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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57화 (15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7)

제대로 붙기로 한 이상 예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귀찮아질 게 분명한 일.

어머니의 미소와 평안을 위해 엄청난 귀찮음도 감수하는데, 손을 못 쓸 것도 없었다.

고스트를 통한 대리전 따위가 아닌 직접적인 전쟁.

며칠 후에 크라운에 떠나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 며칠이면 천하를 뒤집을 수 있는 시간.’

여차하면 복면을 쓰고 자신이 암살자 역할을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물론 그런 저급한 방법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다.

‘카르이샤라고 했지?’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세 번째 후계 후보이자, 나에겐 막내숙부.

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부분 좋은 쪽이었다.

음흉하여 속내를 알기가 힘들다거나, 아니면 매우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사람이란 내용도 있긴 있었으나, 그건 대부분 디존슨의 사람 쪽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들.

‘결론을 내리면 사람은 괜찮다는 건데.’

물론 소문을 백프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작년까지 막내숙부는 동부 씨맨스를 다스리는 영주라고 했다.

씨맨스는 동부 해안 쪽 영지로서, 에렌에서 떨어진 할아버지의 영토.

에렌에서 떨어졌다고 씨맨스가 그냥 그런 영지는 아니었다.

일단 인구가 5만이 넘는 대도시였으며, 제국에서도 중요 항구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런 곳의 영주로 보냈다는 건 능력은 있다는 것이고. 뭣보다 뱃사람들이잖아.’

뱃사람들은 거칠다.

신분제가 철저한 제국이지만, 그래도 해안 도시 쪽은 덜하다.

목숨 걸고 배를 타는 사람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서인지는 몰라도, 사납기가 북부에서도 첫손에 꼽힌다.

‘슬슬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시험하실 요량이실 테니.’

디존슨이 에렌에 눌러 앉은 지 꽤 되었고, 씨맨스에서 영지를 잘 관리하던 막내숙부도 불러들였다. 둘째 큰아버지인 멘토라스는 서부 국경에 있어 당장은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에렌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각난 건 하나다.

‘아버지는 뜻이 없고, 나도 원하는 레이스는 아니지만…….’

시작한 이상 반드시 남이 무시 못 할 위치는 만들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호가호위(狐假虎威)라도 해 볼까?’

물론 여우와 호랑이가 누가 될지는 상당히 모호하겠지만 말이다.

‘막내숙부의 도움으로 곤란함을 면했다고 하니, 갚아 줘야지.’

사실 이런 마음을 먹은 이유는 있었다.

어떤 의도였든 일단 막내숙부는 어머니를 곤경에서 구했으니까.

‘막내숙부가 복이 많으신 게지.’

호의였던, 아니었던 그 사실 하나가 막내숙부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능력 많은 조카를 킹 메이커로 둘 테니.’

* * *

“기를 죽여 놓고, 사람들에게 신경 쓸 존재들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려고 했는데.”

“쓸데없는 짓을!”

“그럼 그냥 두고만 봐요? 가만히 놔두면 기어오르려고 할 거예요.”

안사람이 앙칼진 목소리로 하는 말에 디존슨은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 굳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내 평판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뭐에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백작부인은 성난 목소리로 따지듯이 계속 물었다.

“호오.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했어요? 이제 아우의 부인이 된 지금도?”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잖아요!”

“하아! 내 체면 상할 일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냥 지켜만 봐도 알아서 처신할 거야.”

“언제부터 당신이 그리 자비롭고 여유로웠나요? 그리고 지금 마냥 여유를 부릴 땐가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고요!”

백작부인은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도 대체! 에듀 남작도 아닌 그의 아들인 로라스를 당신과 같은 위치에 올리다니! 노망이라도 드신 거 아니에요?”

“이 사람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지금 그게 할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을 이해가 가냐고요! 그리고 대체 몇 년째에요? 이제 슬슬 실무를 맡길 때가 되지 않았나요?”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통솔하고 있는 삼 군단의 병력을 잊었어? 군권은 다른 놈들에게도 없어!”

디존슨이 성난 목소리에 백작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자랑이라고. 멘토라스의 레인져 부대는 군대가 아닌가요? 또 카르이샤는 맥시스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삼 군단에 비할 바가 아니지.”

“정신 좀 차려요. 삼 군단을 데리고 있어 봤자, 간부들 반수 이상은 여전히 아버님의 심복이에요! 일, 이 군단은 여전히 아버님이 꽉 움켜쥐고 계시고 있고요.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아란데일이 죽은 이후 군단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 같아? 다른 군단의 군권도 내 손에 들어올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걱정을 하지 않게 해야죠. 아버님이 연락하셨어요.”

디존슨은 순간 흠칫했다.

장인 림프지방의 대영주이며 일 군단 두 명의 부군단장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장인이? 왜?”

“일 군단의 지휘 체계가 개편된다고 하네요.”

“뭐라고!”

“그러니 마냥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요! 다른 때도 아닌 지금 일 군단이 개편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고요!”

디존슨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이 정말…….’

끊임없이 자신을 아우들과 경쟁시켜 온 분이지만, 그래도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물려받을 거라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베스타인 가문의 장자는 자신이었으며, 그 때문에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후계도 자신이었다.

‘아닐 거야!’

그래.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몇 번이나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후계에 비해 손색이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가져야 할 능력이라는 건 사람을 잘 쓰는 용인술.

그거 하나면 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실수를 했을 때도, 아버지는 자신을 크게 꾸짖었을 뿐. 자신의 권한을 뺏지는 않았다.

맞다. 또 실수만 한 건 아니다.

서부 국경의 책임자로 무난하게 군 생활까지 끝냈다.

디존슨은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제대로 웃어 주지도 않았던 부친이 그때는 진심으로 자신을 반겨 줬다는 것을. 삼 군단의 군권을 내준 것도 그때였고, 자신의 대리를 맡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름뿐인 후계가 아닌 실권을 가진 후계자.

그렇게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이 다음 대 에렌의 주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일 군단의 개편은 아니었다.

장인을 비롯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일 군단 소속.

지금 상황에서 군단의 개편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개편되는지 알고 있어?”

“그걸 모르겠으니 당신보고 알아보라고 하는 거지요. 아버님을 만나서 슬쩍 여쭤보세요. 대충이라도 알아야 아버님도, 당신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대비하잖아요.”

디존슨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아!”

라르자 백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서야 하는데…….’

분명 그리 생각하고 결심했지만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힘드니.’

에듀를 만나려고 했었다.

자신이 아는 에듀라면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카르이샤의 힘이 되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들 부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귀족가의 초대를 모두 거절하고, 사교계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인데.’

하지만 이틀 전 디존슨 대공자의 초대는 응했다고 했다. 그리고 망신을 당할 뻔했다고 했다.

그 난처한 상황을 구한 게 바로 자신이 모시는 카르이샤 공자다. 만나기만 하면 설득, 아니 최소한 디존슨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전까지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절호의 찬스도 사람을 만나야 가능한 법.

몇 번이나 성내에 초대장을 보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 답변만 받을 뿐이었다.

라르자 백작이 그렇게 애끓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방해하지 말라 했잖는가!”

밖에서 들리는 집사의 목소리에 라르자 백작의 음성이 뾰족해질 때였다.

“그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락의 로라스라는…….”

집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라르자는 급히 문을 열며 나왔다.

“어디 있는가?”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접대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야. 마실 걸 물어보고 좋은 걸로 가져와야 하네.”

“네. 백작님.”

집사가 물러서자 라르자는 방으로 돌아와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는데 제 발로 찾아왔다.

‘날 찾아왔다는 건 지금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뜻일 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에렌의 귀족 대부분은 대공자나, 둘째 공자에 줄을 대고 있는 상황에서, 같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세력이 나타났다.

‘그 세력이 미약하니 모두가 신경을 잘 쓰고 있지는 않지만.’

에듀도 그렇지만 로라스도 나름 유명인사이기는 했다.

특히 로라스의 경우에는 실버 스워드 대회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둘째치고, 일단 그 에르페유와 헤르메스의 제자이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흥미는 가지만 귀족들이 뚜렷하게 락과 친분을 맺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후계 후보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베스타인 공작이 늙어서, 귀여운 손자에게 감투 하나 씌어 준 거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이미 예전부터 락에 대해, 그리고 그 부자에 대해 조사했었으니까. 게다가 공작이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귀여운 손자라는 이유로 후계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여하간 그런 락의 변화를 이끌어 낸 장본인이 자신을 찾아왔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라르자 백작은 생각을 정리했다.

‘카르이샤 님을 위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해.’

라르자는 그렇게 전쟁에 나서는 장수처럼 전의를 가득 채우고는 응접실로 향했다.

‘으음!’

어떤 청년일지 기대와 함께 우려되었다.

사실 소문을 일으킨 청년이긴 했지만, 로라스의 실물을 본 귀족은 많지 않았다.

로라스가 에렌에 있었던 시절, 본인이 귀족들의 초대를 거절하고 파티보다는 마탑과 센터에만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로라스 공자. 이리 보게 되어 반갑네.”

그렇게 응접실로 간 라르자는 인사를 건네며, 로라스를 살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르자 백작님.”

음성부터 단단하게 느껴지는 무인. 그러면서도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눈동자,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

그게 라르자가 로라스에게 느낀 첫인상이었다.

“나야말로 영광이지. 실버 스워드 우승자 아니신가. 그러고 보니 공자가 아닌 경이라 호칭해야 하나?”

“백작님이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경이 더 편하겠어. 정말 반갑군.”

로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불청객을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보며 말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귀한 차라는 건 한 모금 마셔 보고는 바로 알 것 같습니다.”

“아! 자네도 차를 좋아하는가? 저건 미레아스 지역에서 올라온 레드스노우라고 하네. 생산량이 지극히 적어 사고 싶어도 구하기가 힘든 차지. 혹시 좋아한다면 돌아갈 때 준비하라 이르지.”

“미리 감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님께서 차를 좋아하셔서.”

“하하하, 그런가.”

찾아온 로라스와 만나고 싶었던 라르자.

서로 할 말은 꼭꼭 숨겨 둔 채,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입과는 달리 눈은 그러지 않았다. 상대의 표정과 몸짓에서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본론, 그러니까 서로가 주고받을 수 있는 뭔가에 논의된 건, 그 후로부터 한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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