 거니까.”
“이렇게 고마울 때가.”
두 손을 꽉 잡으면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속 빤히 보이는 뻔뻔한 노파라 해야 할까? 아니면 남을 이용하고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법을 아는 노파라고 해야 할까?
내게 있어서는 후자다.
여하간 그렇게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곧 저녁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