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5)
“코피 났다. 내가 이겼다.”
“코피 난 걸로 진 거 아냐. 계속하자니까.”
십수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말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네가 코피가 났으니 내가 이겼다는 아이. 코피가 났어도 아직 싸울 수 있으니 진 게 아니라는 아이.
그리고 두 아이의 싸움에 주변의 아이들도 제각기 생각에 따라 누군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리 싸우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누가 이긴 거예요?”
아이들의 질문.
“제가 이긴 거죠?”
이겼다고 주장하는 짧은 머리 아이의 질문에 이어, 곧바로 상대인 더벅머리의 아이가 소리쳤다.
“아직 진 게 아니라니까.”
그런 아이들을 보며 로라스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의 편을 들어줄 일 이 아닌 것이다.
“이놈들!”
곤란한 그를 구원하는 이가 나타났다.
“수련하고 있으라니 잡담을 하고 있어?”
목소리는 나름 엄하고, 표정은 마치 ‘너희들을 한 대 쥐어박을 것이다!’ 하는 표정이었으나, 아이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달려가 한마디씩 할 뿐이었다.
“선생님. 이 아저씨 되게 웃겨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랬어.”
“아저씨야. 무슨 형이야.”
발란스 곁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로라스는 그동안 발란스가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보라고 한 건 맞는데…… 보모가 돼 버렸군.’
그게 보기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 다시 수련해. 검을 배우기 싫은 녀석들은 당장 글하고 산수 하러 가.”
발란스가 다시 엄한 목소리를 내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잽싸게 달려갔다. 물론 글을 배우는 곳이 아닌 다시 연무장으로 말이다.
“공자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로라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대답했다.
“보기 좋아.”
“죄송합니다. 저 녀석들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하게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라도 했나 봐. 사실 그대로 말한 것뿐이야. 애들을 얼마나 정성 들여 돌봤는지 짐작이 돼.”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고민이 많았습니다.”
“뭐가?”
“공자께서는 저 아이들을 조직의 일원들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의외의 질문에 로라스는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그쪽을 장악할 생각이지, 그들을 조직원으로 키울 생각은 아니야.”
“그 뜻은?”
“솔직히 말하면 사병 조직을 생각했다. 고아로 떠돌다가 결국 흑사회로 흘러 들어가거나,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거든.”
발란스가 로라스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단 뜻입니까?”
“반반이지. 돌려 이야기하지 않을게. 내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고아 애들을 모아서 돌보라 한 건 아니야. 물론 측은지심은 있지. 조금 전 말한 수준으로.”
“…….”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이유야 어찌 됐든 결국 내 이득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건 변치 않더군. 그래서 말이야.”
발란스는 로라스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후 나올 말이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기에.
로라스는 조금은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택권을 주려고 해.”
“선택권이라 하시면?”
“성인이 돼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선택권. 원하면 우리 영지의 자유민이 되어도 좋아. 용병이, 또는 어느 곳의 병사, 더 잘하면 기사가 될 수도 있겠지.”
“…….”
“자유와 선택지를 줄 거야. 하지만 불법적인 곳에 소속돼서는 안 돼. 나와 적대하는 곳에도 소속돼서는 안 되고. 그 정도야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거면…… 정말…….”
발란스는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를 보며 로라스가 말했다.
“그거면 된 거지. 그리고 그렇게 될 거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살아야지. 물론 우리 영지의 병사가 되는 게 내게는 최고로 좋겠지만.”
“아이들을 대신해 제가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어지간히 정이 들었나 보군. 거기까지 생각하는 걸 보면.”
발란스는 큰 걱정을 하나 던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아이들도 많지만, 곧 성인이 될 아이들도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커서 들어온 아이들입니다. 머리가 굵어지고, 주변에 또 우리 같은 놈들뿐이니…….”
“고스트의 조직원이 되겠다고 했나 보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건 내가 탐탁지 않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흑사회 조직원을 만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발란스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공자님의 영지에도 고아원을 하나 차리고 싶습니다.”
“락에?”
“네. 여기가 모여 돌보기는 편하나…… 교육 환경이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라…….”
로라스는 발란스의 고민을 이해했다. 그리고 저 말을 하기까지 왜 그리 많은 대화가 필요했는지도 이해했다.
‘내가 조직원을 만들겠다 하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 아니라고 하니 지금 이야기하는 거고.’
이런 자이니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렘 알지?”
“네. 요르크와 종종 만나는 것 같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그 사람과 상의해. 초기에는 돈이 또 들어갈 테니.”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이들에게도 종종 이야기해. 그들은 노예나 하인 따위가 아닌 주체적으로 크게 해. 나도 자발적인 수하를 원하지, 강제로 끌려온 사람은 원치 않으니.”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에 대한 의논이 마무리했을 때, 발란스가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그런데 공자님. 근래 다시 새로운 조직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고스트가 처리하지 못할 조직이야? 그러면 요르크에게 실망인데?”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이…….”
“혹시 큰아버지가 또 손을 쓰고 있는가?”
“귀족들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내 경비대가 대 놓고 편을 들고 있는 상황이라…….”
“그리 신경 써야 하나? 귀족들이고 경비대고, 에르페유 경과 매지스터 헤르메스의 신경을 건드릴 수 없을 텐데?”
애초에 그 두 사람에게 그리 많은 지분을 떼어 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사실 흑사회를 장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위급 지위에 실제적인 세력까지 있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명예, 그리고 기존 조직들을 비호하고 있는 귀족들과의 충돌 때문이다.
발란스가 말했다.
“그게 철저하게 다른 쪽만 치고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다른 쪽이라면?”
“사채와 인신매매입니다. 그리고 약 시장 쪽이 있습니다.”
“…….”
“공자께서 금지시킨 삼 대 사업이지만…… 이쪽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입니다. 벌써 기존 세력들은 물론이고, 용병들까지 고용할 정도로 조직이 커졌습니다. 이대로 가면…….”
발란스가 계속 말하려는 순간 로라스가 간단하게 한마디 했다.
“조져!”
“…….”
“실력은 고스트가 최고 아니었어? 내가 선택한 이유이기도 해. 번잡할 게 없으니까.”
“그게…….”
“명분을 잡고 움직여. 우리 쪽 사업과 어떻게든 엮으라고. 엮이면 건드릴 수는 없잖아.”
“한계가 있습니다. 공자. 결국, 비호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피는 반드시 흘리게 되었고. 저희가 실력은 최고지만.”
발란스는 오래 이야기했고, 틀렸다고 할 만한 말들은 없었다.
머릿수란 싸움에서, 특히 이런 소규모 전투에서는 더더욱 절대적.
무엇보다 용병들까지 고용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력자들도 있다고 했다.
‘이거 왜 자꾸 건드는지.’
로라스 입장에서 베스타인 공작만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손 쓰고 싶은 사람이 바로 디존슨이다.
‘언젠간 기회는 오겠지만.’
에렌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부딪쳤을 때, 제법 쓸 만한 방법이 몇 개는 됐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밀리는 것도 탐탁지 않았던 로라스는 고스트를 내세운 대리전을 생각했다.
“사람 숫자가 모자라니 더 과감해야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압박이 들어오면 그때는 내가 나선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고 맞서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공자.”
고개를 숙이는 발란스를 보며 로라스는 조금 미안했다.
싸우라고 했지만, 수세는 피할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냥 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로라스는 발란스에게 전음을 보냈고 발란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은 나무뿌리는 너무 거대하여 한 번에 제거하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해. 힘들어질 거야. 하지만 버텨. 버티고 때가 되는 순간 에렌은 완벽하게 너희의 손에 들어갈 테니까. 내가 그리 만들어 줄 테니.”
“네. 알겠습니다. 공자. 제가 걱정을 너무 많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걱정은 무슨. 문제 될 거 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나로서도 손을 쓰기 힘들다는 것뿐. 내가 여유가 있다면 강제로 뽑아내겠는데…….”
“제국에 가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발란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쪽에서 암살자들을 고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너희 싸움에서 그런 놈들도 쓰나?”
“전문적으로 따로 고용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효과는 좋습니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해도 심리적으로 위축시킬 수는 있으니까요.”
발란스는 그리 대답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다만 이번에는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디존슨 백작 측근의 귀족이 직접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귀족이 직접?”
“네. 저희 쪽을 노리는 것 같지는 않고…….”
“날 노린단 말인가?”
“그럴 확률이 있지 않겠습니까? 공자님도 후계자의 후보가 되셨으니까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벌써 알려졌나?”
베스타인 공작은 측근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아직 바깥으로는 공표되지 않는 사실이다.
“이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가 상당합니다. 공자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사내가 술집에서. 그리고 여자를 끼고 있을 때 무슨 말들을 하시는지.”
로라스는 순간 속으로 ‘아!’ 하는 게 있었다.
‘우둔했어!’
뻔히 알면서도 간과했다.
간과한 건 바로 정보!
무력을 갖추고, 사람이 갖춰지면 무엇한단 말인가? 내 등을 누가 노리고 있고, 또 내가 누구를 겨뤄야 할지 모른다면 말이다.
‘너무 편하게 지내긴 했지.’
솔직히 우쭐한 것도 있었다.
약간의 위기가 몇 번 있긴 했지만, 뜻대로 안 풀린 적은 없으니까. 그리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능력이 있어 알아서 잘들 하는 경향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정보 조직을 가장 먼저 갖췄어야 했는데. 특히나 에렌에서면 더더욱 필요한 게 그거 아닌가?’
인맥으로 알음알음하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필요할 때 착착 준비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한, 락을 위한 정보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또 운 좋게도 자신은 그걸 쉽게 만들 힘이 있었다.
에렌의 최대 유흥가를 손에 넣고 있었으니까.
‘이 시커먼 사내들이 그걸 잘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고스트의 발란스와 요르크가 정보 조직을 구축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때 발란스가 한마디 하자 로라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난 걱정보다 어떤 놈이 올지 기대가 되는데?”
“공자의 무위는…… 저도 잘 알지만.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바닥에서야 암살자들은 거기서 거기지만…… 전문 암살자들은 또 다릅니다. 만약 그쪽에서 전문 암살자들을 고용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로라스는 그래 봤자 자객 따위라 생각했다.
제 실력이 모자라 암습, 매복 등으로 생명을 해하는 모자란 놈들!
그게 로라스가 가지고 있는 자객의 정의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