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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54화 (15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4)

상대가 상대인 만큼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베스타인 검법에 파생된 창법이 아닌, 손에 익숙한 건곤창법.

하늘의 건(乾)과 땅의 곤(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공방과 내외공의 조화를 이룬다.

무인마다 자신의 무기가 최고라 하고, 검이 가장 흔하니 만병지왕이니, 뭐니, 하지만…….

‘창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먼저 무기로 썼을 거라 생각되는 도구.’

긴 무기의 장점을 살려 적의 접근을 허용치 않고, 또한 무게 중심을 이루면 단병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슈아아아앙.

허초는 없다. 바로 커터를 상하로 살짝 흔들며 앞으로 내밀었다.

차아아아앙!

긴 철음이 울리며 할아버지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좌측으로 움직인다.

창을 반쯤 회수하며, 반대로 회전하여 아래에서 위로 친다.

타아아앙!

강렬한 충돌음.

올라가는 커터를 검은 아래로 내리눌렀다.

힘도 좋다.

아무리 포스를 사용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위치의 유리함을 가졌다지만, 한 손이 두 손을 이길 수 없는 법인데. 조금의 밀림도 없었다.

‘오겠지.’

한 손으로 버티는데 두 손으로 밀었다면 내리눌렸을 터. 하지만 굳이 저런 수를 쓴다면 뭔가 있을 것이고.

피이이이이잉!

역시나 왼손의 검지와 중지가 뭉쳐 그대로 찔러 들어왔다.

그나저나 손으로 움직이는데, 소리가 참 겁난다.

배꼽 중심축을 비틀어 손을 피하며 한 걸음 전진했다. 커터를 짧게 잡고 검과 공방을 벌이며, 나도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대련은 난투(亂鬪)가 재미있는 법이다.

가진 초식과 내력은 물론이고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수까지 모두 끄집어내야 하는 게 난투.

짧은 철음과 살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런 난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발 꼬이십니다.”

“네놈의 중심이나 흐트러지지 마라.”

바로 보법. 발의 움직임이다.

나가야 할 때 나가야 하고, 물러날 때 물러나야 한다. 거기에 발을 고정하여 상체를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필히 발이 꼬이고, 발이 꼬이면 하체가 무너진다.

무인들이 무식하게 하체를 단련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손은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공간을 이용하지만, 발은 아니다. 공간이 아닌 면(面)만을 이용한다.

그래서다.

변초가 진초가 되고, 진초가 허초가 되는 상황에서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최적의 위치를 점하려면 손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의 규칙이 깨지고, 균형 감각과 하체의 힘을 이용하여 버텨야 하는 경우가 많다.

퍼어억!

자세가 그리 좋지 않았다 판단했는데. 숄더 대시의 힘이 의외로 컸다.

처음에는 버텨 보려다가, 버티다가 밀리면 수가 없어진다. 어쩔 수 없이 한 발 뒤로 물러났는데 말이다.

‘훗차!’

물러난 왼발의 위치가 좋지 않았다. 숄더 대시에 상체의 균형이 좋지 못한 까닭이다. 이 상황으로 버티다가는 허리 뒤축이 무너질 터.

그대로 오른발을 내밀어 할아버지의 허리를 노렸다.

“권각으로 하자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차기를 할아버지는 그리 받아들인 듯했다.

그런데 표정은 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

“에르페유를 내가 지도했다.”

호쾌한 목소리와 함께.

파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에 가까운 파공음.

‘나 지금 날아가고 있는 건가?’

두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 걸 보면 날아가고 있다.

오른쪽 팔뚝이 욱신거렸다.

‘아! 아픈데.’

다수도 아니라 일대일의 대련에서 이런 타격은 아주 오랜만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묘한 포즈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검을 버린 채로 오른손을 폈다, 쥐었다 하며 마치 강아지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 포즈는 좀, 아니 많이 유치하신데요.”

“네 녀석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뜻이지.”

큰일인가?

내 수준이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호승심이 들기 시작한다.

나보다 고수인 상대로 흥분을 해서 좋을 게 없는데 말이다.

“갑니다!”

이런 박투로 전력을 다하는 쾌감은 느낄 수 있지만, 가져가는 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기만 했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이런 도전자의 입장은 생소하여 더 흥분됐다.

“갑니다!”

박투다!

* * *

“허어억! 허억!”

베스타인은 거친 숨을 연달아 토해 냈지만, 쉽사리 숨을 고를 수 없었다.

‘고얀 놈!’

대련은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끝은 호기심이 아니라 호승심이다. 그리고 이리 숨을 헐떡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고얀 놈!”

베스타인은 계속 드는 생각을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고약하기는…… 할아버지가 더 고약……하시지요.”

“뭐라?”

“손자를 이리…… 구타하시는……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밖에…… 없을 겁니다.”

로라스의 말에 베스타인은 피식하며 말했다.

“구타냐? 대련이었지.”

“적당히 손을 쓰셔야죠……. 이거…… 며칠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베스타인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입만 여는 로라스에게 다가갔다.

“아프냐?”

“실컷 때려 놓고…… 그리 물으시면 정말 고약하신 건데요.”

누워서 헐떡이는 로라스에게 손을 뻗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겠습니다. 할아버지도 힘드시면 여기…….”

로라스는 베스타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닥에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앉으세요.”

“아무래도 그래야겠구나.”

베스타인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얼굴로 로라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어떻게 배운 것이냐? 내가 세상의 모든 무공을 아는 건 아니지만, 네놈 거는…….”

“꿈에서 배웠습니다.”

“장난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정말 꿈에서 배웠습니다.”

로라스는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베스타인 입장에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

“뭔 꿍꿍이가 그리 많은 건지.”

베스타인은 퉁명스럽게 그리 말하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혹시 하늘 산맥에서 뭔가 얻은 것이냐? 어떤 사람들을 만났거나.”

“하늘 산맥의 공기가 기력 충만한 느낌은 있었고…… 신기한 사람들은 만났지만…….”

로라스의 머릿속에는 순간 프라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혹시 베스타인이 그를 말하는 건가 싶어 물었다.

“하늘 산맥에도 사람이 삽니까?”

“산다기보다는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지. 클로저들.”

“할아버지도 아시는군요.”

“만났느냐?”

“몇 명 만났습니다.”

“뭔가를 배웠느냐?”

로라스는 순간 베스타인의 목소리에 기이한 흥분이 담겨 있다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배운 건 없습니다. 다만 게이트니, 선택받은 자니, 필요한 정보와 옛날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좀 들었을 뿐이지요.”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이더냐?”

“그게…….”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로라스는 프라일을 비롯하여 차윤. 그리고 다른 클로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랬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베스타인은 묘한 실망감을 얼굴에 드러내자 로라스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찾는 분이라도 계십니까?”

“찾는다기보다는 만나 뵙고 싶은 분이 계시지.”

담담한 목소리에서 중요한 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뵙고 싶은 분’이라는 부분이었다.

황제에게도 반 존대 정도밖에 하지 않는 공작이다. 그런데 만나 뵙고 싶은 분이라니.

“어떤 분인데요?”

베스타인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는 망설이는 것처럼 말이다.

“할아버지?”

“하늘 산맥의 심판자.”

“네?”

뜬금없는 소리에 로라스가 의아해하자 베스타인은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이야기가 길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왜 게이트가 생겼는지부터 알려 줘야 할 테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게이트는 그냥 자연스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웃기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 그걸 자연의 섭리라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때 베스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도 몰랐을 때는, 그런 건, 신화 같은 만들어진 이야기라 생각했으니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랬다.

이 세계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인간과 수많은 종족과 그들의 신이 직접적인 소통을 하던 시대.

세계가 멸망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지. 그리고 그 오만은 신에 대한 도전으로 이뤄졌고.”

벌이 내려졌다.

일 년 가까이 비가 내렸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숫자가 대폭 줄었다.

종들은 반성하며 신에게 용서를 빌었고, 간신히 멸종을 면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나 신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신관이 탄생했다.”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생명체들.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신성력’이라는 단어는 신관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모든 종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신벌을 기록하였고, 후대에 그걸 전수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종들은 망각의 동물들.

“종들은 선대의 기록을, 구전을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다시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공작은 로라스를 보며 물었다.

“오만의 탑이라 들어 보았느냐?”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설인 줄 알았는데…….”

오만의 탑은 하늘 산맥에 자리 잡은 탑의 이름.

그 어떤 높은 산도 탑의 높이에는 다다르지 못했다고 했다.

“전설이 아니다. 실존하고 있다. 이 할아비가 직접 본 적이 있으니까.”

베스타인은 오만의 탑이 바로 신에 도전한 증거라 말했다. 하늘 끝에 다다라 신과 대면하겠다는 오만의 증거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는 계속 말했다.

“기억하는 이들은 손을 써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두 가지로 나뉘었고, 분열했다.”

세계를 통제하여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류. 압박을 통한 통제는 또 다른 벌이니,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부류.

“오랜 전쟁의 기간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선택받은 자들이란 종족이 태어났다. 신이 인간을 지켜보기 위해 선택한 자들.”

베스타인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정리하면 이랬다.

신이 다음 벌로 준비한 것은 새로운 종의 탄생. 그리고 그 종이 바로 지금의 마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의 선택에 따라 그 종을 탄생시킬지, 봉인시켜 둘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마물들이 날뛰는 걸 보면…… 벌은 내려진 거군요.”

“선택받은 자들도 선택이 갈렸다. 모호한 상태인 거지. 감당할 만한 숫자로 나타나고 있으니까.”

“그럼 게이트를 닫는 클로저들이 있는 것처럼…….”

“맞다. 반면 게이트를 여는 오프너들이 존재하지.”

“솔직히 백 퍼센트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걸 다 이해할까? 여하간 이게 백 년 전의 일인데, 결정이 되지 않았으니 심판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리고 이 할아비는 심판자를 만나 뵌 적이 있다.”

베스타인은 로라스를 뚫어지게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기이한 포스. 왠지 그분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

“그 어떤 나라, 가문에서도 볼 수 없는 그 포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그 기운 말이다.”

로라스는 상체를 일으켰고, 그런 그를 보며 베스타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하니 네가 말한 농이, 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꿈도 따지고 보면 다른 세계일 테니 말이다.”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에 로라스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전 로라스입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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